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린 (문단 편집) === [[정유년]], 조선으로 === 1592년에 적에게 패한 일이 참작되어 관직이 회복되어 광동의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했으며, 1593년 2월에 어왜총병관이 되어 마귀, 유정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병사 3천여 명, 전함 수백 척을 나누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해구에 포진시켰다. 어위 도총관 겸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이 되어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였다. [[징비록]]에 의하면 [[류성룡]]을 비롯한 많은 조정의 대신들이 '충무공이 진린의 횡포[* 충무공을 만나기 이전에는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그의 목에 밧줄을 묶고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가서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고, 분명 명나라 군대와 갈등이 생길테니 패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라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말에 즉각 군대를 동원해 고기와 생선 등을 푸짐하게 차리고[* 충무공의 군대는 조정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국빈급 인사임에도 스스로 챙겨야만 했던 것.] 진린뿐 아니라 모든 명군의 장병들까지 배부르고 취하게 하여 인심을 샀고, 섬에 왜구가 왔다는 말에 그들을 격퇴한 후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모두 바쳐 더욱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 왜구의 수급은 돈으로도 보상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일정 이상 되면 노비조차 양반까지 될 수 있으며 장수의 경우 전공의 증거가 되어 승진에 도움이 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괜히 조선인 시체의 수급으로 구라치려다 귀고리 자국 때문에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게 아니다. 평소 충무공이 수급을 얻으려다 적을 놓친다며 수급 얻으려 하는 걸 말렸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바다 전투의 특성상 수급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린의 마음을 사고자 단단히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마냥 꼿꼿하기만 한 꼰대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걸 자기 보신 같은 데는 전혀 안 쓰고 오로지 더 많은 일본군을 죽이고 더 확실한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만 발휘한 괴인이었음을 증명하는 일화다. 이순신의 경우 과거 덕수 이씨 종친이자 무관 인사권을 갖고 있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자신을 보자고 하는데도, 사적으로 만나면 인사 청탁으로 보일 수 있으니 만남을 거부했다는 일화나, 감독관인 서익이 동헌 내 목재를 요구하는데도 규정을 들어 반대했다가 인사 불이익을 당한 일화 등이 있다. 결국, 이순신은 그냥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정통하고 처세술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오직 국가와 공익을 위해서만 쓰고 개인적 이익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하다. 충무공은 역시 단군 이래 다시 없을 진정한 괴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 전에 능력이 뛰어났지만 탐욕을 일삼는 장수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처음에 명 해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해서 그에게서 명 해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가 하면,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시켜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서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을 직접 겪어서인지 처음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던 진린이지만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해나간다.[* 그가 탐욕스러웠단는 평가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상반된 해석이 나오고 있으므로 좀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개인의 능력으로 출세한 인물이라 사람을 평가하는 눈이 더 엄격했을 것이다. 진린은 이순신과 특히 많은 교분을 쌓은 인물로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조선군 장수를 당시 깔보고 무시하던 다른 명군과 달리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 손윗사람을 표현할때 라오예(老爺)라고 한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어르신' 정도로 높여 부른 것이다. 이보다 높은 존칭은 尊,賢이 들어가는 존칭이 많으나, 사실 진린이 이순신보다 2살 많은데 저런 표현했다는 자체가 충분히 높여준 것이며, 진린의 성정과 공적을 보았을 때 그 정도 예를 보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호의라 할 수 있다. ]라는 호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로 진린이 이순신에게 얼마나 존경을 표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건 당시 [[동아시아]] 정치 관계 상 엄청난 일이다. 뭘 해도 [[제국|황제국]]인 [[명나라]]고 [[조선]]은 명시적으로 [[사대주의]], 즉 명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명나라]]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전한 진린이 제후국 [[조선]]의 [[이순신]]한테 '''[[의전]] 선순위를 내준 것'''인데, 진린이 진심으로 이순신한테 감복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에 그치지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조선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 바에, 함께 명국으로 가서 황상을 모시며 부귀를 누려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명군은 조선을 제후국이라 하여 신하들은 물론 왕인 선조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성과 업적이 임진년부터 자자했고, 특히나 조선수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명량 해전|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일구었으니]] 이순신에 대한 명군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경리 양호를 비롯하여, 군문 형개와 같은 고위직은 물론 진린과 같은 일선에서 싸우는 명군 장수들에게도 이순신은 [[선조(조선)|누구와 달리]] 인정을 받았고, 이 점이 더더욱 [[선조(조선)|이 누군가가]] 이순신을 질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현대 기준으로 봐도 외교 결례다. 미해군 [[제7함대]] 사령관이 한국 대통령을 쌩까고 한국군 해군 장성한테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하고 '''Sir'''라고 높여 부르며 시민권 추천과 함께 미해군으로 스카웃하려고 시도한 모양새이니. 선조가 현대의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꼬투리를 잡아서 보직해임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만 안 했을뿐 일국의 국가원수더러 사실상 "좆까"라고 선언한거나 마찬가지였으며, 명나라 본국에서도 진린이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보고하며 칭찬하는 상황이어서 '''아무도 의전관계 막나가는 진린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런 의전관계 결례도 그 상대가 [[이순신]]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용납된것. 또 선조가 명국한테 찍힌 것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선조는 이순신과 한편이었던 진린까지 깎아내리는 옹졸함까지 보였다.] 게다가 조선 수군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하지만 이순신 입장에선 명성을 마구마구 쌓았다가 선조에게 죽을 뻔[*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난세의 영웅이나 구국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걸 극도로 경계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징계나 편애 등을 자주 했다.]한 이후로 오히려 공을 드러내길 꺼리게 됐기에 부담없이 자기 공적을 진린에게 퍼주다시피 넘겨주곤 했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자기 부하들의 공훈은 꼬박꼬박 챙겨줬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이순신은 장계를 올릴 때 아예 진린의 공을 적은 거짓 장계와 실제 공로를 적은 진짜 장계 두 개를 올려서 조정에서도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었고, 나중에 명나라에서 진린이 조선군의 전과를 뺏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 조사를 할 때 진린이 공을 세운 내용의 가짜 장계를 보여주어 넘어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10004_005|#]] 일설에는 선조와 이순신 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알고 이순신은 진린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기에 [[위악자|의도적으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 이순신을 선조의 질투로부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보호하고 자신은 실리를 챙겼다고도 한다. 반면 명나라에는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잘 보고했다고 한다. 이순신도 이런 진린의 의도를 잘 알았던 것 같다. 심지어 진린은 천문을 보고 이순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제갈무후의 고사를 따라 제단을 쌓아 명을 늘려보라고 간곡히 청하기도 했다. 물론 이순신은 자신의 재주와 충심이 무후만 못하니 아니함만 못하다고 주저하였다. 성현에 준하다고 평을 받는 제갈공명에 빗댈 정도이니 이순신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노량 해전]]에서 명군은 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본토로 내쫓는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기에 전투 참여를 주저하였으나, 진린은 드물게 강경파에다가 그간 이순신에게 받은 것이 많았고 개인적인 존경심도 있었기에 왜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면으로 돌격했기에 진린과 부장인 등자룡의 판옥선은 왜선에 포위되었고, 등자룡은 구출되기 전에 일본군이 공격해와 [[백병전]]에 휘말려서 싸우다가 전사한다. 적 왜선에 포위된 진린을 구하다가 이순신은 전사하게 되고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이에 사례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이순신은 전사하고 난 후였다. 이 때 이순신의 죽음을 알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통곡했고, 육군과는 달리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순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하여 고향 아산을 찾아가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