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혜왕 (문단 편집) == 생애 == [[세자]] 시절, 절 지붕 위의 새를 잡기 위해 [[절(불교)|불교 사찰]]에 [[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숭유억불]]을 행하던 조선에서조차도 절의 기물을 파손하거나 스님들에게 막말한 정도였지 절 자체를 방화를 한 [[선비]]들은 막장행동으로 취급받고 손가락질 받았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왕릉을 관리하거나 명복을 빌어준다는 명목으로 왕실과 직접적으로 비호받는 절들도 있어 이런 절들은 유생들이 얼씬을 못했다.]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고,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 라고 욕을 들을 정도였으나 아버지 앞에서조차 매우 삐딱하게 굴며, 말로만 고친다 거짓말하고 실제로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군|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민]]식 인사인 '호례'(胡禮)[* 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말을 한 다음 모은 손을 유지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앉고, 팔꿈치를 들어올리며 허리를 낮춰 절하는 유목민식 인사법이다. 부족에 따라서는 이때 들어올린 양쪽 팔로 상대방의 무릎을 감싸안아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조오례의]]》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를 행하는 아들에게 >"네 아비[* 충숙왕 본인을 가리킨다. 충숙왕은 '''역대 고려 국왕들 중 고려인의 피가 가장 적은 왕'''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이 뚜렷했던 것 같다.]와 [[공원왕후 홍씨|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째서 내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 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한다. 1330년 7월 무자일, 낭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원 조정에서 전 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장백상의 건의에 근거해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고 보고했다. 이에 충혜왕은 즉각 원나라 태사 우승상 킵차크 [[엘테무르]](연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장백상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말고, 황제의 의사를 잘 인도하여 고려가 스스로 풍속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유업을 편안히 계승하게 해달라" 고 청원했다. 이에 엘테무르가 원 [[문종(원)|문종]](제8대) 투그테무르 칸에게 상주해 고려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고 하는데 이는 충혜왕이 즉위한 이후, 최초로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3><:> 재위 원년(1331) || 정월 ||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2월 ||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 ||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3월 ||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4월 ||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br]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 ||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 || 6월 ||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 || 7월 ||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 8월 ||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2><:> 10월 ||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2><:> 재위 2년(1332) || 정월 ||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 송명리(宋明理)[br] 등을 데리고 평복 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잠행]]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놀러 나간 거다.] || || 2월 ||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이다.[*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전부이다.]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면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 및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국왕의 사냥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전문 사냥꾼,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 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65750&cid=58106&categoryId=58111|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 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고, 나가 놀기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한 것이라곤 1331년 4월 경인일에 쌍성, 여진, 요양, 심양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경인 5도의 고려 백성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원나라에 보낸 것이었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다.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 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5월 병인일(1339. 5. 8),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1339. 5. 12),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강간|정을 통했다]]. >5월(1339. 5. 13)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1339. 8. 8),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강간|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1341. 3. 1),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복위 2년 11월(1341. 11. 16)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했다. >복위 2년 11월(1341. 11. 25)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간했다. >복위 4년 3월(1343. 3. 13)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 처의 아우 김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지 웃기는 사실은 제멋대로 무수한 여자들을 강간, 간음했으면서도 본인 귀에 강간 사건이 보고되면 당사자를 무참히 죽여버리거나 귀양보냈다는 것이다. 만호 전찬이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자 형장을 쳐서 귀양을 보냈으며, 불량배 봉골 등 3명이 임금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주부 공보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처를 간음하자 행성에서 잡아 죽였다. 또한 복위 4년 10월, 강간범 3명을 잡아 돌로 눌러 죽였다. 하지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백성들은 그리 동조하지 않았는지, 오죽하면 현도효라는 자가 독약으로 충혜왕을 시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1341. 윤5. 18). 또 한 번은 신하 최원이 "진사 우물골이란 곳에 예쁜 처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충혜왕이 최원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처녀를 찾았더니, 주인집 노파가 "저의 집에는 본래부터 처녀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파가 숨기는 줄 의심하였고, 동시에 최원이 자신을 속였는가도 의심하여 둘 다 죽였다.] 특히 충혜왕은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전부"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는데,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할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들을 겁탈했다. 충혜왕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수비 권씨(壽妃權氏)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 충숙왕은 [[복국장공주]] 사후 [[조국장공주]]와 혼인했는데 조국장공주도 요절했고, 이후 혼인한 사람이 경화공주다.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는 정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혼인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경화공주는 두 번째 계비에 해당한다.]