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우 (문단 편집) == 기타 == * 아버지가 '은문상국'(恩門相國)이었던 것처럼 본인은 '청하상국'(淸河相國)이라는 상국명으로 불렸다. * 생전에 진주의 공작 최충헌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진주의 후작으로 봉해졌다.[* [[최항]]은 생전에는 우봉군 개국공이었다가 사후에 최충헌과 최이(최우)처럼 진주를 분봉받았다.] 사후에는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3부자가 모두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최충헌]]은 '경성'(景成), 최우 본인은 '광렬'(匡烈), 아들 [[최항]]은 '광정'(光正)이었다. [[최이]](최우)는 아버지도 못한 배향공신이 되는 명예까지 차지했으며, [[강종(고려)|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지만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그의 존재도 [[흑역사]]로 처리되어 태묘에서 신위가 빠졌다. * 글을 매우 잘 썼다고 하는데 [[이규보]][* 이규보 자체가 최충헌, 최우 부자에게 총애를 받은 어용 문인인지라 걸러볼 필요가 있다.]의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신라]]의 [[김생]], 고려의 [[유신#s-2.1]], [[탄연]]과 함께 '''신품 4현'''(神品四賢)으로 꼽혔다고 한다. * 집권 초기의 최우는 [[선불교]]에 매료되어, 수선사의 [[혜심]]을 몸소 찾아가거나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간화선]]을 지도받았다. 강화 천도 이후인 1234년 혜심의 입적 이후로 최우는 더욱 타락했으며, 제조대장경을 완성하는 등의 물질적인 불사는 했지만 초발심은 잃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 [[일제강점기]] 중기에 도굴꾼 야마모토에게 최이의 [[무덤]]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도굴된 [[고려청자]]는 수집가 스즈키 다케오에게 당시 기와집 1채 값이던 돈 1,000원[* 1930년대 중반 금 1돈의 값이 8원~10원이었고 가죽구두가 5원이었다. 금은 현재 1돈에 15만원~20만원, 가죽구두는 10만~20만원 정도이니 당시 1,000원은 현재 2,000만원 정도라 보면 될 것이다.]에 팔렸다. 이후 [[대구광역시|대구]]의 치과의사 [[신창재]]에게 4,000원에 팔렸고 자금 압박을 받은 신창재는 [[서울특별시|서울]]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를 찾아가서 6,000원에 팔았다. 감탄을 연발하며 바라보던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실제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이것을 빙빙 돌리면 1,000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천학매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에다 사이이치로가 엄청난 [[유물]]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은 [[조선총독부]]는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10,000원을 주겠으니 팔라고 했는데 거절한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후환이 두려워 얼른 팔아치우기 위해 수집가들에게 연판을 돌렸다. 이 소식을 들은 1935년 봄 '''간송 [[전형필]]'''은 당시 기와집 20채 값이던 20,000원에 사들인다고 했으나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형필은 한 푼도 깎지 않고 이것을 사들였고, [[오사카]]에 있던 대소장가 무라카미가 이 소문을 듣고 현해탄을 건너 찾아왔다. 나이가 50세가 넘은 일본인 무라카미는 30세의 조선인 전형필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줄테니 팔라고 청했다. 이에 전형필은 이것보다 더 좋은 청자를 준다면 시세대로 주고, 동시에 20,000원에 그대로 팔겠다고 하니 무라카미는 이것보다 좋은 청자는 찾을 수가 없다며 웃으며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68호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이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도 최이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했지만 잘못된 정보이다. 주전자는 아들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