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타리파 (문단 편집) === 발생 === [[파일:Spread_of_Paulicanism.png]] 카타리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유럽에 퍼져 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081년 [[쾰른]]이다. 이 무렵 독일 지역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112년에서 1120년에 걸쳐서 카타리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타리파는 강한 반카톨릭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11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번째 처형이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도 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특히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으며 12세기 후반에는 남프랑스를 장악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세가 커졌다. 결국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도록 호소하였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카타리파가 주로 남프랑스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남프랑스 지역의 영주들의 직간접적인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가 퍼져나갈 당시 남프랑스는 분할상속의 원칙 때문에 수많은 군소영주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청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남프랑스의 영주들이 갖고 있던 세금 징수권의 일부를 자신들이 차지해 버렸다. 이에 대해 영주들은 당연히 큰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다들 세력이 약한데다 이들을 단결시킬 구심점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던 교황청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반카톨릭 성향을 갖고 있는 카타리파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파문이 두려워서 섣불리 카타리파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에서 카타리파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관하거나 은밀히 돕는 방식으로 카타리파의 세력확산에 기여했다. 남프랑스 여러 곳에서 카파리파 교회와 모임이 만들어졌다. 특히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유명했는데, 그는 카타리파가 아니라 정통 가톨릭 신자였지만 카타리파를 보호했으며 교황청의 원복 시도에 일절 협조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알비파 '문제'의 난해함은 신학적 이단 문제와 정치적 적대감 사이의 구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카타리파를 소탕하기 위해 후술하는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자 레몽 6세와 그의 아들 레몽 7세는 반 십자군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100년대부터 교황청의 주도 하에 성직자와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남프랑스에 들어가서 이들의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을 [[가톨릭]]에 복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영주들의 비협조 때문에 이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교황청은 카타리파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카타리파 처리문제는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