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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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泰封 | Taebong

▲ 900년 ~ 901년 당시 후고구려(태봉)의 판도, 빨간색이 태봉이다.
901년 ~ 918년 (1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신라
고려
국호
고려 ,(901년 ~ 904년),
마진 ,(904년 ~ 911년),
태봉 ,(911년 ~ 918년),
별칭
후고구려
후고려
국가원수
/미륵
역대 군주
궁예[1]
위치
한반도 중ㆍ북부
역사
901년 송악군에서 후고구려 건국
903년 나주 공방전
904년 국호 마진으로 변경
905년 철원 천도
911년 국호 태봉으로 변경
918년 멸망
수도
송악군철원성
민족
고구려 유민[2], 신라인[3]
언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교
불교(미륵신앙)
정치 체제
신정군주제[4][5]
현재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1. 개요
2. 역사
3. 국호
4. 수도 철원성
5. 역대 국왕
6. 연호
7. 관제
8. 논란
8.1. 마진의 어원 논란
8.2. 태봉국은 한국사의 뿌리인가?
8.3. 태봉국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와 신라를 이어주는 국가인가?
9. 인물
9.1. 왕족
9.2. 신하
10.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태봉은 후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한반도 중, 북부에 위치한 군주정 국가로, 궁예에 의해 창건되었다. 대중적으로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왕조의 유일한 군주인 궁예는 국호와 연호[6]를 자주 바꿨는데, 901년에 고구려를 부흥한다면서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후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7년 뒤인 911년엔 또 태봉(泰封)으로 바꿨다. 그러나 918왕건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실각시키면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다.

899년 궁예가 한 때 자신의 주군이자 한반도 중부 군벌인 양길비뇌성 전투에서 제압하고 사실상의 국가를 세웠고 왕칭한 정식 건국 년도는 901년이었으나, 실제로는 894년에 양길 밑을 떠났을 때 이미 독자적인 패거리가 있는 상태였고, 양길 허락도 없이 독자적인 관부를 열고 관직을 임명해가던 때는 896년이었다. 즉 궁예 집단 자체가 실질적인 국가가 된 상태는 896년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후 국호에 몇 차례 변동이 있었으며, 첫 수도인 송악(개성)은 물론이고 지배층의 세력과 국가 조직이 이후의 왕씨의 고려 왕조로 완전히 계승된다. 궁예가 왕건을 필두로 하는 패서 호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태봉의 강역은 역사적으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모두 차지한 건 물론 나머지 평안도[7], 함경도[8], 경상도[9], 충청도[10], 전라도[11] 등등 전국 팔도 모든 지방에 적어도 조금은 영토를 걸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선 시대 행정구역만 기준으로 잡은 이해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할 때 처음 꺼낼 수 있을 뿐, 실상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실제로 태봉이 차지한 영역 중 쓸만한 지역은 경기도와 강원도 영동 지역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의 황해도는 그 잠재성이야 이미 고구려 시대 때 이미 입증된 바 있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아직 그때의 성세는 되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평안도는 고구려 멸망 이후 황폐화되어 유민, 도적, 기타 군소 세력들이 뒤엉켜있던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다.

후백제가 나주를 비롯한 옛 침미다례 일대와 천안을 비롯한 옛 목지국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삼남 지방을 대부분 석권하다시피 했다는 걸 고려하면 적어도 후백제와의 초반 판세는 백중세에서 약간 우위 정도에 그친다고 봐야 한다.

2. 역사[편집]





894년, 후삼국시대 초반의 군벌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강원도 지역 정복에 착수했다가, 치악산을 중심으로 일어나 주천, 나성, 울오, 어진에 이어 명주(現 강릉시)에 입성함으로서 북원경(現 원주시)를 중심으로 한 호족 양길에게서 독립하였다. 명주에 입성할 때 그 무리가 3,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2년 뒤인 896년에는 승령, 임강, 인물현 등 한주의 패강진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공암, 검포(現 김포시), 혈구(現 강화군)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시기에 각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 또한 임명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된다.

