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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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中華思想[1]
영어: Sinocentrism
프랑스어: Sinocentrisme
중국인(주로 한족[漢族]) 특유의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자 실질적 종교. 골자는 중화 문명(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문화적 역량이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으며, 다른 문명을 오랑캐로 낮잡아보는 사상. 국가 명칭부터가 '중심 국가'라는 의미의 '中國'이다.
되려 젊은 중국인일수록 중국 정부의 애국주의 교육으로 인해 중화주의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해외와의 교류가 많은 중국인들의 경우는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중국에서 자국 여권 보유자 비율은 고작 8%밖에 안 된다. 즉, 그 수가 별로 없다.
2. 중화사상의 내용[편집]
한족은 전통적으로 자신들 밖의 다른 나라나 민족은 자신들과 구별지어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중원을 중심으로 각각 동이(동쪽 오랑캐), 남만(남쪽 오랑캐), 북적(북쪽 오랑캐), 서융(서쪽 오랑캐)이라 칭하였다.[2]
사실 고대 중국들의 입장에서는 가운데 나라(中國)라고 할 만한 것이 북쪽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혹한과 눈밭이 있는 시베리아가, 서쪽은 현대에도 교통이 어렵고 살기 척박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막고 있고,[3] 동쪽으로는 자연재해가 잦은 섬들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태평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정글지대와 섬들이 있을 뿐이다. 특히 고대 중국의 화남 지방은 습지와 정글로 차있었으며, 전염병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습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이 오나라이며,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동진 시절부터이다. 그러다보니 고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땅이자 국가라는 세계관은 이러한 지리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명칭인 '중화(中華)'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화사상은 중앙[中]을 중심으로 미개한 주변부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이 '세계 유일의 황제' 개념이 정립되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나머지 지역은 왕 혹은 제후 개념이 정립되어 발전한 중국의 역사 및 세계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는 '중심부[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정점으로, 각지의 왕 혹은 제후'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천명) 및 인구와 영토에서 기인하는 문화력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중화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상임과 동시에 국가간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외교였다. 때문에, 과거 역사의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단순히 천명을 바탕으로 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론적인 사상으로야 천명사상과 황제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 어떤 국가를 상대로도, 심지어 당시 동아시아 전 국가가 연합해서 공격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중국의 국력과 지위를 인정하고, 중국은 황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황제국의 권위를 누리는 대신 한반도 국가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군사적 안전(독립)과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하사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수많은 선물을 지급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이 강할때면 주변국들이 중국의 눈치를 보았지만 중국이 약해지면 바로 주변국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요나라나 서하, 금나라 등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던 송나라는 정통 한족 국가임에도 황제국 행세는 겉치레였을 뿐, 거란과 여진을 자력으로 물리친 고려의 눈치를 보며 고려에 꼼짝하지 못했고, 중화식 외교관계에 어두워 주변국으로부터 뜯어내기만 할 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던 원나라는 황실의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지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바로 고려에 의해 쌍성총관부를 공격받게 된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과 외교관계가 안정화되고 우호국이 된 후에 매년 조선에 보내는 하사품으로 인해 재정 부담을 겪었으며, 국가가 안정적이던 명나라 초중기에도 조선의 사신에게 '제발 적당히 좀 오면 안 되겠냐'며 조선의 공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조선이 공물을 보내오면 그 공물의 몇 배는 되는 값어치의 하사품을 단순히 '천자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출해야 했으니까. 특히 명은 몽골과도 몽골이 보내는 공물로 크게 갈등하여 전쟁이 터진적이 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중국은 이 중화사상 때문에 외국들과의 갈등이 커져 중국의 외교가 갈수록 시궁창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고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한중관계는 갈수록 경색되어가고 있으며,[4] 자국의 어민들이 벌이는 불법 조업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태도와 남중국해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또한, 한때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하려던 중국이었으나,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도 현지인 고용을 잘 하지 않는 등 투자로 인한 경제적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만들로 반중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교 전문가들도 중국은 과거 명청 시대의 외교보다도 후진적이며, "중국의 외교관들은 이대로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평가를 내릴 정도로 중화사상은 중국의 외교적 행보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전근대에 조공무역은 중국이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도 안정적으로 통일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오호십육국시대나 오대십국시대, 원 정도를 제외하고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답지 않게 통일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으며, 국가가 분열될 때도 외세의 침입보다는 내분과 반란으로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공산국가 건국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질서가 파탄나면서 체면 문화가 사라지고 인문학이 박살난 반면, 공산당의 국수주의 정책으로 강한 민족주의만 남게 되면서 주변국을 향한 일방적인 갑질로 바뀌어버렸다. 이 때문에, 외국과의 갈등이 심해졌고 과거와 달리 현대 중국은 변질된 중화사상으로 인해 외교에 큰 지장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 현대 국제사회에서 믿을만한 동맹국 하나 없이 고립되어버린 가장 큰 원인으로 변질된 중화사상이 지적받고 있다.
