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담사상 (문단 편집) == 후일담 == [[천하통일]]을 달성한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훈고학]]을 다시 관학으로 삼아 [[과거제]]를 정비하고 유학자 공영달을 시켜 [[오경]]의 해석들을 집대성한 유학 참고서 <오경정의>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강력한 해설서는 역으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을 불렀고 결국 학문의 본격적인 발전을 막아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거기에 유불선의 합일을 주장한 위진시대의 현학의 영향이 당나라 유학엔 아직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이래서 당나라 유학은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후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의 [[성균관]]의 경우엔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당은 육조(六朝)의 천박하고 겉만 화려한 기풍을 이어받아 경서로써 인재를 선발하였지만 사실은 시(詩)와 문(文)으로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 열중하였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라고 노골적으로 당나라 유학을 비난한다.[[https://www.skk.or.kr/skin/sub_page.php?page_idx=52|#]]] 당나라 후기부터는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한유]], [[이고(동음이의어)#당나라의 학자|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 다만 한유와 이고의 관점은 달랐는데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순수한 유교를 논했다면, 이고는 불교사상을 채택하여 심성(心性)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였다. 국가 공인의 《오경정의(五經正義)》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선대의 현학자들처럼 [[불교]]나 [[노장]], 선학(禪學) 같은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하였다. 《복성서》는 한유의 《원성(原性)》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논한 것으로 송대(宋代) 정주학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훈고학의 경전 해석이 성현의 마음을 탐구하는데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고 [[공자]], [[자사]], [[맹자]]에 연결되는 유교 종사 계보의 정통론을 만들었다. 이런 이고의 사상은 [[신유학]]의 [[사서삼경]], 역전경주(驛傳競走) 중시와 도통사상 중시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현학의 시대가 끝나고 훈고학적인 관점을 국가가 강제하려고 했어도, 근본적으로 본디 유학이 형이상학을 논하는 학문이 아니다 보니 철학적 토양에 다른 사상을 유합하는 과정이 어쨌든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때문에 한유나 이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신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한유처럼 노장이나 불교를 강경하게 배척하면서도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처럼 불교나 노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공격당하거나, 혹은 정말로 해당사상의 영향을 받는 모습이 나오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신유학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에 영향을 안받았다고 할 수 없는게 사실이기도 하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