899년, 양길이 궁예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자 비뇌성 전투 끝에 승리, 이듬해 900년에 양길 세력을 병합하면서 한반도 중부의 유일한 강자가 되었다. 901년 국호를 고려로 정했으며, 약화된 신라를 사이에 두고 견훤후백제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903년과 909년 ~ 914년 사이에 벌어진 나주 공방전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904년905년에 각각 웅주, 상주, 흥주(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주시)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상주 지역에서 견훤을 물리치면서 후삼국시대 최강의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상주 일대에서의 이 승리와 성공은 상당 부분 의문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후백제가 그 후 불과 2년 뒤인 907년에 아자개가 버티고 있는 상주 일대는 장악은 못했어도, 옛 백제와의 쟁패 과정에서 정교하게 축성된 요새 지대 및 정예병들이 편성된 추풍령 일대는 모조리 장악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주 지역은 태봉 - 고려의 장악 지역이라기보다는 아자개가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거의 완충지에 다름없게 세력을 유지 중이었으므로 상주 일대는 태봉이 결국 장악에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이 곳을 후백제에게 허용한 후폭풍은 훗날 견훤의 서라벌 함락과 공산 전투의 주된 도화선이 되고 만다.[12]

궁예의 영토 확장 사업에서 대단히 의미가 큰 건 과거 통일신라의 북쪽 국경선보다 북쪽으로 태봉의 국경을 밀어올렸고, 패서 일대 전체를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한 것이다. 평양성 성주 검용, 증성의 명귀 등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북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 이북까지 판도에 넣었는데,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간접 지배하긴 하였어도 대동강 이북은 아예 영역 바깥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태봉국은 패서 일대는 물론이고 옛 평양성 전역을 직접 지배 아래 편제한 것이다. 또한 패서는 통일신라가 군과 현 모두 합해 14개를 설치했을 뿐 그 전체에 직접 지배를 관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궁예는 철원군으로 도읍을 옮긴 906년에 패서 서부 절반까지 마저 평정하면서 패서 전체를 손에 넣자, 그 전체에 진 13개를 편성하고 재령강 이서 일대에 군현 12개 설치까지 해내면서, 신라가 당나라와 처음 협약했을 당시 약속받았던 옛 고구려령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 체제 확립을 완료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의 몰락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패서 호족에게 아예 대대적인 물리적 탄압을 가해 중앙 정부에 복종시킨 건 적어도 한국사에서는 이 임금이 최초였다.[13][14]

또한 큰 역사적 의의가 있는 개혁 조치가 있다. 진골층이 통일신라 임금들이 추진했던 개혁 조치 중 가장 강력하게 거부했던 것이 그 소유 토지에 대한 면적 비례 징수 체제였다. 신라의 세금 제도는 가구별 호를 주로 기준으로 했지 소유 토지에 대한 면적 비례 징수는 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는 진골들에게 큰 타격이 가게 되는 것도 있었고...[15] 그러나 진골이니 뭐니 이전에 신라 체제 자체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반감이 컸던 궁예는 소유 토지에 대한 면적별 징수 체제를 도입하여 신라 임금들이 이백 년 넘게 오래도록 고민한 과업을 너무나도 쉽게 해치운다. 이 시기쯤 되면 서라벌 혹은 그 인근 지역에 살던 진골들은 후백제와 태봉이 들어서면서 지방에 있던 토지들을 죄다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제도 자체를 빠르게 손을 본 인물은 이 궁예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물론 왕건 또한 궁예를 몰아낸 후에도 이 개혁조치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915년부터 본격적으로 광기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태봉의 이 놀라운 확장은 멈췄고 궁예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어 갔다. 실제로 고려 건국 초기에 도적들이 들끓어서 왕건이 사절들을 보내 회유시킨 기록이 존재하며, 윤선(尹瑄)이라는 인물은 궁예의 재위기간 말에 이탈하여 골암성(鶻巖城)[16]으로 도주하여 독자세력화해버렸다. 결국 918년 6월, 왕건의 쿠데타로 멸망하였다.

태봉의 영토 대부분은 고려가 그대로 승계했지만 궁예가 친위세력으로 육성하였던 웅주(공주), 운주(홍성), 청주 일대의 백제계 호족들이 구심점인 궁예가 사라지자 고려에 반발해 후백제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명주의 순식(훗날의 왕순식), 상주의 아자개, 하지성(下枝城)[17]원봉(元逢), 명지성(命旨城)[18]성달(城達)[19] 등의 호족들이 잠시나마 독자세력으로 할거했다가 922년도에야 고려에 귀부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한반도 내 이웃 국가들인 후백제, 신라와 적대하였으며 특히 905년 이후 신라를 멸도로 부르며 신라에서 투항하는 자들을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영역 전체가 신라의 밀도 높은 직접 지배를 겪은 끝에 진골 귀족의 수취와 지방 혼란이란 폐해를 온몸으로 겪어 반신라 감정이 강했을 수밖에 없는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패서 지역은 신라가 몇몇 중요 지역을 장악해서 영향력만 유지하는 간접지배 형태로 만족했던 터라 딱히 신라 중앙 정부에게 입은 피해는 없었고, 신라말 그 영역 전체에 퍼진 말세적 분위기도 이들 입장에선 다른 지역 얘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이들을 족족 죽여대는 궁예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불필요한 미친 짓에 불과한, 한마디로 장기 집권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행위였다.[20]

