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우 (문단 편집) ===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1231년은 기나긴 '''[[여몽전쟁]]'''이 시작되는 해였다. 몽골의 제2대 [[오고타이 칸]]은 사신 [[저고여]](착고여)가 국경, 즉 고려의 압록강변에서 피살당한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권황제 잘라이르 [[살리타이]]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도록 했고(제1차 침입), 개경이 포위당하자 위협을 느낀 최우는 재추회의를 열어 강화도 [[천도]]를 논의했다. 이에 조정 신하의 대부분이 반대하자 본보기로 자신의 사병인 [[삼별초]]중 야별초의 지유인 [[김세충]]을 죽이고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했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 때문에 분노한 몽골에서는 1232년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을 파견하여 [[홍복원]]을 대동해서 제2차 침입을 개시했으며, 살리타이가 용인에서 벌어진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에게 사살당한 것을 계기로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최우는 성을 쌓아 몽골군에 대비했고 그 공으로 진양후로 책봉되자 대대적으로 개인 사저를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서북면의 여러 성에 머물러 있는 [[다루가치]]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내시 윤복창이 북계에 있는 다루가치들의 무장을 해제하려다가 다루가치에게 선주에서 사살당했던 것이 그것이다.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또다시 다루가치 제거를 계획했지만 몽골군이 보복할까 두려웠던 백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특히 최우 자신의 개인 재산을 옮기려고 수레 100대를 강제로 빼앗아서 백성들이 분노하게 되었고, 또 서경에서는 민희와 최자온이 다루가치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서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최자온을 가두었고, 최임수 일행은 저도로 도주했다.(《고려사》에서는 암살 계획만 나왔으나, 《동사강목》에서는 모살하다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나왔다. 또 《원사》에서는 72인의 다루가치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드라마 <[[무신(드라마)|무신]]>에서처럼 다루가치들 전체가 죽지는 않았지만 다루가치들의 대부분이 주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자 개경과 충주, 경주 등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회유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회유책을 사용한 충주에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보내어 강경 진압을 단행했다. >[[고종(고려)|짐(朕)]]이 보니 옛부터 이성(異姓)으로 [[후작|후(侯)]]가 된 자는 종실의 예(宗室之例)[* [[천자]]의 가족으로써 제후에 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로 봉해진 것이 아니다. 반드시 운명을 타고나 세상에 걸출함을 보이고 공을 쌓고 덕망이 높아야 책봉되었다. 그렇기에 세상엔 그들이 적은 것이다. > >나라가 있고난 후, 공을 쌓고 덕망이 높은 자가 경(卿)말고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니 짐이 경에게 모토(茅土)[* 봉국, 봉지를 달리 부르는 말.]를 분봉해주고 싶어 소봉의 명(疏封之命)을 내렸으나 경이 겸양하여 명령을 돌려 보냈도다. > >일국의 모두에게 내가 책봉을 하지 않으려 하는게 아니라 경이 거부했다는 것을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짐의 뜻을 알려 백성을 안정시킬 수 없으니 모두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 >경은 심지어 여일인(予一人)[* 서주 [[문왕(주)|문왕]] 희창의 자칭으로 짐(朕)과 같이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칭이다.]을 옹립해 정책을 정하고 보좌의 책임을 다하니 짐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공로이다. > >[[원나라|짐승의 풍습을 가진 자들]]이 찾아왔을 때 적을 알고 제도를 바꾸니 지기가 마치 신(神)과 같도다. 민(民)을 통솔해 천도[* [[고려궁지|강도(江都)]]로 천도한 것을 이른다.]하여 사직을 완전히 보존하여 반역이 일어나도 조강(朝綱)[* 조정의 기강, 나라의 기강.]을 부활시키니 이는 [[삼한]]의 공로(三韓之功)다. > >[[천하]]가 모두 미워하는 자는 달단통군(達旦統軍) [[살리타이]](撒里打)이다. 경의 기묘한 계산으로 화살 한 발로 죽여버리니[* 최우가 죽인 것이 아니다. 최우의 기분에 맞춰주기 위해 한 말이다.] 만국(萬國)이 다같이 기뻐했도다. 아(噫)! 짐에게도, 삼한에게도, 천하에게도 이런 기묘하고 위대하고 비범한 공렬은 고금에도 구할 수 없다. 내가 만일 경의 겸양의 뜻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삼한 뿐 아니라 천하가 짐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 >이미 원대한 이치에 따라 [[최충헌|아버지]]의 작위[* 진강공으로 진주(진강)의 공작이다.]