사실 이는 광대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중국의 전통과 유교사상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중국인들 스스로가 박살내면서, 그간 유지되던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복속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간은 천하제일국이라는 자부심과 화의 민족이라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지켜왔으나, 이것이 박살나면서 중앙정부가 손길이 안 닿는 지방을 복속시킬 방도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화사상을 부활은 시켜야 되는데, 이는 또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는 현대식 평등주의와 사회주의에 정확하게 반대된다. 그러다보니 어줍잖게 부활시킨 중화사상에 민족주의를 섞고, 거기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섞다보니 지금의 민폐 중화사상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
3. 형성 과정[편집]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상주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일로,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던 상황을 당시 문헌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으면서 '중국'과 '중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ㆍ한(漢) 시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전한 시대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지며 오행 사상 등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기본적인 외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주변 민족들을 동서남북 다 털어버리기 전까지는 내부에서도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이 더 남자답다고 여기고 가서 선우가 되어 한나라를 괴롭힌 사람들이나 조타처럼 다른 농경 이민족들의 왕이 되어 나름 부심을 부리고 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국제적 왕조인 당나라 이후부터는 주변국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남송대 이후 발달한 성리학은 천자 중심의 질서를 더욱 크게 강요하였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중화 사상이나 중국 문명 자체의 시초[5] 라고 볼 수 있는 주나라의 경우 연구 결과 의외로 초기에는 유목민 정복자[6] 들이었다. 기록에는 상나라가 매우 포악해서 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주나라 사람들 역시 초창기에는 주변 민족들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7]
4. 특징[편집]
4.1. 중국 전체의 통합[편집]
흔히 중화사상을 '오래된 중국의 민족주의' 정도로 이해하고는 하나,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혈통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을 많이 흡수하면서 중국이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며,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간 중의 하나가 '우월하게 세계의 중심에 선 화(華)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주족인 청나라의 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8]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9] 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만주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10]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11] .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민족구분이 없던 상태의 근대 중국에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이런 인식도 생겨났다. 아무튼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다만 당시의 민족 탄압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적용된 형태는 아니었고 민족간의 경계도 애매했다고 한다. 중화주의가 민족주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보통 태평천국의 난 전후로 본다.
현대에도 중화사상은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종족 혁명론에 근거해서 반청복명을 주장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나자 중화민족 개념을 급조해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걸 정당화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민족 왕조의 경우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한족 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나라 말기의 혁명파들은 청나라의 지배기간을 한족이 식민지배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근대적 민족주의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서구의 개념인 민족과 식민지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특히 중화라는 개념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따지면 어디까지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다.
반청복명의 혁명파들의 주장은 장빙린의 종족 혁명론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종족 혁명론은 한족만이 중화로 여겨질 수 있기에 수준 낮은 이민족을 배척해야 한다는 관점인데, 그래도 장빙린은 '한족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가 모두 별개의 나라가 되어야 하므로 한족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면 다른 민족들도 알아서 독립해서 나라를 세우라'는 나름 공평하고 쿨한 태도였다. 다만 이후 중화주의와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의 주장에 밀려 오족공화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파들은 청 왕조도 중화에 포함할 수 있다면서 혁명파의 이 주장을 반박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12]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 및 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중국은 자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무조건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들이 이민족을 거부했다는 것을 묻으면서까지 '중국은 처음부터 다민족국가였다' 라고 하는 방향으로 역사관을 굳히는 중이고 동북공정도 이 과정의 하나. 근대에는 혁명파와 개혁파의 해석이 충돌하긴 했지만 결국 이러저러 하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공화국 중국은 한족 중심의 체제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혁명파 이론을 지지하던 한족들도 정작 시대가 바뀌고 나자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를 보인다. 위구르와 몽골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군벌과의 투쟁이 계속되었고, 이 부분은 근대 중국의 제국주의적인 면모이지만 그냥 그 부분은 축소되고 군벌시대의 흥미진진한 통일 과정 정도로 여겨진다. 하여튼 여기에서 현대의 소수민족 문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특히 근대에 와서 더 이런 성향이 굳어진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일원으로 취급받게 된 연(燕), 초(楚), 오(吳), 월(越), 진(秦) 등의 공동체는 본래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 상주 시대 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의 방향성은 이 모두가 '중국'에 편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13]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에 진입했던 수많은 이민족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왕조 역시도 막상 유목민 시절을 벗어나 정주민이 되면서부터는, 중국의 압도적인 문화와 인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이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민족들이 중국에 미친 영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화사상과 민족의 팽창이 단지 문화와 인구를 앞세운 평화적 과정이라는 통념은 중화주의적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한족들에 의한 원주민 대량 학살과 식민화가 정석적인 수법이었고 삼국지 같은 고서만 봐도 의도적으로 이민족을 사냥하고 흡수해서 동화시키는 행위가 숱하게 존재했다. 그 많은 비한족 원주민 노예들은 다 어디서 왔겠는가?
