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담사상 (문단 편집) == 개요 == 淸談思想 '''청언'''(淸言) 또는 '''현언'''(玄言)이라고도 한다. '''청담'''(淸談)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화(談話)' 라는 의미이다. 이 사상은 [[위(삼국시대)|조위]], [[서진]], [[동진]]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남조]]의 [[제(육조)|남제]], [[양(육조)|남량]]시대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었으며 [[진(육조)|남진]]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유행한 사상으로 주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현학]]과 함께 나타난 철학적 담론의 풍조로 [[도가|노장사상]]을 기초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정신적인 자유를 중시했다. 사상의 기초는 도가의 무위사상을 뿌리로 하고, 불가의 염세사상 등을 취하여 만들어졌다. 다만 [[전한]] 건국 이후 초기의 무위이치 사상과는 다르다. 도가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은 동일하지만 '''무위이치'''는 춘추전국시대 550여 년 동안의 기나긴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6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아방궁과 진시황릉 건축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 중심의 통치로 나라를 말아먹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다면 큰 일을 벌이기보다는 어지러워진 질서를 바로잡고, 잘 관리해 나라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사상이었다. 반면 청담의 '''무의이치'''는 당대의 해석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말 그대로 [[태업|하는 일이 없어야만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에 가까웠다. 현학으로 인해 탄생한 청담사상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지나치게 추구했고, 후기에 들어서면 현실과 지나치게 유리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심지어 후대에는 이를 두고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 >'''"淸談誤國"'''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한족 왕조의 귀족 지배층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청담의 본질이 왜곡되고, 비틀어지는 바람에 이른바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후한 시대의 유교사상을 능가할 정도의 사회적인 폐해와 허례허식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