를 세습하라 했는데도 겸양하니 착하도다. 스스로 공을 세워 당당히 자신의 힘으로 받는 것이 세상에 없는 덕이로다. 세습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으로 받는다면 전례와 같고 천년의 미담(千載美談)이 될 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고려는 공식적으론 작위와 봉지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종은 최우에게 최충헌의 진강공 작위를 이으라고 했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라 최우가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습이 아닌 자신의 공로로 작위를 받는다고 운운한 것이다.] > >좋은 때를 놓치면 안되니 중외의 마음(中外之心)을 보낸다. 지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 2품 문산계 품계.] 수태위(守太尉)[* 수직. 태위는 삼공 중 최고위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차관.] 공부상서(工部尙書)[* [[상서성]] 공부의 장관.] 최종준(崔宗峻)을 봉책사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 3품 문산계 품계.] 지[[중추원|추밀원]]사(知樞密院事) 병부상서(兵部尙書)[* [[상서성]] 병부의 장관.] 상장군(上將軍)[* 고려 무관직 중 최고위 직위. 정 3품이다. 고려 문관직 중 최고위 직위인 [[문하시중]]은 종 1품이니 고려의 무신 차별이 보인다.] 김숙용(金叔龍)을 봉책부사로 지절과 예의를 갖추어 보내니, '''널(爾) 진양후(晉陽侯)로 책봉한다.'''[* 고려는 공식적으론 작위와 봉지 세습을 금지했지만 동일한 지역을 다른 지역명으로 봉하는 편법을 써서 작위 세습을 하였다. 진강, 진양은 모두 [[진주]]의 다른 명칭이다.] > >경의 덕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글을 보내니 가문의 보배에 화려함을 더하라. 관료를 배정해 연꽃과도 같은 부(府)[* 제후에게 설치해주는 관저. 고려는 부명을 제후의 봉지에 따왔기에 최우의 부명은 진양부(晉陽府)이다.]를 크게 설치해 제후의 집을 연이어 빛나게 해라. 겸하여 별록에 기록하여 보낸 하사품을 받도록 하라. >---- > - 《[[동국이상국집]]》 제33권 中. 최우를 진양후로 봉하는 고종의 칙서(勅)이다. [[이규보]]가 칙령을 받들어 썼다. 1234년에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공으로 후에 봉하지만 칙서에 맞을 예물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으며, 여러 주군에서 다투어 선물을 보내자 진양후에 봉해졌다. 1월에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관아 및 공공건물을 건축하여 왕도의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사병인 도방과 국가 상비군 4,000명을 동원하여 자신의 사택을 지었다. 또한 2,000명을 동원하여 [[고려궁지|고종이 거처할 궁궐]]을 지으면서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서산시|서산]]에서 백성들을 징발했다. 후작이 된 뒤, 가지게 된 관저는 진양부인데, 자신의 관저가 완성된 이후에도 여러 기화요초들을 옮겨와 심었으며 운반하는 섬의 주민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죽을 때까지 틈틈이 자신의 사저를 조영하여 확장 공사를 했다. 1235년에 교위인 조보수가 고종형인 대장군 송백공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자 송백공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이고 조보수를 낭장으로 삼았다. 진양이 최우의 식읍이 되었기 때문에 고종이 창별감 왕중선의 벼슬을 박탈하려고 하자 왕중선을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대사성 송국첨, 간의 홍균 등을 보내서 안남의 지세를 살피고 개천을 파서 바다에 통하려고 하다가 불가능하므로 중지했으며, 울릉도에 백성들을 옮겼다. 이때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을 몽골이 추궁하자 최우는 이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자 1235년부터 [[탕우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3차 침입을 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공격했다. 1238년에 영녕공 왕준을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하게 되었으나, 이후에 최우는 전횡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몽골군의 침공이 없었던 1243년에는 [[국자감]]을 수축하고 쌀 300곡을 양현고에 시주로 바쳤으며, 또한 장학에 힘쓰면서 사재를 털어 《[[재조대장경]]》을 완성하게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고 성대한 잔치나 연회만 계속 벌였다. 1244년에 낭장 신착을 안찰사로 삼았는데, 정신 이선이 이를 탄핵하자 이선을 연주부사로 강등시켰으며, 대경 임경순의 아들인 임환이 글씨를 잘 쓰자 아들로 삼고, 성을 '최'로 고쳐서 장군에 제수했다. 사사로이 짠 노란 비단으로 강안전 후벽의 장지문을 장식하면서 임환에게 <무일편>을 쓰게 했으며, 고종으로부터 매우 많은 상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