이민족 문화가 흡수되어 중국문화가 형성된 경우로는 청나라 시절에, 중국인 전통의 상투가 사라지고 변발로 문화적 습속이 바뀌었으며, 이후 현대화를 거침에 따라 상투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문화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들이는 게 아니다.
이처럼 중화사상의 막대한 힘이 동아시아에 작용한 결과, 근대 이전까지의 2,000년간 중국이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하나의 틀 안에 묶고, 이를 제국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국이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 가능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꾸준히 정치적-통치적 폐쇄성을 띄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 한국 신화가 한국의 세계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도,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세계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 문화권의 과거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본래 반청복명,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이 갑자기 '하나의 중국'을 외치게 된 이유는 결국 정치적 이유가 90퍼센트인데, 막상 만주족의 지배를 뒤엎으며 독립하고 나니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티벳,위구르,외몽골의 영토가 탐이 나서다. 만주족 왕조 청나라, 즉 '만청'을 부정하면 그 만청이 두배로 넓힌 광대한 영토를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것. 그래서 갑자기 '56개 민족의 연합체'라는 사상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청나라가 무너진 후에 티벳도 독립했는데, 50년대에 마오쩌뚱이 티벳을 강제병합 한 이후로 중공은 지금까지 쭉 '역사적으로 티벳도 중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청나라) 강제병합이 아니며 티벳 독립운동도 반란분자들에 불과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4.2. 배타성[편집]
신체 구조, 군집성, 배타성 면에서 한족은 오랑캐와 구별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족은 전적으로 오랑캐와 구별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한족이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상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천지가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고 통제하고 있는데 인간이 스스로 사회 집단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중화사상은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당연히 강한 배타성을 깔고 있다. 사실, 현재의 중국인들도 다른 민족들을 깔보면서 오만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14]
이 배타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송나라 때 거란의 요나라와 전연의 맹을 맺은 이후로도 샌드백마냥 털리자, 송나라에서는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을 자력으로 물리친 전과가 있었기에 국격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려 사신을 인솔하던 소동파(시인으로 유명한 그 소동파 맞다)는 '오랑캐 놈들이 중화 민족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니, 그 꼬라지를 차마 볼 수 없다.'며 내내 툴툴거렸다고 한다. 송나라로서는 고려의 지원을 받아야만 요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중국인들, 특히 한족들의 배타성과 자국 우월주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15]
전근대 중국이 동아시아권에서 막대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중국 바깥 권역은 자연히 오랑캐라고 멸시되었으며, 이를 방위와 결합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호칭하며 깔보았다. 이는 중국의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중국에 사대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를 만난 명나라 사신 송응창은 "조선 왕이 고집이 세어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하니 한심하다. 오랑캐를 설득시키는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처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의 지원 요청에 북경에서는 황제에게 두 오랑캐(조선과 일본)끼리 싸우는 것이니 도울 필요도 없다는 자국 내 의견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부 중국인들에게는 소중화를 내세우던 조선도 대놓고 오랑캐였던 셈이다.
4.3.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편집]
과거 중화사상의 유래가 된 서적들의 내용을 살피면, 전간기 이전의 범게르만주의나 범슬라브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과거 중화사상은 현재 서구식 민족주의와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어 민족적 거부감이 적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로, 초기 로마가 팽창하던 시절, 라틴 문화권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도 있었다. 현실은 로마와 라틴 연합이 싸우게 되었지만, 결국 승리한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것만 봐도, 로마 역시 이런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주고,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보장된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연공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로마의 민족 역시 라틴 민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여겼으며 같은 라틴 문화권으로서 상당한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경우 한니발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 라틴 문화권에 있는 국가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았던 반면에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여러번 당할 때마다 중화문화권임을 자처하며 지원병을 제대로 보낸 나라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로마와는 상당히 다르다. 중화문화권에 속한 백제 또한 그 멸망 과정을 살펴보면 사비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도 지방 유력자들이 능동적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거나 지휘부가 통일되지 못해 각개격파당하는 모습을 주로 보인다. 부흥운동도 마찬가지로 세력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무엇보다도 백제는 중화문화권에 속해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사대하던 나라였는데도 침략당하여 멸망했다는 점이다. 이는 라틴 문화권과 중화문화권이 제각기 매우 다르게 작용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중국의 통일왕조들은 중화권의 영향이 크진 않은 편인 원나라 같은 이민족 왕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중화권에 속한 나라들에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건 아니었는데 중화 패권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 특히 고조선, 고구려, 신라, 여진족처럼 요동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세력들과 베트남은 중국에 잘 사대하거나, 딱히 위협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나면 별의별 트집을 잡혀 침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베트남이 숱하게 중국의 침공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원래 한나라, 당나라 시대에 자신들의 영토였으로 '다시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16] 중화사상 덕분에 중국과 주변국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베트남과 요동, 만주 지역을 집요하게 복속시키려한 시도들은 중화사상이 수틀리면 상대국가를 얼마든지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명분을 중국 통일왕조들에게 제공한 예시로 볼 수 있다.
