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시작의 성격 === 일제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1920~30년대생 상당수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일본 국민의 신뢰추락 회피, 중국을 인정치 않았던 일제의 정책 등이 있다. 결국엔 제국주의 침공을 면피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행각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제가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 내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제가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적인 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제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제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 시작 시에는 공식적인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제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탈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입장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국제법상으로 변명할 수 없는 전범행위다. 특히 일본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전혀 의미가 없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행적들을 보인데다가 그러나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다. 그 때문에 1941년 12월 9일 [[장제스]]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중일전쟁은 공식적으로는 [[사변]], [[영토 분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