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사상 (문단 편집) === [[내셔널리즘]]과의 비교 ===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와 일견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nationalism'은 [[근대]] [[영국]]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개념이라서, 그 이전부터 존재한 중화사상과는 태생이 다르다. 'nationalism'은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인 '민족'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를 대표하는 정체인 국가를 성립 및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국민 국가는 고유의 언어, 문화 등을 누리며 타 국가와 구분된다. 이 개념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근대 민족주의의 수입 이전에도 중화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화 작업이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유럽에서도 소위 '민족주의'로 지칭되는 'nationalism'이 [[18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nation'의 구성원들이 뚜렷한 독립적 공동체 속의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민 국가의 보통 교육과 같은 것인데, 유럽에서 이것이 태동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전파 이후이며, 그것의 실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중국만이 이러한 'nation'의 개념을 근대 이전부터(그것도 기원을 찾자면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부터''') 갖고 있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근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편이며, '자국 의식'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화(華)'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혈통보다는 '''정신적인 사상, 문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위 [[소중화]]를 표방한 주변국들도 중화사상을 인정하고, 조공 체제와 [[사대]]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상기했듯 그래도 오랑캐로 취급하는 중국인들은 있었지만. 하여튼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중화사상에 반드시 중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동반되었으므로, 화이관(華夷觀) 자체가 개별 국가의 이념을 덮는 보편적인 세계관의 역할을 크게 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 그 자체가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이익을 주면서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처럼 중국에 사대해도 지속적 침략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제국들은 대개 아군에게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중국 문명만의 특수한 평화주의 사상'이라는 해석은 현대 중국의 타민족 지배를 합리화하는 신중화주의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중화 질서에서의 서열도 국력의 영향이 있기는 했지만 딱 국력에 의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한족이 팽창주의적 면모를 보이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며, 사상과 문화의 차이로 흔히 소개되는 팽창 방식과 차이가 있어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 중국 남방 지역, 만주, 대만 등의 사례를 보면 '''제노사이드, 강제 이주 등으로 그 지역에서 타민족의 뿌리를 뽑은 후에서야 이주하는 방법이 한족의 팽창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민족의 문화를 금지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은 근대 식민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를 보면 이는 고대부터 중국에서 널리 통용되던 방식으로 이민족 정복 기록 후에도 이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영토도 딱히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가 이민족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 인간 사냥, 이주 혹은 한족 혈통을 자처한 후에서야 영토와 그 지역에서 한족 인구가 빠르게 팽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촉한 지역, 남방 개척 등이 마치 한 번에 그냥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이나 이민족들의 역사를 교차검증하면 실제로는 위의 대량 학살과 식민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딱히 혈연에 한정된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아니어야 할 [[일본]] 등지에서 오히려 스스로가 중화임을 주장하는 소위 [[소중화]] 사례가 나타난다. 이들이 혈통적, 인적으로 중화를 주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문화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라는 말로는 문화의 파급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에서 중화사상의 외연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는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 이는 타자와의 명확한 구별을 동반한다. 즉 동아시아 세계 자체를 뭉뚱그려 파악하는 중화사상의 기저와는 큰 차이가 있다.]을 가진 공동체의 성립과, 이것의 수호를 동반하지 않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은 그 근저를 특정한 인적 집단에 둔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nation)과 타자와의 명확한 구분, 자기 공동체를 대표할 국가의 건립과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쏟는 반면에, 중화사상은 문화적 역량(그리고 그것을 통한 외부 세계의 '교화')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며, 그로 인해 동아시아 체제와 중국의 정체성을 떼어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이후 중국에 민족주의가 전파됨에 따라,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 간에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겪으면서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절까지의 중화사상이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일종의 [[자뻑]]이었다면, 현재의 중화사상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국민 국가의 구성을 위한 자국 통합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중화사상은 소수민족 통치를 합리화하는 [[하나의 중국]]의 이념적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중화사상은, 19세기 이전의 것과 일정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종합하면 전근대의 중화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