전근대에는 당연히 혈연에 기반한 민족적인 면보다 학문적, 문화적 우월성이 강조된 사상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의 영향으로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국을 자처한 사례들이 많다. 한 예로 청나라는 40년 만에 중국을 자처했다. 이 경우 민족끼리 동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타민족, 타국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갖게 되었다는 선포에 가깝다. 중화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중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우리는 이런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서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가 들어온 최근의 시각이 아니라면 딱히 민족적 자부심을 훼손하지 않는 사상이기 때문에 실질적 창시자인 한족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중국이나 중화 자체가 근대적 민족 개념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최근에는 과연 이민족들이 마냥 동화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이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은 제시된다.[17] 역사해석에도 중화주의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4.4. 내셔널리즘과의 비교[편집]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와 일견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nationalism'은 근대 영국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개념이라서, 그 이전부터 존재한 중화사상과는 태생이 다르다.
'nationalism'은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인 '민족'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를 대표하는 정체인 국가를 성립 및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국민 국가는 고유의 언어, 문화 등을 누리며 타 국가와 구분된다. 이 개념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근대 민족주의의 수입 이전에도 중화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화 작업이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유럽에서도 소위 '민족주의'로 지칭되는 'nationalism'이 18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nation'의 구성원들이 뚜렷한 독립적 공동체 속의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민 국가의 보통 교육과 같은 것인데, 유럽에서 이것이 태동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전파 이후이며, 그것의 실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중국만이 이러한 'nation'의 개념을 근대 이전부터(그것도 기원을 찾자면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부터) 갖고 있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근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편이며, '자국 의식'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화(華)'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혈통보다는 정신적인 사상, 문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위 소중화를 표방한 주변국들도 중화사상을 인정하고, 조공 체제와 사대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상기했듯 그래도 오랑캐로 취급하는 중국인들은 있었지만. 하여튼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중화사상에 반드시 중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동반되었으므로, 화이관(華夷觀) 자체가 개별 국가의 이념을 덮는 보편적인 세계관의 역할을 크게 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 그 자체가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이익을 주면서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처럼 중국에 사대해도 지속적 침략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제국들은 대개 아군에게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중국 문명만의 특수한 평화주의 사상'이라는 해석은 현대 중국의 타민족 지배를 합리화하는 신중화주의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중화 질서에서의 서열도 국력의 영향이 있기는 했지만 딱 국력에 의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한족이 팽창주의적 면모를 보이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며, 사상과 문화의 차이로 흔히 소개되는 팽창 방식과 차이가 있어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 중국 남방 지역, 만주, 대만 등의 사례를 보면 제노사이드, 강제 이주 등으로 그 지역에서 타민족의 뿌리를 뽑은 후에서야 이주하는 방법이 한족의 팽창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민족의 문화를 금지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은 근대 식민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를 보면 이는 고대부터 중국에서 널리 통용되던 방식으로 이민족 정복 기록 후에도 이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영토도 딱히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가 이민족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 인간 사냥, 이주 혹은 한족 혈통을 자처한 후에서야 영토와 그 지역에서 한족 인구가 빠르게 팽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촉한 지역, 남방 개척 등이 마치 한 번에 그냥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이나 이민족들의 역사를 교차검증하면 실제로는 위의 대량 학살과 식민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딱히 혈연에 한정된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아니어야 할 일본 등지에서 오히려 스스로가 중화임을 주장하는 소위 소중화 사례가 나타난다. 