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괄 (문단 편집) == 생애 == 명장 [[조사(전국시대)|조사]]의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익혔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도 병법에 더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괄은 이론에만 뛰어났을 뿐, 실전에서 대군을 지휘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 '''"우리 집안에 대를 이어 명장이 났다"'''고 조괄의 어머니가 기뻐하자, 조사는 아내에게 '''"전쟁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괄이는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며 아들이 [[장수#s-2]]가 될 그릇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조사가 죽은 뒤 진(秦)과 조(趙)가 큰 전쟁을 벌였는데, 진나라 대장 [[왕흘]]이 조나라 백전노장 [[염파]]를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되자, 진 승상 [[범수(전국시대)|범수]]는 꾀를 내어 비밀리에 진나라 대장을 [[백기(전국시대)|백기]]로 교체하는 한편 '염파야 껌이지만 조괄은 좀 짱인 듯'하고 헛소문을 냈다. 당시에 염파는 전략적 견벽거수[* 공격 대신 수비로 일관하는 [[우주방어]] 작전으로, 이러면 원정군인 적군은 쓸데없이 군량, 돈, 인력을 낭비만 하게 된다. 하지만 속전속결이 아니라 지루한 대치가 길게 이어지므로 방어측의 국력도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군주의 조바심과 의심을 내오기에도 딱 좋다.]를 하고 있었고, 이 짓거리에 슬슬 조왕도 지쳐가다가 솔깃해진 [[조효성왕]]은 염파를 내치고 조괄을 장수로 기용한다. 이때 재상 [[인상여]]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에게 "조괄은 고작 그의 부친이 남긴 병법서만 읽었을 뿐 전장에서 임기응변할 줄 모르므로, 그를 장수로 삼는 것은 마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둔 채 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극구 만류했다.[* 이 말에서 유래한 성어가 교주고슬(膠柱鼓瑟).][* 거문고로 곡을 연주할 때는 거문고의 현을 받치고 있는 기러기발을 옮겨 곡에 맞게 악기를 조율해야 하는데, 이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놓으면 한 곡은 연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곡들은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즉, 융통성이 없이 어리석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병법을 잘 안다면서 정작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는 모르는 조괄에게 딱 들어맞는다.] 심지어 앞서 자기 아들이 어린 시절만 해도 칭찬과 기대를 아끼지 않던 조괄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조사는 거느리는 식객이 수십이고 나라 안팎에 수백의 벗을 두었을 만큼 인망이 두터웠으나 조괄은 그만한 인망이 없고, 왕이나 종실에서 내린 하사품을 조사는 부하들에게 베풀었으나 조괄은 독점하고 있으며, 출정 명령이 떨어지면 조사는 집안일에 일절 신경쓰지 않고 군무에 몰두한 반면 조괄은 군무에 아랑곳없이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청컨대 조괄을 장수로 내보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제발 자기 아들을 장수로 삼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뭔 사달을 내도 가족은 벌하지 않겠다는 조왕의 약조를 받고서야 물러났다. 당시의 법으로는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적(敗積)하면 [[연좌제|그 일족도 친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평대전|결국 조괄의 어머니와 인상여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이렇게 [[낙하산 인사|낙하산]]으로 총대장이 된 조괄은 변변한 실전 경험도 없으면서 병법대로(?) 나서겠다며 염파가 기존에 세웠던 전략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덤볐으나, 명장 백기의 거짓 퇴각에 속아 두 갈래 길에서 격파당한 뒤 역으로 진나라 포위에 말려들었다. 40여 일간 포위된 채 아군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굶주리던 조나라 군대는 마지막 돌격에 나섰지만 결국 완패했다. 대장 조괄은 매복에 걸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사로잡힌 조의 병사가 무려 '''40만'''이었다. 진에서는 이 가운데 소년병 240여 명만 풀어주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생매장]]해버렸다'''. 이들을 전부 진나라로 끌고 가 관리할 여력은 없는데,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낼 경우 패배의 굴욕감에 불탄 이들이 뒤에 큰 후환거리가 될 거라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조나라에서는 젊은 남자의 씨가 말랐을 정도라고 하며, 국력이 크게 기울어 슬슬 막장테크를 타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왕은 아들을 등용하지 말아달라고 간했던 조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조괄의 남은 일족은 벌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그 덕에 가문의 대가 끊기지는 않았는지, <[[후한서]]> 마원전에 따르면 [[마원(후한)|마원]]은 조사의 후손이었다고 하는데[* 조사가 마복군(馬服君)이란 호를 받아 그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성을 바꾼 것으로 보아 서자나 방계일 가능성이 더 높다.], 조괄의 직계인지 아니면 방계(형제의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