한편 915년거란에게 사신을 보내는 동시에 보검을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이 요사 이외국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낸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거란이 북방을 넘어선 중원의 신흥 세력으로 뜨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우호 관계를 맺으려던 의도로 풀이된다. 한편 이렇게 거란과 꾸준히 외교 관계를 맺었던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중원 국가와의 외교를 중시하면서 거란과는 철저히 척을 졌다. 자신의 유조인 훈요십조에 거란을 배척하라고 남겼을 정도. 한편 거란의 적국이었던 발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적어서 불명.

일각에서는 915년부터 꾸준히 거란과 사신을 주고 받은 기록을 통해 당시 거란 측과 대립하던 발해와 자연스레 소원해진 것이 아니냐 추측하지만, 고려가 여요전쟁 과정에서 극심한 사료 손실을 겪었기에 적어도 나말여초 관계는 드러난 사료들로만 추측하면 곤란하다. 실제로 고려 측 사료는 없으나 요나라 측 사료에선 등장하는 왕건의 사위였던 발해 유민 출신의 장군 고모한이 있으며, 왕건 또한 다른 사료에선 나오지 않으나 중국과 오간 사서에서는 발해 왕실과 자신이 인척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태봉이 발해의 영역인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했으니 발해와 충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었으나, 발해 또한 옛 고구려의 핵심 영역들에는 영향력을 투사하지 못했기에 이는 그나마 생각은 해볼법한 앞서 추측과는 달리 아예 고려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다. 요약하면, 발해와의 관계는 미지수지만 딱히 좋고 나쁘다를 판단할 여지는 거의 없는 게 되겠다.

태봉은 그 성공과 여러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존속 기간이 후백제보다 여러모로 짧다. 궁예는 기훤, 양길의 수하를 거쳐서 894년에 명주를 차지하면서 독자세력화하였으나, 견훤은 궁예보다 2년 빠른 892년에 스스로를 '도독'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국호를 선포하고 왕칭한 것도 900년으로 견훤이 이 부분에서 또한 궁예보다 1년 빠르면서 멸망은 20년 가까이 늦다. 보통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후백제의 흥망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삼국시대 전체로 볼 때는 비교적 빠르게 퇴장했다.


3. 국호[편집]


이 태봉 왕조의 유일한 군주인 궁예는 국호와 연호[21]를 자주 바꿨는데, 901년고구려를 부흥한다면서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후[22]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7년 뒤인 911년엔 또 태봉(泰封)으로 바꿨다. 그러나 918년 왕건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실각시키고 집권하면서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구려장수왕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호를 정식으로 고려로 변경했다.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의 군주인 문왕도 일본에 '고려 국왕'을 칭했기에, 궁예도 '고구려'나 '후고구려'[23]로 국호를 정하지 않고 '고려'라고 했다. 다만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왕건이 세운 고려와 과거의 궁예가 세운 국가를 구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표현을 썼다.

궁예가 나라 이름을 바꾼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삼국 중 하나 고구려에 한정된 고려 국호 대신 더 넓게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넓은 의미를 찾아 바꾸었다거나, 나라를 세우는 초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구려색이 옅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궁예는 고구려 유민 의식을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용했지만 궁예의 혈통은 기록상 엄연히 신라 왕족이었고, 토착 호족 출신인 왕건과는 달리 고구려 유민 의식에 귀속이 강하진 않았다. 아래 단락에서 설명하는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옛 고구려와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철원으로의 천도도 그 일환으로 볼 여지가 있었으며, 이런 고구려색 빼기 작업은 고구려 유민 의식을 갖고 있던 패서 호족의 불만을 샀고 결국 궁예가 그들에 의해 몰락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고려'란 국호로 건국했지만,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그 전에 있었던 고주몽고(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왕건이 건국하기 이전의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불렀다. 광복 이후 한국 사학계에서도 그 관습을 따랐지만, 2000년대 들어서 거의 태봉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는 편. 일단은 태봉이 그나마 가장 오래 쓰이고 마지막까지 쓰였으며, 왕건의 정통성을 위해 후고구려라는 표현을 썼던 고려 때와는 달리, 태봉도 고려도 사라진 지금은 그런 걸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왕운기에서는 후고려라고 불렀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3년에 지나지 않으며, 이후 '마진'과 '태봉'이 각각 7년으로 '고려'라는 국호를 썼던 때보다 훨씬 길었다. 따라서 태봉을 '후고구려'는 물론 '고려'라는 국명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후세에 '후고구려'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부식 등의 삼국사기 편찬진들이 굳이 태봉의 국호를 고려라고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궁예를 건국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4] 왕건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궁예의 태봉 왕조는 독자성이 없는 '고구려' 잔당 세력처럼 묘사했다. 즉, 궁예의 '태봉'은 '후고구려'가 됨으로써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매개체로 격하된다. 실상 3년 쓰인 '고려'를 '후고구려'라 칭하면서, 각각 7년 쓰인 '마진'이나 '태봉'으로 부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궁예를 '마진 왕'이나 '태봉 왕'으로 대우하면 왕건은 명백하게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통성을 찬탈한 자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국호를 없앰으로써 궁예의 나라는 독자적인 왕조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태봉 자체가 궁예 1대로 단명한 왕조인 것도 이러한 격하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다.