이들이 혈통적, 인적으로 중화를 주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문화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라는 말로는 문화의 파급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에서 중화사상의 외연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는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18] 을 가진 공동체의 성립과, 이것의 수호를 동반하지 않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은 그 근저를 특정한 인적 집단에 둔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nation)과 타자와의 명확한 구분, 자기 공동체를 대표할 국가의 건립과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쏟는 반면에, 중화사상은 문화적 역량(그리고 그것을 통한 외부 세계의 '교화')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며, 그로 인해 동아시아 체제와 중국의 정체성을 떼어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이후 중국에 민족주의가 전파됨에 따라,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 간에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겪으면서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절까지의 중화사상이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일종의 자뻑이었다면, 현재의 중화사상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국민 국가의 구성을 위한 자국 통합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중화사상은 소수민족 통치를 합리화하는 하나의 중국의 이념적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중화사상은, 19세기 이전의 것과 일정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종합하면 전근대의 중화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5. 21세기 신(新) 중화사상(중화민족주의/중화제국주의)[편집]
사실 중화사상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이다. 국공내전을 거친 끝에 중국 대륙은 1949년 마오쩌둥에 의해 공산화되었고, 사회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념은 금지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가 금지되었다는 건 아니었다.[19]
이 때부터 중국 정부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사회주의식 세뇌를 시키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사상은 민간에 퍼져있던 일종의 동양 특유의 사회문화적인 자문화 중심주의에 불과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집권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중화사상을 국시마냥 밀어주지 않았다. 중국의 국시는 사회주의였지 민족주의가 아니었으니... 그런데 중국의 이념적인 상황을 뒤집는 사태가 터졌으니, 다름아닌 1989년 천안문 사태. 중국인들은 1989년 베이징 천안문 앞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중국 정부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가들을 전차로 밀어버리고 체포해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 이후 중공정부는 '국민들이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네? 이젠 사회주의론 국민들 선동 못 시킬듯. 이렇게 된 이상 민족주의로 간다'를 시전하며 국가주의 및 중화민족주의를 중국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기 시작한다. 특히 1990년대에 집권한 장쩌민은 민족주의에 기반해 외부의 적도 설정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일본. 장쩌민이 지지율을 위해 내세운 반일감정은 중국을 최고의 반일국가로 만드는데에 일조했고[20] , 이 반일 기류는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 대만, 일본, 한국 등에 대한 반감이 강하긴 했다. 다만 이는 사회주의 및 반자본주의에 기반한 감정이었지 민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21]
이런 중화민족주의 및 자국주의는 시진핑 및 시진핑 정권의 공산당의 주도 하에 더더욱 강조되는 중이다. 특히 시진핑 이전 시대에는 그저 권장 및 장려의 수준이었다면, 요즘은 이에 반대할시 탄압되는, 즉 강요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현대 중화사상의 특이한 점은 보통 민족주의라고 하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민족의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들을 강조하며 '우리민족 짱임'을 시전하는 형태인 반면, 역설적이게도 시진핑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조상인 청나라가 근대에 당한 치욕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나라 때 심한 굴욕을 당했고 서구 오랑캐들은 우리 중화의 정체성을 흐뜨려놓았다.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다시 중화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자' 식의 논리를 펼친다는 것.[22][23] 이런 식의 선동은 최소한 80년대에 강조되던 사회주의에 비하면 효과는 굉장했다. 특히 중공 국민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중이고, 이젠 심지어 자국을 오빠/형 등으로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 자체를 연예인처럼 보는 기류까지 새로 생겨나는 중이다.
5.1. 국수주의[편집]
자세한 내용은 국수주의/행태/중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패권주의[편집]
보다시피 쑨원의 주장 또한 중화의 덕(德)으로 주변국이 독립과 평화를 보장받았다는 전근대적 중화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면 이는 전통적 강대국인 중국이 상국 대접을 받는 것처럼 약소국을 보살피고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가까운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4]중국이 제1등국의 지위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옛날부터 중국에는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 이와 같은 좋은 정책이 있었기에 수천 년 간 강대했을 때에도 안남, 버마, 조선, 시암 등의 소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바람이 동으로 불어오자 안남은 프랑스에 멸망당했고, 버마는 영국에 멸망당했으며, 조선은 일본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국이 만일 강대해진다면, 우리는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일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만일 중국이 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세계에 있어서는 별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큰 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지금 세계의 열강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강해져서 열강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어 같은 길을 걷는다면, 그들의 자취를 그대로 밟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정책, 즉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정책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민족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약소 민족을 돕고 열강에는 저항해야 한다. 전 인민이 이 뜻을 단단히 정하지 않는 한 중국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아직 발전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뜻을 단단히 정해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강대해졌을 때 오늘날 몸으로 느끼고 있는 열강의 정치·경제적 압박에 의한 고통을 되새겨, 장래 약소 민족이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제국주의를 소멸시켜 버려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치국, 평천하'인 것이다.
