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참조기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 문헌에는 석수어(石首魚), 석어(石魚), 구을비석수(仇乙非石首)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미 고려 말 [[이색(고려)|이색]]의 시문에 등장하며[* 이색의 유고집 목은고(牧隱藁) 권22. 이색은 지방민에게 말린 조기를 선물받았는데, 이 때도 이미 말린 조기를 먹는 식문화가 퍼져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석수어는 [[영광군]] 서쪽의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때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여기에 모여 그물로 잡는다.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국용(國用)에 쓴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참조기의 주산지에서는 조기어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파시(波市)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D0_B30_040_000_00030|#]] 파시(波市)란 바다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으로 영광 앞바다와 [[연평도]] 부근, 충남 녹도나 군산 [[위도(부안)|위도]]는 조선시대 대규모로 조기파시가 열리는 장소였다. 다만 일반 백성들이나 하층민들에게 널리 보급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추청된다. 이미 일본에서는 조기가 덴푸라 형식이나 회로 섭취하는 등 일상적인 생선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상민들이나 노비들에게 대중화가 안 되었던 것으로 본다.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조기는 공납 진상품, 관리의 주급, 상여금, 혹은 [[성균관]] 유생이나 [[훈련도감]] 관원들의 사기진작용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가장 보편적인 소비방식은 [[굴비|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려먹는 것]]이지만 민간에서는 젓갈이나, 채소를 넣어 국을 끊여먹기도 했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조기를 식용하지 않았는데, 청나라 불법 조업 어선들이 참조기 산지인 [[연평도]]와 [[해주]]를 피해, [[청어]] 산지만 골라 조업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 10년 계유(1873) 5월 17일(갑오)] ~~이 때도 [[중국어선]]의 민폐가....~~ 일본에서는 조기를 작은 크기로 [[덴푸라]]처럼 튀겨먹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일본에 가보면 조기 덴푸라를 맛볼 수 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기, version=55)] [[분류:조기속]][[분류:생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