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봉 (문단 편집) === 태봉국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와 신라를 이어주는 국가인가? === 그렇다면 신라를 계승한 국가로서 한반도의 왕조들 사이에서 고려와 신라 사이의 징검다리로서의 의미라도 있는가? 태봉은 신라를 기계적으로 계승한 단순한 신라의 일부였고 고려는 태봉의 연장선에 있으니 고려는 그저 고구려의 이름만 빌린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태봉의 인적, 문화적 토대는 상당수가 [[신라]](정확히는 [[통일신라]])에서 왔으나 태봉 건국 자체가 처음에는 기존 신라 체제 자체를 부정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인데다가 명백히 신라로부터 떨어진 별도의 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궁예를 지지한 초기 호족 [[박지윤(고려)|박지윤]]의 아버지 박직윤의 경우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하대에 스스로를 대모달읍장[* 대모달은 고구려의 고위무관직이었다.]이라고 일컫고 있다. 하나의 사례로 일반화는 어렵지만, 초기 궁예를 지지한 호족 세력은 고구려계이고, 남북국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는 상태로 살아왔으며,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서는 반독립 상태로 고구려 계승 나아가서는 부흥을 원했다고 볼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게다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고 되어 있으나 궁예는 한번도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으며, 심지어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기 직전인 905년부터 신라를 '멸도(滅都)'[* 멸도라는 표현은 '''이미''' 망해서 없는 '''동네'''라는 뜻이다. 궁예는 신라를 나라 취급도 안 했다.]라고 부르게 시켰다. 덤으로 일찍이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신라왕의 [[어진]]을 칼로 찌르는 등의 행동을 했으며, 멸도라고 부른 이후로는 신라에서 투항한 인사들을 죽였다.[* 모두 삼국사기 기록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출생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다'라고 추정하였다. 부석사 사건에 대해서는 깨알같이 '그 칼자국이 지금(=250년이 지난 당대의 고려 시대)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라가 태봉이 망한 뒤에야 망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신라는 [[9주 5소경]]에서도 옛 삼국의 영토를 각각 3주로 나누어 다스렸듯이 삼국을 완벽하게 동화시키지 못했다. 조상 대대로 신라인일 개연성이 농후한 오늘날 경북 문경[* 신라 내지(內地) 출신이라고 한들 신라계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례로 670년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김품일]] 등을 필두로 한 신라의 백전노장들이 [[웅진도독부]]의 크고 작은 성읍(城邑) 82개를 순식간에 점령한 뒤 해당 지역의 백제인들을 내지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출신 신라 군인 견훤이 백제 의자왕의 복수를 내세우고,[* 물론 이때는 상류층인 6두품도 이반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견훤은 신라 사회의 중상류층이긴 했다. 신라 왕실이 직할하는 추풍령 일대 호족 자제였던데다 신라군 군관 출신이기도 했던지라, 신라 왕실이 그 이유로 견훤을 반역자로 여겨 더욱 미워했을 개연성은 상당하다.] 역시 신라 왕자라는 궁예가 고구려 계승을 선언했을 때 토착민에게 지지 받았음 자체가 여전히 고구려인, 백제인이란 분립적 국계 인식이 남아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신라가 옛 고구려의 제2수도권인 [[패서]] 일대를 흡수하는 시기가 늦었고, 흡수했어도 상당한 자치가 허용되었으며, 또한 그 지역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 당시 영주에서 탈주하던 고구려 유민들이 탈주 중 방향을 틀어 합류했던 상황 등은 이 대목에서 특기할 양상이다.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어 버렸고[* 단,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명문씨족 가운데 하나였던 우라나라 씨는 완안씨(完顔氏) 황실에 뿌리를 둔 금나라 귀족 가문으로서 백호씨족(白號氏族)으로 이름난 부족이었다. 이는 비단 우라나라(烏拉那拉) 씨뿐만이 아니라 예허나라(葉赫那拉), 하다나라(哈達那拉), 호이파나라(輝發那拉), 수완나라(蘇完那拉) 씨도 마찬가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로 [[평양성]]과 [[패서]] 일대를 기반으로 하던 귀족 가문인 [[개성 왕씨|왕씨]](王氏) 일족이 [[고구려/왕사|고구려 왕가]]를 대체해 [[고려]]를 건국하고 구성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상기한 해서여진의 나라씨족의 경우 완안씨 황가에 대한 참칭 의혹이 있다. [[https://blog.naver.com/gil092003/221591239973|#]] 또한 해서여진은 원래부터도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강했고 혈연적으로도 원래 여진족의 근본 있는 혈통이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과는 별개로 당시 유목세계에서 위상이 장난 아니었던 몽골과의 혼혈이기도 했기 때문에 타 여진족을 얕보고 있었다.]