우리가 장차 '치국평천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주의와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도덕과 평화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하고, 하나의 '대동의 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4억 인의 큰 책임이다. 여러분은 모두 4억 인민의 한 분자이다. 모두들 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주의의 참된 정신인 것이다.
-쑨원, 1924년 3월 24일 연설
즉,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는 쑨원, 더 나아가 전근대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역대 중국 왕조의 그것과 비교해도 크게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25]
[26][27]
대인이라면 군자의 면모를 보이고 덕을 베풀어야 함에도 오히려 소인배적인 행보만 보여주고 있으니 따를 리가 없다. 전근대 중국은 천자국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상당히 신경썼다. 그래서 과거 강대국에게 충성 및 우호의 의미를 지닌 조공도 황제국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제후국이 바친 조공보다 더 가치가 높거나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자국 백성들이 주변국에 민폐를 끼치면 오히려 가중처벌을 했다. 이는 중화사상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교의 종주국이라는 특성상 덕치를 근본으로 삼았고 항상 주변국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28] 특히, 그 상대가 조선 같은 제후국인 경우에는 오히려 국가가 자국 백성에 대한 보호를 포기했고, 자체적으로 처벌하고 나중에 보고를 올리라는 식으로 처리했다. 심지어 청나라도 역모, 밀수 등을 제외한 일은 조선에서 처리하도록 조치했다. 그만큼 중화제국들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모범을 보일 수 있게 노력했다. 그런 만큼 조선에서는 명 초기 때까지 남아있던 순장 풍습이나 공녀 요구에 대한 비판을 해도 중국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29] 그래서 당시 조선에서는 명이 국운이 기운 걸 알면서도[30] 차마 명나라를 내치자는 주장이 삼전도의 굴욕 전까지 거론되지 않았다.[31]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한 마디에 민족주의의 과격화를 막던 인문학과 유교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한 사상적 아노미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문화 우월주의와 타국을 향한 갑질과 천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영토 확장이 거의 불가능하여 영향력 확장 정도만 가능하고, 또 그런 것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중화사상은 패권주의와 다름없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 남중국해 등지에서 이뤄지는 분쟁이나 한반도에 대한 압박은 겉으로 보면 자원을 놓고 벌이는 충돌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나라를 장기적으로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어 제국 주변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팽창이 목적이라면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더욱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도련선 전략도 그 일환중 하나이다.[32]
이 중화사상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달리 중국은 상전처럼 위에서 군림한 채로 일방적으로 찍어내리는 듯한 외교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국익을 위해서는 강경하게 나올 떄도 많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찍어 내리지는 않는다. 여러 제제나 무력시위를 하는 등 강경책과 경제적 이익 제공하거나, 원조를 해주는 등 온건책을 당근과 채찍처럼 병행해서 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받아 들이고, 서방 세력에 합류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지급한다. 무력 시위나 개입은 최후의 수단에 가깝다.
반면 중국은 대국이자 상국인 자신의 나라를 중심으로 옛날 제후국이였던 국가가 중화 세계에 편입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옛 중화제국의 세력권으로 여겨지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고압적이고 일방적이다. 이 점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중화사상의 특징이다. 사실 미국 역시 자국의 세력권인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는 지극히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패권을 휘두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반중감정이 강한 것처럼 중남미 지역에서는 반미감정이 강하다.[33]
하지만 중국은 남미 일대에서 나타난 미국의 만행을 능가하는 막무가내식 고압적인 태도와 각종 이권만 가져가고 과한 책임을 부여하려하는 얌체적인 모습을 보여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중남미나 중동 일부 국가[34] , 아프리카 등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국가들도 점차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반중 감정이 전통적으로 중국과 교류했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더욱 심하다.
