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탁명환 (문단 편집) == 비판 ==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밝히는 데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논란점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현대종교를 후원하는 교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으며,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일례로 조선일보 1978년 9월 10일, 서울신문 1978년 9월 11일자 등 국내 6대 일간지에 [[통일교]]에 대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809110032920604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9-11&officeId=00032&pageNo=6&printNo=10138&publishType=00020|사과문]]을 기재했으며 한때 [[형제복지원]]을 옹호하는 실수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몇 차례 소송에서 패하기도 한다. 또한 없는 증거를 조작하여 만들어서 공격하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대성교회 박윤식 목사가 다른 신도 3명과 찍은 사진을 오려서 한 여성 신도와 박윤식 목사가 단둘이 찍은 사진으로 편집을하여 현대종교 83년 5월호에 "젊은 여인과의 다정한 한 때"라는 설명으로 실었다가 발각되어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여자 관계가 문란하여 비판을 받기도했다. 1990년 12월 탁씨와 김모 여인이 함께 찍힌 사진과 함께 탁씨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투서가 전국 교회에 배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탁씨는 이단의 모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익명의 제보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1991년 2월에 김모여인과의 사진, 통화 내용이 도청된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교계에 유포하였다. 만약 더 거짓말을 한다면 더 수위가 높은 증거자료를 배포하겠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이것 때문에 탁씨는 "전화 도청 없는 세상에 살고싶다"는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4040020921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04-04&officeId=00020&pageNo=17&printNo=21434&publishType=00020 | 동아일보 1991.4.4]] 결국 탁씨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출석하던 새문안교회를 더이상 다니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탁씨를 살해한 임홍천도 범행 전날 탁씨를 미행하면서 탁씨가 30대 여자를 차에 태우고 중화3동 고수부지 외진 곳 둑밑에서 껴안고 애무하는 것을 보고 살해의사를 굳혔다고 진술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32800289118009&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3-28&officeId=00028&pageNo=18&printNo=1853&publishType=00010|1994.3.28 한겨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