4. 수도 철원성[편집]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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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만월대 / 개경 본궐
수창궁
북천동궁
수춘궁
연경궁
명복궁
양화궁
현덕궁
북궁
승천부
강도
서경
동경
승천궐
고려궁지 / 강도 본궐
서궁
장락궁
대화궁
용덕궁
구제궁
좌우궁궐
조유궁
남경
동주
그 외
사찰 내 재궁
남경 별궁
태봉국 철원성
만월대 내 별궁
고려의 궁원
남궁
의종 대 별궁
삼소궁궐
흥왕사
안화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봉국 철원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역대 국왕[편집]


순서
시호
휘(이름)
재위 기간
비고
-
-
궁예(弓裔)
901년 ~ 918년 6월 14일 (17년)
파일:궁예 (칠장사 벽화).png
일대 단명 왕조이다.


6. 연호[편집]


태봉의 연호
마진
무태(武泰, 904년)
성책(聖冊, 905년 ~ 910년)
태봉
수덕만세(水德萬歲, 911년 ~ 914년)[25]
정개(政開 : 914년 ~ 918년)[26][27]


7. 관제[편집]


파일:태봉의 관제.png}}}
904년 광평성, 병부, 대룡부, 수춘부, 봉빈부, 의형대, 납화부, 조위부, 내봉성, 금서성, 남상단, 수단, 원봉성, 비룡성, 물장성, 사대, 식화부, 장선부, 주도성을 두었다. 신라의 제도에 기초하여[28] 만들었기에 위 주요 부서 중 대부분이 신라의 관제와 대응한다. 다만 명칭이 거의 싹 다 바뀐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실용적인 부분은 신라를 따르되 나머지 부분은 죄다 새로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부서는 광평성으로, 명칭을 태봉식으로 고친 최고 관부였고 후일 고려의 2성 6부제 중 중서문하성에 대응되는 포지션에 있었다. 남아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적어 신라의 제도에 기초했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은 신라의 집사부와 유사한 기능을 했다는 설과, 신라의 화백회의를 계승해 호족이나 유력자의 의견을 수렴하여 의사결정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광평성의 장관은 '광치나'라고 하였는데 신라와 초기 고려의 시중에 대응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병부로, 군사를 담당하던 부서였다.

대룡부는 창부[29], 수춘부는 예부[30], 의형대는 형부[31], 납화부는 대부시[32], 조위부는 삼사[33], 내봉성은 도성[34], 금서성은 비서성[35], 남상단은 장작감[36], 수단은 수부[37], 원봉성은 한림원[38], 비룡성은 태복시[39], 물장성은 소부감[40]에 대응한다. 사대는 통역관을 양성했고, 식화부는 과수를 심었으며 장선부는 성과 해자를 수리했고 주도성은 그릇을 만들었다.

이런 관부 체제는 어느 시점에서 개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6일 만에 내린 포고나, 그 외의 역사기록을 보면 위 제도와 비슷하지만 다른 관부들이 언급되기 때문. 우선 '순군부'가 설치되어 서열 3위로 올라섰으며, 내봉성 역시 서열 2위로 상승했다. 또한 내천부, 진각성[41], 백서성, 내군이 추가되었다. 내군은 궁예의 친위대로,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에 나오는 그 내군이다. 한편 대룡부가 창부로, 수단이 도항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일단 순군부 같은 경우는 학자마다 견해는 다르지만 적어도 왕건이 집권하기 훨씬 전에 설치된 걸로 보고 있으며, 순군부 자체는 그전 신라 제도에는 전혀 없는 궁예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였다. 통일신라 같은 경우 병부에서 군사 관계된 모든 것을 다루었고 때문에 병부의 장관은 늘 복수제를 유지했는데, 궁예의 병부는 장관이 늘 하나였다.[42] 대신 순군부를 만들어 병부에서 분리시키면서, 순군부에는 호족들의 부대를 순회하면서 감시하게 했다. 또한 병부에게서 모든 군령권을 박탈한 다음 순군부로 이관했고 병부에는 군정권만 남겨놓았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헌병대와 합동참모본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호족들을 때려잡는 기능도 어느 정도 수행하던 기관일 확률이 높은데(...), 그럼에도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이 기관을 없애지 않고 물론 그대로 잘 활용했다.