미국의 경우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주도해오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뤘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때문에 고립정책을 추구하던 도널드 트럼프 시절조차 기존과는 다른 정책으로 마찰은 있었을지언정 외교적으로 친미국가는 대우를 해 주었다. 즉, 갑질은 할지언정 최소한 갑질에 대한 대가는 줬고, 이 때문에 주변국들 입장에서도 자국민을 상대로 내밀 명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주변국들의 자주국방과 경제를 무시한 채 무조건 중국을 따르라고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데다가 그 태도나 형식도 미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며, 주변국 입장에서 자국민들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명분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의 견제책이 되어줄 국가로 생각했던 중남미 국가나 허울만 좋아보이는 중국의 식민지 정책인 일대일로를 통해 경제를 상승시킬수 있다고 기대했던 아프리카 등 초기에 친중이던 지역들 조차 얼마 되지 않아 전부 반중으로 뒤돌아섰다. 실제로 자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대일로에 참여했던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가 중국에 진 채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이 나고, 빚을 변제하기 위해 각종 이권을 넘기는 등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자 독재 정권이 아닌 국가들은 대부분 친서방으로 돌아서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자면, 이 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예시로 정말 자주 등장하는 전쟁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중국보다는 낫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쟁이기도 하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직접적인 원인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반전 시위이다. 이건 독재국가 중국에서는 꿈도 못꾸는 일이다. 즉 미국은 정부의 침략 전쟁을 시민들이 나서서 억제하는 것이 가능한 문민통제 민주국가인데 비해, 중국은 정부나 독재자의 행보에 시민들이 제동을 걸려고 하면 철권으로 다스리는 독재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심지어 시민들이 정부를 비판하기는 커녕 오랜 세월 이어진 중화패권주의 내셔널리즘에 세뇌되어 물개박수를 치며 자국 정부의 패권주의와 유혈 진압을 응원하고 있다. 이렇게 세뇌된 국민들이 자국정부의 침략이나 패권주의를 열열히 지지하는 국가로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넘볼만한 국력을 지녔음에도 미국-한국, 미국-일본처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진정한 동맹국이 없는 상황이다. 근처의 우호국이라면 공공의 적인 미국을 견제하려는 불편한 동맹국 러시아[35] , 중국에게 의존해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북한, 그나마 핵이라도 갖고 있는 파키스탄 정도가 있고 그 외에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같은 후진국 정도 뿐이다. 친중 성향이 있었던 말레이시아나 스리랑카 같은 곳도 2020년대 들어 일대일로 등의 악영향으로 옛날만 못한 상황이다.[36] 제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지역강국들의 협력 없이는 세계 패권을 쥘 수 없다. 즉, 근현대의 중화사상은 전통적인 중화사상과 결이 다른 민족주의, 패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시진핑의 장기집권 이후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속된다면 중화사상도 '중화 파시즘'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향후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의 전철을 밟는 시나리오마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다.[37]
사실 이미 중국의 군국주의화는 가시화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해마다 군사 퍼레이드의 규모가 점점 화려해지고 커지고 있으며, 예전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전략 역시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할 때 빼고는 완전히 사라졌다.[38] 또한, 중국의 국민들 역시 이전에 비해서 훨씬 자국우월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칭기즈 칸 같은 타민족의 영웅을 중화민족 영웅으로 삼거나 고구려 같은 찬란한 역사를 가진 주변국의 역사를 자국의 문명이라 주장하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39] 신화나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된 비유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는 등 점점 폐쇄적이고 광신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즉, 지금의 중국은 군국주의 국가가 막장루트를 타기 직전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 상황인 동시에 21세기의 동아시아판 나치독일+10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공산주의판 일본제국으로 변모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고있는데 이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소생 불가능 상태까지 가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핵을 날리는게 아니냐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정 중이다. 막장으로 유명한 공산당은 망해도 혼자 망하기보단 동귀어진을 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 사례
5.3. 외국에서의 시각[편집]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자의 훌륭한(?) 예시. 타국에서 중국인들 이미지 망치는 큰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40] 당장 옆나라 일본만 가도 이놈의 중화사상 때문에 중국인 혐오가 생긴 일본인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미국이나 캐나다같은 이민자가 많은 국가에서도 일부 중국인 때문에 이미지가 썩 좋지 않다. 덩달아 같은 아시아인인 한국인들까지 엿 먹이고 있다. 특히 같은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은 더더욱 심하다. 길가다 물어볼 게 있어서 동아시아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중국어로 물어 본다던가,[41] 새치기 역시 번번히 일어난다. 물론 단순히 무개념 중국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언어의 경우 중국이라는 나라가 인구도 많고, 북미국가는 중국인이 많을테니 동아시아인은 무조건 중국인이라는 잘못된 시각[42] 에서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심각한데, 영어로 말하라고 해도 끝까지 한어 병음으로만 채팅을 치면서 타국 유저들의 게임 진행에 어려움을 주는 중국 유저들 때문에 게임상에서도 중국인들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으며, 불법 프로그램으로 타국 유저들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중국인 핵 유저들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만 게임을 즐기는 정상적인 중국인 게이머들까지 피해를 받고 있다[43] . 이러한 잘못된 중화사상을 간직한 중국인들 때문에 엄한 중국인들까지 피해를 보는 것.
