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혜왕 (문단 편집) == 가계도 == * 제1비 [[덕녕공주]] * 1남 [[충목왕|충목왕 왕흔]](1337년 ~ 1348년) (재위 1344년 ~ 1348년) * 1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원나라]] 노왕에게 시집갔는데, [[덕녕공주]]에게 돈을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 장녕공주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고려에서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왕과 결혼한 뒤 돈을 줬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 북벌군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이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 명 태조 주원장은 위협이 안 되는 적국 군주의 자제들에게는 관대했다. 심지어는 [[소종(원)|북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칸의 장남이었던 마이딜리발라(매적리팔라)를 살려놓은 걸로도 모자라 숭례후에 봉해 집을 하사하는가 하면 끝내 소종에게 돌려보내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함께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비 [[희비]] 윤씨 * 2남 [[충정왕|충정왕 왕저]] (1337년 ~ 1352년) (재위 1349년 ~ 1352년) *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미녀에다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종실 [[단양부원대군|단양대군]]의 여종이었다. 상인의 딸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은 정력제인 열약을 즐겨 먹어 여러 비빈들이 성생활을 못 견디거나 병에 걸리기도 했는데 임씨만이 능히 감당하여 그의 총애를 받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 3남 왕석기(王釋器, ? ~ 1375년):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형 [[충정왕]](제30대)이 즉위한 후에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절(불교)|절]]을 떠돌았다. 나중에 숙부인 [[공민왕]]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하지만 다시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에 왕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 후궁 화비 홍씨(和妃 氏洪, 생물년도 미상): 경상도 진변사인 홍탁의 딸. 충혜왕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식으로 궁궐로 불러들이지도 않은 채 후궁으로 삼았다. 위의 은천옹주는 원래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홍씨가 화비로 책봉된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충혜왕이 은천옹주로 책봉해줬다. 그런데 충혜왕은 화비 홍씨에게 금세 흥미를 잃어서 궁 밖에 방치해 둔 채 자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사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충혜왕의 '경비'(慶妃)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