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근옹주 (문단 편집) == 생애 == 1768년([[영조]] 44) 12월 12일에 [[영조]]는 [[경희궁 회상전#s-4|경희궁 집경당]]에서 직접 8명의 후보자들을 불러 보았다. ||송익무의 아들 송인재, 홍양유의 아들 홍익돈, 조덕해의 아들 조인갑 ---- 재간택 명단 || 영조는 후보 중 3명을 추렸다. 이들 외에 이날 [[부마]] 간택에는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는 자들도 있었다. 조덕해의 아들 조인갑은 [[인원왕후]]의 외가 친척이었고[* 조인갑은 인원왕후의 외삼촌인 조정하의 증손자로 계보는 '조정하-조명욱-조덕해-조인갑'으로 이어진다. ], 조재선의 아들 조양진은 [[효장세자]]의 [[세자빈]]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7촌이었고, 구윤빈의 아들 구수몽은 [[인조]]의 외사촌 능천부원군 구인후의 봉사손 집안이었다.[*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의 아버지이자 능안부원군으로 추증된 구사맹이 능천부원군 구인후의 할아버지다. ] 특히 구수몽에게는 어찌 간택하겠느냐 하면서 다른 좋은 집으로 장가 들라고 말하였다.[* [[http://sjw.history.go.kr/id/SJW-F44120120-02900|승정원일기, 영조 44년 12월 12일.]] ] 이틀 후인 12월 14일 영조는 홍양유의 아들 홍익돈을 [[부마]]로 최종 낙점하였다. 그리고 1772년(영조 48) 청근현주는 15세의 나이로 혼인하였다.[* [[http://sjw.history.go.kr/id/SJW-F48010270-01400|승정원일기, 영조 48년 1월 27일.]] ] 여기서 부마 간택이 이미 끝났는데 실제 혼인이 늦어진 이유는 왕실의 재정 상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764년(영조 40)부터 [[화길옹주]], [[청연군주]], [[청선군주]], [[은언군]], [[은신군]] 등 계속해서 가례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서출들을 안 좋아했지만 다들 제때 시집장가는 보내줬다-- 1778년(정조 2) [[은전군]]이 정유역변[* 정유역변에는 세 가지 사건이 묶여 있는데, 그 중 홍계능과 홍상길 등이 주도하여 은전군 이찬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으나, 청근현주는 사도세자의 혈육이었으므로 1795년(정조 19)의 원행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순조도 청근현주가 아프다는 소식에 의원을 보내줄 정도로 왕실의 종친으로 대우하였다.[* [[http://sjw.history.go.kr/id/SJW-H31020290-01300|승정원일기, 순조 31년 2월 25일.]] ] 1835년(헌종 원년)에 사망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자식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http://sjw.history.go.kr/id/SJW-I01090010-00300|승정원일기, 헌종 1년 9월 1일.]]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