한편 관등체제는 9품제였는데 적어도 운영 방식은 고려 초까지만 해도 일부 신라와 비슷했지만 신라 17관등제와는 완전 다른 운용이었다. 역시 관등체제에 있어서도 궁예가 실용적인 부분은 신라를 따르되 나머지 부분은 죄다 새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강력한 방증.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으로 아홉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 건국 즈음에는 대대재상, 중부, 태사훈, 보좌상, 주서령, 광록승, 봉조판, 봉진위, 좌진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8. 논란[편집]



8.1. 마진의 어원 논란[편집]


궁예가 7년간 사용한 국명인 마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엇갈리고 있다. 일단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마진으로 지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의미에 대한 기록은 일절 없다.

기본적으로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대동방국(동방의 큰 나라)'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마진이 마하진단의 약자라고 명시한 사료가 있는 건 아니며, 단지 미륵을 자칭한 궁예 정권의 특성이나 마진이란 한자에 미루어 추정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와 진단 모두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불교에서 쓰는 단어들이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시니타나(Cinitana)의 음역으로 동방을 뜻한다. 큰 인기를 끈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이 설을 채택해 나레이션이 '대동방국을 뜻한다' 라고 못박으면서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지긴 했지만 확실한 정설이라 보긴 어렵다.

한편 마진이 단순히 마한(馬韓)과 진한(辰韓)을 합칭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흔히 쓰는 마한과 진한의 '마', '진' 자와 한자가 다르지만 이 이름들이 본래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일 확률이 높기에 한자 표기는 그저 취음으로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43]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계승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천 년 왕조인 신라를 흡수하겠다는 의지도 아울러 천명한 것일 수 있다. 그 전에 사용한 '고려'라는 이름은 옛 3국 중 고구려 1개국만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기 때문. 현대 역사학적인 지식으로는 고구려는 삼한이 아니었고 마한이 백제로, 변한이 가야로, 진한이 신라로 흡수됐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서 삼국시대 후기부터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가 됐다는 시각이 퍼져 있었다.[44] 따라서 "마진 = 마한 + 진한"이라면 "마진 = 고구려 + 신라"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된다.

마한과 진한이라는 뜻과 마하진단이라는 뜻을 중의적으로 함께 나타내려 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8.2. 태봉국은 한국사의 뿌리인가?[편집]


일각에서는 고려가 진정한 한반도의 통일 왕조라면, 고려의 전신으로서 태봉이 한국사의 뿌리라고 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한반도에서 이전 국가로부터 국가 조직이나 다른 여타 국권을 인수인계 받지 않고 건국된 마지막 국가라는 논리를 펼친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이나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북한 등을 모두 포함하여 태봉 이후에 한반도에 등장한 모든 국가들은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이전 국체로부터 국권을 넘겨받아 건국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체는 실질적으로 태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제 치하 식민지는 외견적으로 일본의 행정구역 취급을 받았고[45],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1919년의 4월 10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에서 태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므로 해당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게다가 이는 관념론적 논의일 뿐이고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그래도 몇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있다.

첫번째는 조선 왕조에 있다. 조선은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이름을 정했으며,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한'은 삼한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명시했다.[46] 무엇보다 태봉 자체는 한국사에서 그다지 오래 존속한 왕조가 아닌데다가 민족사에 기여한 바도 적다.

둘째로, 태봉과 동시대에는 고구려의 또 다른 후신으로 자처하는 발해가 있었다. 발해는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로 바뀐 8년 후인 926년이 되어서야 거란요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이후로도 발해부흥운동으로 정안국(938년 ~ 986?년), 후발해(926년 ~ 938년) 등이 꽤 유지되었다. 고려를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 왕조로 보는 건 후삼국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 대광현의 세력을 받아들이는 등 발해계 세력을 상당히 흡수한 것 때문도 있는데, 태봉은 고려와 달리 발해보다 먼저 멸망해버렸기 때문에 발해계 세력은 거의 흡수하지 못했다. 단, 이 또한 발해계 세력이 태봉에 이어 성립한 고려에 흡수된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태봉과 고려 사이의 국가 연속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이보다는 비록 쿠데타의 형태였다곤 해도 지배세력이 교체되고, 이념적으로 실질적으로 후대에도 쭉 이어지는 실질적인 국가체계가 완성된 것이 바로 고려에서부터였다는 점이 약간 많은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47]


