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사상 (문단 편집) == 중화사상의 내용 == ||||||[[파일:/20160108_291/1452260563657s32dx_JPEG/%C1%DF%C8%AD%BB%E7%BB%F3.jpg|width=100%]]|| || || [[북적]] || || || [[서융]] ||<#FFFF00> [[중화(중국)|중화]] || [[동이]] || || || [[남만]] || || [[한족]]은 전통적으로 자신들 밖의 다른 나라나 민족은 자신들과 구별지어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중원]]을 중심으로 각각 [[동이]](동쪽 오랑캐), [[남만]](남쪽 오랑캐), [[북적]](북쪽 오랑캐), [[서융]](서쪽 오랑캐)이라 칭하였다.[* 사실 중국이 진나라 이후로 영토 확장을 하면서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기 전까지는 중화의 영역이 중원으로 한정되었다. 즉, 지금은 중국의 일부인 산동 반도나 수도 베이징이 있는 중국 동부 지방도 모두 예전에는 동이로 취급되었다. 베이징이 수도로서의 위상이 오른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며 그전까지 중화문명의 중심은 [[시안시|시안]]과 무려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뤄양]]이었다.] 사실 고대 중국들의 입장에서는 가운데 나라(中國)라고 할 만한 것이 북쪽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혹한과 눈밭이 있는 [[시베리아]]가, 서쪽은 현대에도 교통이 어렵고 살기 척박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막고 있고,[* 그나마 위구르와 티베트, 카자흐스탄 지역에 실크로드가 있긴 했다. 다만 중~근세 쯤에 육로를 통한 동서 무역이 줄어들면서 한동안 잊혀졌다.] 동쪽으로는 [[일본|자연재해가 잦은 섬들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태평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정글지대와 섬들이 있을 뿐이다. 특히 고대 중국의 화남 지방은 습지와 정글로 차있었으며, 전염병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습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이 [[오(삼국시대)|오나라]]이며,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동진]] 시절부터이다. 그러다보니 고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땅이자 국가라는 세계관은 이러한 지리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명칭인 '중화(中華)'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화사상은 중앙[中]을 중심으로 미개한 주변부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이 '세계 유일의 [[황제]]' 개념이 정립되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나머지 지역은 [[왕]] 혹은 [[제후]] 개념이 정립되어 발전한 중국의 역사 및 세계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는 '중심부[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정점으로, 각지의 왕 혹은 제후'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천명) 및 인구와 영토에서 기인하는 문화력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중화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상임과 동시에 국가간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외교였다. 때문에, '''과거 역사의'''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단순히 천명을 바탕으로 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론적인 사상으로야 천명사상과 황제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 어떤 국가를 상대로도, 심지어 당시 동아시아 전 국가가 연합해서 공격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중국의 국력과 지위를 인정하고, 중국은 황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황제국의 권위를 누리는 대신 한반도 국가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군사적 안전(독립)과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하사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수많은 선물을 지급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이 강할때면 주변국들이 중국의 눈치를 보았지만 중국이 약해지면 바로 주변국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요나라나 서하, 금나라 등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던 송나라는 정통 한족 국가임에도 황제국 행세는 겉치레였을 뿐, 거란과 여진을 자력으로 물리친 고려의 눈치를 보며 고려에 꼼짝하지 못했고, 중화식 외교관계에 어두워 주변국으로부터 뜯어내기만 할 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던 원나라는 황실의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지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바로 고려에 의해 쌍성총관부를 공격받게 된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과 외교관계가 안정화되고 우호국이 된 후에 매년 조선에 보내는 하사품으로 인해 재정 부담을 겪었으며, 국가가 안정적이던 명나라 초중기에도 조선의 사신에게 '제발 적당히 좀 오면 안 되겠냐'며 조선의 공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조선이 공물을 보내오면 그 공물의 몇 배는 되는 값어치의 하사품을 단순히 '천자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출해야 했으니까. 특히 명은 몽골과도 몽골이 보내는 공물로 크게 갈등하여 전쟁이 터진적이 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중국은 이 중화사상 때문에 외국들과의 갈등이 커져 중국의 외교가 갈수록 시궁창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고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한중관계는 갈수록 경색되어가고 있으며,[* 2010년대 초만 해도 넷상에 반중보다 반일이 더 짙은 분위기였는데, 2010년대 후반은 인터넷의 반중 감정도 반일 감정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짙어졌다.] 자국의 어민들이 벌이는 불법 조업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태도와 남중국해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또한, 한때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하려던 중국이었으나,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도 현지인 고용을 잘 하지 않는 등 투자로 인한 경제적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만들로 반중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교 전문가들도 '''중국은 과거 명청 시대의 외교보다도 후진적'''이며, "중국의 외교관들은 이대로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평가를 내릴 정도로 중화사상은 중국의 외교적 행보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전근대에 조공무역은 중국이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도 안정적으로 통일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오호십육국시대]]나 [[오대십국시대]], [[원나라|원]] 정도를 제외하고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답지 않게 통일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으며, 국가가 분열될 때도 외세의 침입보다는 내분과 반란으로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공산국가 건국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질서가 파탄나면서 '''체면 문화가 사라지고''' 인문학이 박살난 반면, 공산당의 국수주의 정책으로 강한 민족주의만 남게 되면서 주변국을 향한 일방적인 갑질로 바뀌어버렸다. 이 때문에, 외국과의 갈등이 심해졌고 과거와 달리 현대 중국은 변질된 중화사상으로 인해 외교에 큰 지장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 현대 국제사회에서 믿을만한 동맹국 하나 없이 고립되어버린 가장 큰 원인으로 변질된 중화사상이 지적받고 있다. 사실 이는 광대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중국의 전통과 유교사상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중국인들 스스로가 박살내면서, 그간 유지되던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복속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간은 천하제일국이라는 자부심과 화의 민족이라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지켜왔으나, 이것이 박살나면서 중앙정부가 손길이 안 닿는 지방을 복속시킬 방도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화사상을 부활은 시켜야 되는데, 이는 또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는 현대식 평등주의와 사회주의에 정확하게 반대된다. 그러다보니 어줍잖게 부활시킨 중화사상에 민족주의를 섞고, 거기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섞다보니 지금의 민폐 중화사상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