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담사상 (문단 편집) === 지속된 이유 === 청담사상은 초기의 사회 비판적 요소를 상실하고 공담으로 변질되자, 당연히 당대에도 많은 비판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청담사상은 별 다른 견재구 없이 거진 3세기 이상 귀족 및 학자층의 꾸준히 유행했었다.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지나면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사회불안정과 부패가 만연했으며, 이런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청담이 꽤나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한 왕조 붕괴 이후 중원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 했고, 이는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거대한 혁명 및 내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청담사상의 현학적 요소는 이러한 사회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자기만의 학문에 끝없이 파고 들게 만드는 효과를 가저왔으며, 결과적으로 남조 왕조들의 정권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교&불교&도교적 요소가 모두 결합되어 당대 귀족들 입장에선 학문적 만족감을 가지기에 매우 적절한 요소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담으로 변질된 청담사상은 귀족 지배층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사실 청담을 유행하게 만든 이런 사회불안정과 부패는 지도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분출점을 망상과 공담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것도 피드백을 받을 수 없는 지도층의 문제로 인해 사회불안정과 부패가 발생하고 그러자 지도층이 청담사상에 빠져들고 그럼 그럼 또 다시 태업의 결과로 부패와 사회 불안정이 가속되는 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사치스러운 현실도피와 허례허식을 권장하는 식의 공담으로 변질된 이런 청담에 의해 이런 식의 부패의 무한루프가 3세기 이상 이어진 결과 한발 더 나아가 그 전까지 재평가 받고 있던 기존 유교 & 도교 & 불교 사상 전반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청담은 동아시아사에서 지나치게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의 대명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