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1339년 8월 8일, 경화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경화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나라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강간|범했다]]. 이후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이때 충혜왕이 연안군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1339년 8월 24일 조적 등 심왕 [[왕고(고려)|왕고]]의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충혜왕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조적의 난''')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켰다.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었고, 1339년 11월 12일,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했다. 충혜왕은 자신의 책봉을 허락한다는 희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원나라 사신들에게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당하는 꼴을 당한 것이다. 끌려간 충혜왕은 투옥되었지만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한 후 1340년 3월, 대부(大夫)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 탈탈)가 원 혜종에게 상주한 덕분에 석방되었다. 충혜왕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http://cafe.naver.com/booheong/64308|#]] 이처럼 흉악무도한 충혜왕에게도 [[담당 일진|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는데, 원나라 사신 실덕이라는 자였다. 충혜왕이 한창 새 궁궐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에 몸소 담장에 올라가서 공사를 감독했고,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는데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받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시달렸고, [[소인배]]들이 이 때를 틈타 치부에 열을 올렸으며, 충직한 인사들은 배척당해 한 번만 바른 말을 하면 살육을 당하기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1343년 7월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은 길거리에 나부끼던 방문에 >"[[나무]]와 [[돌]]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베]]를 징수하거나 [[섬]]으로 [[귀양]]을 보낸다." 고 씌어진 것을 보고 대노하였다. 충혜왕이 [[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을 보고, 실덕은 곧 귀국해 원 혜종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혜종에게 보고하지 말 것을 간청했는데, 일국의 왕이 타국의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해 선처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최고를 달리던 [[기철]]이 원 혜종에게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고용보는 [[조일신]]의 난 때 도망친 후 숨어 살다가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유는 충혜왕 폐위에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기철 역시 공민왕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1356년에 일어난 [[병신정변]]때 피살당했으며, 자기 측근들과 [[행주 기씨]] 일가까지도 한꺼번에 거의 전부 죽임을 당했다.] 이 둘이 [[한국사]]에서 1, 2위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막장 인성을 가진 폭군은 간신이 아무리 아부한다해도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숙청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는 빨랐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했다. 그러자 화가 난 원나라 사신단의 도치(타적), 베시게(별실가), 나이주(내주) 등이 고용보로 하여금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것이라 보자마자 사신들은 충혜왕에게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했으며, 사신단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라는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압송을 저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태양력|양력]])이었다('''정동행성 사변'''). [[http://db.history.go.kr/KOREA/document.do?recordId=kr_036_0090_0100_0030|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고, 그를 증오한 원나라 사신들이 시종을 드는 사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충혜왕은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관리]]에게[*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 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도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 국왕들은 태조 [[칭기즈 칸]]의 방계 [[혈족]]으로서 원나라의 황족에도 해당했다. 몽골인들에게 '''알탄 우룩''', 즉 [[황금씨족]]이 가지는 권위와 의미를 생각하면 도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관리가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 고 일러바치자 도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게 신하의 도리냐?" 라며 쇠자로 초주검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원나라 [[혜종(원)|혜종(순제)]]은 압송된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황제와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웃긴 사실은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혜종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원나라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 암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충혜왕과는 달리 감안할 부분이 있다면 어렸을 적부터 온갖 고생을 했다는 것이 있지만 실권을 잡은 이후에도 주색 잡기에만 열중했으니 실드 여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성은 혜종이 충혜왕보다는 나은데 둘다 암군이었어도 폭군인 충혜왕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제26대)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두 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것이었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어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것이었기 때문에 빨리 죽어 줄수록 고려와 원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 현 [[중국]] [[광둥성]] 지에양시, 원나라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왕은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게양에 못 이르러 악양현에서 훙서하였다(죽었다). 어떤 사람은 [[짐새|짐독(鴆毒)]]에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되살아나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이전에 궁중과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아야마고지나 이제 가고 나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악양망고지난(악양에서 죽는 신세)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나."로 뜻을 풀이했다. >----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나마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永陵)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충혜왕에게 겁탈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서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제29대)과 [[충정왕]](제30대)으로 즉위했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네토라레|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위구르|회회(回回)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 악행을 열거하는 내용 중에 왜 뜬금없이 소고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고기 먹자고 소를 도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시대만 봐도 답이 나온다.]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