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변방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만주 일대의 [[여진족]]들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 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왕건]]의 부친인 [[왕륭]]도 신라의 관등인 사찬(沙澯) 직을 겸하였다.] 이 상황 역시 꽤 비슷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궁예와 견훤의 출신이 분명 신라지만, 기반은 고구려계, 백제계란 것이다. 신라가 지방요충지 장악을 위해 나름대로 여러 이해가 가는 조치를 하였고 백제의 제2중심지였던 전북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들을 사민했던 게 그것이다. 익산에 보덕국인들을 사민했다고, 갑자기 익산과 백제와의 관련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익산에 심었던 보덕국인들은 신라가 [[보덕국]]을 해체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라남북도 일대로 뿔뿔히 흩어져 사민되거나, 일부는 아예 서라벌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익산에 그대로 집단 정체성을 유지하며 남아있게 되지 못했다는 말. 보덕국인들이 고구려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백제유민의식에 포섭된 건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마진, 태봉으로 갈아치우며 미륵 신앙에 기초한 신정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태봉은 한국사에서 정말 보기 드문 신정국가였다.''' 삼국시대 이후로 탄생한 모든 나라들이 삼국시대 국가들의 후예를 자칭하던 와중에 등장한 독자적인 신정국가라는 점에서 전례가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였고 그냥 국호만 바꾼 것이 아니라 아예 수도를 고구려와는 전혀 관련없는 철원으로 옮기면서까지 이를 확고히 하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궁예 스스로가 건국 명분으로 내세웠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정국가가 아니었던 신라는 물론 고려와도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나라였기에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던 고려가 미륵 신앙에 기반한 신정국가인 태봉을 계승했다고 볼 수가 없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고려의 영토와 구성원을 차지했으나 국호부터 기반사상, 그리고 왕조까지 차이가 있어 고려=조선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고려-조선 왕조 교체의 경우에는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위압에 의한 것이었던 [[공양왕]]의 선양을 어떻게든 강조하며 명백한 고려 왕조의 계승을 선언했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당초 이성계가 신 왕조 개창에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한동안은 국호가 고려에 수도는 개성이었다. 즉 왕실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국가적 연속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었다는 것. 현대인에게 익숙한 고려와 조선의 이미지의 차이는 연대적 차이가 심하게 나는 고려 중기와 조선 중후기의 이미지가 각각 대표 이미지로써 자리잡은 탓도 크다. 사상의 경우도 고려 또한 유교가 원래부터 국가의 기반사상으로써 자리잡고 있었기에 후기에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신유교 사상인 성리학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따라서 주도계층에 있어서도 연속성이 나타난다. 조선의 경우도 성리학 교조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이었던 전기까지는 고려처럼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이에 비해 태봉-고려의 경우 태봉은 궁예의 친위세력이라 할 수 있는 청주 일대의 세력을 등용해 주도계층을 아예 갈아치우던 중이었고, 사상적으로도 불교 중에서도 미륵사상만 콕 찝어서 기반사상으로 삼은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며, 형식적으로도 어떤 국가도 계승하지 않았고 고려 또한 명백히 태봉에 대한 계승을 선언하지 않았다.] 다만 태봉이 공들여 중심지로 삼았던 [[철원군]] 일대에서만큼은 이후로도 한동안 태봉에 대한 연민의식 혹은 계승인식이 남아있었던 걸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