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명주 (문단 편집) ==== [[두산 베어스]] 시절 ==== [[파일:external/dimg.donga.com/6820915.1.jpg]] [[두산 베어스]] 시절. 1998년 10월 23일,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트레이드 상대는 포수왕국 두산에서 좀처럼 자리를 못 잡던 [[최기문]]이었다.[* 최기문은 1995년 11월에 1차 지명으로 OB에 입단하지만 정작 김태형 - 이도형으로 이어지는 포수진 사이에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이후 1997년 1월에 2차 1라운드로 지명을 받은 포수 유망주 [[진갑용]]이 3억 8천만원에 계약하면서 입지는 더 좁아졌고 결국 1군과 2군을 오가면서 부진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산은 1999년 1차 지명으로 경희대 포수 [[홍성흔]]까지 지명하면서 최기문이 설 곳은 아예 없었다.] 트레이드에 대한 떡밥은 이미 던져져 있었는데 당시 롯데의 감독대행[* 1998년 6월에 김용희 감독이 해임되고 투수코치 겸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고 있었다.]에서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김명성(1946)|김명성]]이 팬들과의 간담회에서 전력 보강에 대한 질문을 받자 '투수를 내주고 포수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구상 중이다'고 답변했던 것. 결국 이 구상중인 트레이드가 그대로 성사된 셈. 그리고 이 트레이드 이후 차명주와 최기문 모두 전성기를 맞이하며 윈-윈 트레이드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중간계투]]로 자리잡아 첫 해부터 무려 83경기에 출전하며 중용되었다. [[2000년]]부터 신설된 [[홀드(야구)|홀드]] 부문에서 3년 연속 홀드 1위(2001년 ~ 2003년)[* 홀드 집계 이후 3년 연속 홀드 1위를 기록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차명주 뿐'''이다.]를 기록하며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 시절, 생소하던 [[너클커브]]를 던지던 몇 안 되는 투수기도 하였다.[* 차명주 외에는 [[진필중]], [[마일영]]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실상에는 혹사라는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그가 앞서 서술했던 다한증 때문에 연투가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2이닝씩 먹어줄 수도 있는 투수"라고 칭찬하며 좌타자가 나오면 2경기에 1번 꼴로 차명주를 등판시켰고, 1999년에는 83경기, 2001년에는 84경기에 등판하는 등 엔간한 대타 전문 요원보다도 자주 TV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때 '차대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의미는 짐작하는 대로 언제나 불펜에서 '''항상 대기'''한다고 해서 '차대기'였다. 보직은 그때 그 시절 불펜투수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별히 정해진 보직이 없는 마당쇠였다. 적당한 시점에 나와서 막고 들어가는 [[마당쇠]]와 동시에 좌투였기에 좌타자 저격용 [[원 포인트 릴리프]], [[마무리 투수]]까지 이어주는 [[셋업맨]] 등 [[중간계투]] 보직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봐야한다. 8개 구단 133경기 시절 무려 80경기를 넘게 출장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한 끝에 구위가 떨어져, 두산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거의 원 포인트 릴리프로만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