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단 (문단 편집) == 7살의 나이에 엄마가 되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67년(영조 43년 윤7월), 경상도 [[산청군|산음현]]에서 7살 여자아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조혼]]이 만연하던 조선이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도 너무나 어린 나이인 7살 여자아이가 임신하고 출산한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당시 국왕인 영조는 종단을 [[요괴]]에 비유하며 탄식했고 좌의정 한익모와 좌부 승지 윤면헌이 없애버리자고 청하였지만, "이 역시 나의 백성 중의 한 아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라며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구상(具庠)을 어사로 보내 종단의 형 이단(以丹)을 심문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307102_001|실록]] 심문 결과 소금장수 송지명(宋之命)이 종단이 낳은 자식의 아버지라는 증언이 나왔고 그래서 송지명 본인을 잡아다 심문하니,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실토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307129_002|실록]][* 구상이란 어사가 이 사건을 조사했고 그의 보고에 따르면 종단이 7살이라곤 하나 몸이 다 자랐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종단이란 아이는 [[호르몬]] 이상 등의 원인으로 인해 지나치게 빨리 성장하고 급성장과 함께 [[성 조숙증|성 조숙]]이 왔음으로 추측된다.] 영조는 종단과 송지명이 풍습을 문란하게 했다 하여 [[노비]]로 삼고 각각 다른 섬으로 [[귀양]] 보내버렸다.[[http://www.sciencetimes.co.kr/?news=세계-최연소-산모-종단이-사건|#]] 또한 종단의 어머니에게도 간수를 못한 죄를 물어 역시 노비로 삼아 섬으로 보내고, 갓 태어난 종단의 아들 역시 노비로 삼아 섬으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산음 현감은 첫 보고서가 날림이었다는 죄명으로 사적에서 삭제[* 명부에서의 삭제는 조선시대 양반 관료로선 굴욕 중 하나다.]되고, 지명 탓에 일어난 일이라는 식의 언급과 함께 지명도 영조가 아예 바꿔 버렸다. 이렇게 해서 바뀐 이름이 현재의 [[산청군]]이다.[* 산음(山[[陰]])의 음(陰)은 [[음부]], [[음경]], [[음모(신체)|음모]]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글자이다.] 종단과 그 아들은 섬에 도착하고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성인 여성도 [[산모사망|출산 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아 사망률]]도 높았는데,[* 1800년대까지 [[4원소론]]에 억지로 짜맞춘 [[4체액설]]이 보편적이라, 감기를 고친다고 엉뚱하게 피 뽑다가 죽을 수도 있는 곳이 유럽이었다. 국가 기관급이면 이런 구시대의 의학을 빠르게 고쳐도 근대 의학이 충분히 널리 뿌리내리기에 수십년이 걸렸다. 특히 당대 미국이나 러시아 같이 낙후된 나라라면 더욱 그랬다.] 막 출산한 7세 여아와 갓난아기가 그 힘든 귀양길에 올랐으니 신체에 큰 무리가 되었을 것이고 갓난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가해자 송지명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종단의 가족은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도 살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1783년 [[이덕무]]가 지은 《한죽당섭필》에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와전되어, 아예 "종단이라는 요괴의 일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