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강대엽 (문단 편집) === [[백인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白仁天.jpg|width=100%]]}}} ||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장훈과 달리 [[백인천]]은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진출하였고 꽤나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는 점에서 종종 논란의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알려진 장훈과는 달리 백인천의 일본 프로야구 시절 활약상은 상대적으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장훈 정도의 활약은 아니었기에 장훈이 반영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백인천도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상황이다. 일단 비교 대상이 장훈인데다가, 현 시대의 팬덤에서 장훈은 그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백인천은 롯데를 망친 원흉으로 찍혀 야구 팬덤의 반감으로 아예 평가 대상에서 제외하는 분위기다. 여러모로 저평가 되고 있으나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지금 KBO와 MLB 격차 이상이었다. 1980년대 일본에서 1군과 2군 경계를 전전하던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에서는 최소 주전을 차지하거나 타이틀 홀더를 차지했었고, 1990년대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한국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변화구에 고전했고 리그 최정상급 투수인 [[선동열]]마저 일본 진출 첫 해는 큰 고생을 했다. 1980~1990년대에도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이렇게 컸는데, 1960~1970년대에 15시즌 이상 1군 레귤러로 활약한데다가 타격왕도 한 차례 차지하였고 통산 2000안타에 육박하는 백인천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그지 없다. 2000년대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이나 [[이대호]]에 비하면 단순 성적만을 놓고 보면 비율 스탯에서 다소 뒤지기는 하나, 1960년대 일본에 진출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보다 높게 평가할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선수 말년의 사생활 문제, 감독 말년의 태업, 해설자 시절의 언행 때문에 비호감도가 높은데다가 선수로서의 평가도 1982 시즌의 4할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도 겨우 80경기 체제에 감독으로 스탯 관리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선수 시절에 대한 평가다보니 위의 논쟁에서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도 평가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쏠린 측면이 있는게 30대 초반이면 은퇴하던 당시에 백인천은 한국 나이 41세로 KBO리그에 복귀해서 풀시즌을 치뤘다. 4할 타율만 너무 부각되다 보니 기본적인 클래식 스탯도 경시되는데 그 해 타율, 최다안타, 득점, 장타율, 출루율 부분에서 1위를 했고 홈런과 타점도 2위에 해당하기에 스탯 관리는 어불성설이다. 선수로 자주 출장했기에 감독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더 타당하다 싶을 정도다. 백인천의 경우는 분명히 이 논쟁에 대상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KBO에서의 짧은 활약도 상당히 저평가 되는데다가 일본 시절의 업적은 장훈에 밀리기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게 현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