8.3. 태봉국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와 신라를 이어주는 국가인가?[편집]


그렇다면 신라를 계승한 국가로서 한반도의 왕조들 사이에서 고려와 신라 사이의 징검다리로서의 의미라도 있는가? 태봉은 신라를 기계적으로 계승한 단순한 신라의 일부였고 고려는 태봉의 연장선에 있으니 고려는 그저 고구려의 이름만 빌린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태봉의 인적, 문화적 토대는 상당수가 신라(정확히는 통일신라)에서 왔으나 태봉 건국 자체가 처음에는 기존 신라 체제 자체를 부정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인데다가 명백히 신라로부터 떨어진 별도의 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궁예를 지지한 초기 호족 박지윤의 아버지 박직윤의 경우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하대에 스스로를 대모달읍장[48]이라고 일컫고 있다. 하나의 사례로 일반화는 어렵지만, 초기 궁예를 지지한 호족 세력은 고구려계이고, 남북국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는 상태로 살아왔으며,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서는 반독립 상태로 고구려 계승 나아가서는 부흥을 원했다고 볼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게다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고 되어 있으나 궁예는 한번도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으며, 심지어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기 직전인 905년부터 신라를 '멸도(滅都)'[49]라고 부르게 시켰다. 덤으로 일찍이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신라왕의 어진을 칼로 찌르는 등의 행동을 했으며, 멸도라고 부른 이후로는 신라에서 투항한 인사들을 죽였다.[50] 무엇보다, 신라가 태봉이 망한 뒤에야 망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신라는 9주 5소경에서도 옛 삼국의 영토를 각각 3주로 나누어 다스렸듯이 삼국을 완벽하게 동화시키지 못했다. 조상 대대로 신라인일 개연성이 농후한 오늘날 경북 문경[51] 출신 신라 군인 견훤이 백제 의자왕의 복수를 내세우고,[52] 역시 신라 왕자라는 궁예가 고구려 계승을 선언했을 때 토착민에게 지지 받았음 자체가 여전히 고구려인, 백제인이란 분립적 국계 인식이 남아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신라가 옛 고구려의 제2수도권인 패서 일대를 흡수하는 시기가 늦었고, 흡수했어도 상당한 자치가 허용되었으며, 또한 그 지역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 당시 영주에서 탈주하던 고구려 유민들이 탈주 중 방향을 틀어 합류했던 상황 등은 이 대목에서 특기할 양상이다.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청나라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어 버렸고[53]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변방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만주 일대의 여진족들이 원나라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 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54]

이 상황 역시 꽤 비슷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궁예와 견훤의 출신이 분명 신라지만, 기반은 고구려계, 백제계란 것이다. 신라가 지방요충지 장악을 위해 나름대로 여러 이해가 가는 조치를 하였고 백제의 제2중심지였던 전북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들을 사민했던 게 그것이다. 익산에 보덕국인들을 사민했다고, 갑자기 익산과 백제와의 관련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익산에 심었던 보덕국인들은 신라가 보덕국을 해체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라남북도 일대로 뿔뿔히 흩어져 사민되거나, 일부는 아예 서라벌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익산에 그대로 집단 정체성을 유지하며 남아있게 되지 못했다는 말. 보덕국인들이 고구려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백제유민의식에 포섭된 건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마진, 태봉으로 갈아치우며 미륵 신앙에 기초한 신정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태봉은 한국사에서 정말 보기 드문 신정국가였다. 삼국시대 이후로 탄생한 모든 나라들이 삼국시대 국가들의 후예를 자칭하던 와중에 등장한 독자적인 신정국가라는 점에서 전례가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였고 그냥 국호만 바꾼 것이 아니라 아예 수도를 고구려와는 전혀 관련없는 철원으로 옮기면서까지 이를 확고히 하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궁예 스스로가 건국 명분으로 내세웠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정국가가 아니었던 신라는 물론 고려와도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나라였기에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던 고려가 미륵 신앙에 기반한 신정국가인 태봉을 계승했다고 볼 수가 없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고려의 영토와 구성원을 차지했으나 국호부터 기반사상, 그리고 왕조까지 차이가 있어 고려=조선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55]

다만 태봉이 공들여 중심지로 삼았던 철원군 일대에서만큼은 이후로도 한동안 태봉에 대한 연민의식 혹은 계승인식이 남아있었던 걸로 보인다.


