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담사상 (문단 편집) === 훈고학 시기 유학의 근본적인 한계 === 유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천하 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의 냉혹한 아귀다툼을 지속하던 시기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상이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천하통일 이후 천하가 안정세에 접어들고, 또 생산량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발달하고 나자 '[[괴력난신]]'과 같은 신비적인 요소를 비롯해 삶의 본질이나 본질적 지혜나 천하의 기본 세계관과 같은 다음 단계의, 결국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 유가를 창시한 공자부터가 괴력난신을 근본부터 배제했기에 이를 담론으로 삼기 어려웠다. 유가에서 괴력난신의 배제를 중요시여기는 이유는 공자가 롤 모델로 삼았던 [[문공(주)|주공 희단]]이 바로 [[상나라]]의 점복이라든가 인신공양같은 것들을 타파하기 위해 원시 유교를 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에서 큰 문제였던 '예'(禮)의 실종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사회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라 하극상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라 차라리 서열을 정해 그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건전한 상황이었다. 공자는 이 예가 실종된 상황을 괴력난신과 비슷하게 보고, 주공 단을 롤모델로 삼아 원래의 건전했던 시절(이른바 요순시대)로 되돌리려고 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당대 유학이 한나라에서 오래 동안 발전할 수 있었지만, 형이상학적이거나 탈현실적인 담론을 다루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 당시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사라진 유교 경전을 복원하는 [[훈고학]]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나라 시기에 주요 사상이었던 유가는 정확한 유학 경전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훈고학'''이었다. 그리고 유학이 본격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건 먼 훗날 남송시대에 이르러 주희를 통해 유불선을 아우르는 [[성리학]]으로 나간 뒤였고, 이 시기 유학은 후대의 유학과 많이 달라서 저런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하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기존의 경전을 수집하고 해석하는데 전력을 쏟는 상황인데, 당시 훈고학이 주류이던 유교에서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올라오는 순간 그냥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결국 당시 유가는 고대의 신화적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도교를 비롯한 많은 사상들과 결합한 형태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려 했지만 역으로 이때문에 [[도교|노장사상]]의 영향력이 민중 사이에 커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당대의 주요 사상인 유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선 법가 다음 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현실적으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채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교조적인 성향을 뛰게 되었다. 그것도 [[변질된 유교적 전통]]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치 사서오경을 종교적 교리나 예언자의 가르침마냥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융통성없이 지키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것임을 주장한 유가의 예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치르다가 병이 들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여 불효를 하게 되는 사례가 생긴다던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하다가 쓰러지자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려고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 불효한 사람이라고 평가가 급전직하하는 것과 같은 사례가 발생했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맹자가 한 말을 인용해보자면 맹자는 남녀가 친히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의이지만 물에 빠진 형수를 건져올리기 위해서 손을 잡아당기는 것은 임기응변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이리나 승냥이와 다를바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니 이 시대는 맹자의 관점에서 이리나 승냥이가 득실거리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후한 말기에는 '''청의'''(淸議)라는 사상이 존재했다. 이 사상은 주로 청류파에서 유행했는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천하의 기둥이라 여기고, 고결한 선비로 자처하면서 같은 부류끼리 모여 조정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을 품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방에 주로 거점을 두어 현지의 민심을 '''향론'''(鄕論)이라는 것으로 취합해서 조정에 전달하며, 동시에 민심을 다독이는 일을 했다. 이런 사상은 [[향거리선제]]에서 인재 추천과 품평을 중시하면서 계속 발전했다. 하지만 중앙정권은 [[당고의 금]] 같은 사건을 일으켜 조정에 끼치는 청류파의 영향을 막았다. 그러자 청류파들은 중앙정부와의 정면 충돌을 자제하고, 각자의 거점인 지방에서 세력을 늘리면서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리는 데 주력했으며, 이 중에서 청류파의 중심 인물인 곽태처럼[* 그래서 곽태에 대해 후세에 쓴 역사서의 기록 중에는 "청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세상 일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라는 비난이 더해졌다. 이 때문에 곽태를 청담사상의 창시자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행적은 개인적인 피난행위에 가까우므로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여겨지기는 어렵다.] 평론을 적당히 하고, 과다한 비난을 하지 않아 당시의 중앙집권세력인 환관들의 미움을 사지 않아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