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혜왕 (문단 편집) == 평가 ==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협객|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한고제|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연산군|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인과응보|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충혜왕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제25대)이나 아버지 [[충숙왕]](제27대)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왕인 [[우왕]](제32대)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 [[이인임]] 등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 유명한 시조인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