9. 인물[편집]



9.1. 왕족[편집]




9.2. 신하[편집]





10. 같이보기[편집]


[1] 궁예의 성이 진짜 궁(弓)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래서 국성(國姓)은 알 수 없다.[2] 관서, 패서, 강원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패서 호족 등.[3] 경덕왕의 치세 때 패강진 등으로 사민된 신라인과 왕경인 등.[4] 궁예 특유의 이질적인 종교 지도자의 색채를 띤 신권정치 기반의 군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비슷한 국가로 태평천국이 있다.[6]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 [7] 평양시 등의 평남 남부 일대[8] 함경남도 영흥군 이남 지역[9] 상주시를 비롯한 경상북도 북서부 일부[10] 오늘날의 청주시 약 1/3, 충주시, 천안시, 홍성군 등을 포함한 북부 지역(옛 목지국 일대)[11] 나주시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하구의 월경지(옛 침미다례 일대)[12] 재미있게도, 옛 백제 또한 이 일대를 신라가 장악하는 걸 막지 못했기에 성왕이 전사하고 말았었다.[13] 나당 전쟁 이후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춘 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난 이 일대 호족들을 어떻게 다룰지 통일신라 역대 임금들이 오랫동안 나름 고민했던 과제였다. 통일신라라고 행정령과 군사력이 모자라서 못한 게 아니라 이런 부작용이 우려스러웠는데(즉 강력한 반란의 가능성이 있었고 억누른다 해도 그 나비효과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었다), 신라를 미워한다는 궁예가 부작용 따윈 무시하고-결국 그 부작용으로 파멸한 셈이지만-이 과제를 너무나도 쉽게 해치워 그들의 숙원을 해소한 것은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태조부터 광종까지의 호족 제압책 또한 궁예의 이 물리적인 패서 호족 탄압에 덕본 측면이 어느 정도 있다. 물론 때문에 궁예의 친위대 역할을 하던 백제계 호족들에게 꽤 당했던 패서 호족들이 백제계 호족들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어, 포용을 부르짖던 왕건의 제지를 뿌리치고 계속 참소하고 괴롭힌 끝에 현재의 공주시, 청주시(궁예는 성장기를 청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집권 후로도 특히 청주인을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홍성군, 세종특별자치시 일대 등 옛 백제 지역을 견훤에게 돌아가게 만든 부작용은 있었지만...[14] 초기에야 궁예 정권이 고구려를 부활했다는 모토를 견지했으니 어느 정도 여론의 지지를 받았겠지만, 백제계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이용하면서 패서 호족들 탄압까지 자행했던 시점부터는 자유롭게 살다가 갑자기 군현 지배를 관철당한 재령강 이서 호족들의 여론이 상당히 나빠졌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다만 궁예가 쫓겨난 후에도 재령강 이서 군현들은 왕건의 고려 하에 더욱 공고해졌음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부정했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그렇듯 궁예가 이룬 행정적, 군사적 성과는 호족들 여론과 무관하게 결국은 어느정도는 계승했음이 눈길을 끈다.[15] 뭔지 잘 감이 안 온다면 조선 후기에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아 국고에 기여가 덜했던 면이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16]강원도 안변군 일대.[17]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일대.[18]경기도 포천시 일대.[19] 후에 동생 이달(伊達), 단림(端林) 등과 함께 귀부한다.[20] 훗날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신라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한 건 물론 왕건의 개인적인 판단과 성향이 큰 원인이지만, 그 전에 패서 호족이 놓인 이런 역사적 상황도 무시못할 이유였다. 일단 통일신라가 패서 지역 외엔 훗날 등장하는 초기 고려보다도 통일적인 체제로 지배한 건 사실이다. 이전 연구에서는 지역별로 이런 통치력 차이가 있었다고 논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주보돈,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1998년 발간 참조) 패서 지역을 포괄한 한산주가 지나치게 담당 영역이 넓었고, 패서 지역만은 유독 신라 관헌의 수가 적었고 직급수도 낮은 편이었으며, 상당 부분 다른 지역보다 자치가 허용되었음은 최근 연구에서 규명되어 있다.(전덕재,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그 성격. 2013년 발간.)[21]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22] 다만, 고려조에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궁예가 건국했다고만 적혀 있고, 최초 국호가 '고려'임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왕건이 건국한 고려의 정통성에 흠집이 날 가능성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찬사서인 삼국유사는 궁예의 최초 국호가 '고려'임을 밝히고 있다.