정치제도는 일당독재이긴 하되 과두정으로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이뤄지던 것을 시진핑이 사실상 일인독재로 후퇴시켜 버렸으며, 그 전에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주변국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배울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철학은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남발된 문자의 옥으로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문화대혁명까지 일어나고 계속적으로 탄압을 해 온 결과 유교 문화의 헤게모니는 이미 한국과 대만에게 넘어갔고,[44] 예술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뒤에도 지속적으로 검열을 해대니 문화·예술이 심각하게 지체되어 대중문화는 일본 문화와 후발 주자인 한류가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처지이다. 그나마 다 지난 과거 일이라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예산을 많이 부을 수 있는 사극 정도만이 주변국에 먹히는 수준.[45] 현실적으로는 결국 중화사상에서 중국 자신이 힘'만' 쎈 유목민 오랑캐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경제력 등의 국력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의 경우 미국 등 더 합리적인 대안에 기대는 형국.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며[46]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푸틴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반중 친러 행보를 나아감에 따라 중국이랑 대립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로, 미국은 결코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있지만 중국 견제에는 동참할 정도다. 동아시아는 현재 미중러 3국의 패권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인데, 이곳에서 만일 미국이 패권을 내려놓게 된다면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나토와 중동질서가 상당히 어지러워진다. 더욱이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패권을 반 강제적으로 내려놓게 된 영국의 위상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눈뜨고 똑똑히 보았다. 미국은 세계대전처럼 본토가 철저히 박살나는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동아시아(최소 일본)에서의 패권을 포기할 수가 없다.[47][48] 동아시아 패권의 포기는 연쇄작용을 일으켜, 유럽과 중동, 나아가 전 세계에서의 패권에 심각하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공산당의 교육과정은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중화사상까지 곁들여지니 필연적으로 중국 국민들의 과격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자기들이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뒤늦게서야 국민들에게 자제를 부탁하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49] 이는 중국 정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을 계기로 중국도 서방 세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중국의 젊은층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눈으로 보게 되었고 체제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대처럼 단순히 사회주의만으로는 인민 통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최근 중국 젊은이들 중 일부 극우층에서는 '중국은 평화롭게 지냈으나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무수한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는 자학사관이 깃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러니 이제 강대국이 된 중국이 되갚아줄 차례다.'라는 이상한 방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최근 쯔위 사태 역시 중국 정부 차원에서는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이런 국수주의 사상에 물든 젊은이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바람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만의 항의로 양안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중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로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안문제와 남중국해 문제, 미중무역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내에서 미국과의 패권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5.4. 중국 내부의 비판적 시각[편집]
사실 중국인도 사람인지라 자정 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당국에서 검열해 버릴 뿐. 쉬샤오둥, 천추스, 하오하이둥이 좋은 예.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실제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한 번 폭발하기도 했다.[50] 자신들의 자랑스런 나라가 현실에서 죽을 쑬수록 이 현상이 최근의 경제위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쳐질 확률이 높다. 쉬샤오둥은 이 사태를 어이없어 했는데 우리나라 것이고 세계적으로 인지도도 높은 쿵푸가 있는데 왜 태권도를 우리나라 것이라고 하냐고 화낼 정도.
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라는 재앙으로 인해 빠른 교정에 들어가고 있다. '어차피 죽을 거 목소리라도 내고 죽자'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 발생 이후 진실을 요구하는 대륙인들과 고발의 목소리가 VPN을 타고 외부로 나오고 있다. 아예 TIME지에도 "CHINA'S TEST"(시험받는 중국)이라고 나올 정도. 당연히 검열을 통해 차단과 탄압을 하고 있지만 빠져나가는 법에 도가 튼 중국 네티즌들은 계속 한 수 앞을 지나가며 중국 당국을 엿먹이고 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갑골문을 쓰는 사례가 있을 정도. 최근들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나오는 중국 정부의 국수주의적 정책 및 주변국을 향한 문화 참탈, 자국의 문화 규제 역시 최근 들어 급격하게 강해지는 자국민의 중국 정부를 향한 강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즉, 강한 문화 왜곡과 규제, 배외주의 등으로 아예 중국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세뇌를 시켜서 반발을 잠재우려고 한다는 것. 중국 내 포털 사이트 댓글창이나 중국 내부 커뮤니티를 보는 사람들은 대충 알겠지만, 중국 경찰이 24시간 감시하는 곳임에도 중국 정부를 욕하는 글들이 상당히 많이 올라오며 그 비중이 최근들어 크게 늘었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사상통제를 심각하게 하는 나라임에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치달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6. 같이 보기[편집]
- 국수주의
- 중국의 역사왜곡
- 우월의식
- 선민사상
- 사대주의
- 소중화
- 제후
- 중국위협론
- 중국인
- 아Q정전
- 중뽕
- 분청
- 만물중국기원설
- 오족공화
- 바바리안
- 바르바로이
- 오랑캐
-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
- 프로파간다
- 일본 극우사관[51]
- 대동아공영권
- 교만
- 적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