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우 (문단 편집) === 말년 === [[1245년]] [[4월 8일]]에 [[연등회]]를 벌이면서 5월에는 종실과 사공 이상의 관원들에게 대접하는 잔치를 벌여 음악을 담당하는 관아인 팔방상에게 백금을 3근씩 주었으며, 음악 관원들과 중서, 추밀원의 기생, 재주꾼 등에게 금백을 주었다고 한다. 1246년에는 고종과 3품 이상의 관원들을 대접하는 잔치를 벌였으며, 또 일찍이 여러 관원과 여러 장군들을 대접했다가 음악 관원들에게 음악을 하도록 지시했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이를 중지했다. 1247년 제3대 [[귀위크 칸]]의 명령으로 [[아무칸]]이 이끄는 몽골군 선발대가 [[홍복원]]을 대동하여 제4차 침입을 단행했는데 황해도 연안의 염주란 곳에 주둔하여 강화도에 있는 고려군을 위협하면서 동주, 춘주, 양근, 양주 등을 공격했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면전을 피하고 몽골군을 물러가게 하려고 했는데 고려의 사신이 파견된 이후인 1248년 3월에 몽골에서 [[귀위크 칸]]이 병사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최우는 일찍이 적자가 없었고 폐출된 [[기생]]인 창기 출신 [[서련방]](瑞連房)을 통해 [[얼자]](천출)인 만종과 만전을 낳았다. 원래는 사위인 [[김약선]][* 최우의 외손녀인 [[순경태후|정순왕후]]의 아버지가 이 사람이다.]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해두고는 두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전라도]] 송광사에 보내 머리를 깎게 하고(삭발 출가) 만종을 단속사, 만전을 쌍봉사에 거주하게 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무뢰승을 모아 문도로 삼으면서 [[재물]] 불리기에만 일삼아 [[경상도]]의 쌀을 함부로 징수했으며 그들의 문도들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자 보다 못한 형부상서 [[박훤]]이 이를 고하였고,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이를 글로 올렸다. 이에 최우는 박훤의 조언에 따라 만종, 만전을 소환하여 순문 안찰사를 시키고 그 문도들을 모두 가두도록 하면서 어사 [[오찬]], 행수 [[주영규]] 등을 쌍봉사, 단속사에 보내 전곡을 내서 그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하지만 만종과 만전은 [[개성시|개경]]으로 와서 누이인 [[송서]]의 처와 함께 아버지인 최우에게 자신들을 핍박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호소하자 이를 후회하면서 박훤이 부자를 이간한다는 죄목으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고, 송국첨을 [[경주시|동경]] 부유수로 강등시켰으며, 만전을 환속시키면서 이름을 '[[최항]]'이라 고쳤다. 그런데 김약선의 처인 최우의 딸이 종과 [[간통]]을 하다가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버지 최우에게 무고하였고, 딸의 말을 믿은 최우는 사위 김약선을 제거하고 최항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러면 김약선이 억울한 것 같지만 김약선의 행실도 만만치 않았다(...). 항목 참조. 이후 최우는 무고라는 것을 안 뒤 김약선을 복권시키고 딸과 간통한 종은 죽인 후, 딸은 다시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만종은 그 후에도 계속 중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249년 11월에 병사하여 최우는 [[강종(고려)|강종]](제22대)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아들인 [[최항]]이 뒤를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