[23] 역사 서술에서 후(後)+국명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후대의 사가들이 구분상의 용이를 위해 붙인 일종의 가칭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 역사 중 오호십육국, 오대십국 시기의 무수히 난립했던 '후(後)'자가 붙는 국가들은 당대에는 전부 본래 국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영토나 중심지 변화로 방위를 붙인 국명도 마찬가지(서주, 동한, 동진, 남,남송 북위)[24] 당대의 외국 사서인 요사남당서에는 당대 태봉의 국명을 고려라고 명시하고 있다. 참고로 요사는 태봉이 거란에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다.[25] 고대 한국에서는 오행설에 따라 한 나라의 천명이 오행 상생의 순서로 이어지며 흥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박씨 신라는 목덕, 고구려는 화덕, 백제는 토덕, 김씨 신라는 금덕, 궁예의 태봉은 수덕에 대응되었다. 원래 찬탈이나 혁명, 점령 등은 상극을 따라야 했으나, 중국에서 한무제 이래 내려온 선양에 따른 상생설을 따르면서 이렇게 전해진 것이다.[26] 후백제 임금 견훤의 연호였던 정개(正開, 901년 ~ ?)와 다르니 주의[27] 2023년 태봉 연호 정개가 적힌 목간이 발견 되었다.#[28] 비록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처하긴 했지만 이미 고구려가 멸망해 없어진 지 무려 240여년이 지나서 고구려의 정치제도를 완전히 고증해낼 만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 때문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어 완전히 남아있진 않지만 일단 남아있는 기록만 살펴봐도 태봉과 고려 초기 통치제도는 후기 고구려와 공통점이 별로 없다. 사실 통치범위나 환경, 시대도 달라졌기에 굳이 그대로 따라야 했을 이유도 없었다.[29] 국토와 인구조사 및 그에따른 세금부과를 맡았다. 현재의 국세청.[30] 각종 예절 제사 의식과 외교를 맡았다.[31] 법률 제정, 재판, 형 집행 담당[32] 왕실 재물과 화폐 관리.[33] 화폐와 곡식에 대한 회계와 출납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삼사와는 매우 다르다.[34] 인사관리.[35] 도서 관리와 제사문서 작성.[36] 궁청과 관청 등의 건축과 수리.[37] 기술자 및 건축수리를 담당한 공부의 하위부서.[38] 왕명이나 외교문서 작성.[39] 왕이 사용하는 수레와 말을 관리했다.[40] 공예 담당부서.[41] 신라의 예궁전의 옛 이름이 진각성이었기에 아마 기능이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각성 역시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에서 왕실의 진물(珍物)=보물을 관리하는 부서로 추정된다.[42] 통일신라 같은 경우 여러 관직을 한 사람이 겸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지만 궁예는 이러한 관행까지 뜯어고쳐 없애버렸다.[43] 신라도 음역 명으로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四方)'는 뜻으로 한자를 '新羅(신라)'로 고정 표기하기로 정하기 이전에는 비슷한 발음의 수많은 다른 한자(사로, 서라벌 등)로 음역되었다.[44] 《삼국사기》〈잡지(雜志)〉 3권에는 최치원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의 글에서 이런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우리를 자칭하는 명칭 중에 삼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신라중대부터 三韓=三國이라는 인식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45] '국체'라는 형식적인 개념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면 태봉에서 시작한 국체가 경술국치로 일본에 흡수되어 일개 행정구역인 조선총독부가 되었다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46] 정확히는 후대에 의미가 확대된 해동세계-삼국-한반도를 가리키는 통칭으로써의 삼한이며 원삼국시대의 소국연맹체인 마변진한의 삼한에 한정해서 가리키는 건 아니다.[47] 이를테면 졸본부여와 고구려는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연속성 자체는 부정하진 않으나, 지배세력이 계루부로 교체되고 각종 체제와 시조의식이 완비된 뒤 진정한 고대국가로서 성립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고구려의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보지 계루부가 졸본부여에 포섭되었을 때의 왕인 연타발로 보지는 않는다.[48] 대모달은 고구려의 고위무관직이었다.[49] 멸도라는 표현은 이미 망해서 없는 동네라는 뜻이다. 궁예는 신라를 나라 취급도 안 했다.[50] 모두 삼국사기 기록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출생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다'라고 추정하였다. 부석사 사건에 대해서는 깨알같이 '그 칼자국이 지금(=250년이 지난 당대의 고려 시대)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51] 신라 내지(內地) 출신이라고 한들 신라계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례로 670년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김품일 등을 필두로 한 신라의 백전노장들이 웅진도독부의 크고 작은 성읍(城邑) 82개를 순식간에 점령한 뒤 해당 지역의 백제인들을 내지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52] 물론 이때는 상류층인 6두품도 이반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견훤은 신라 사회의 중상류층이긴 했다. 신라 왕실이 직할하는 추풍령 일대 호족 자제였던데다 신라군 군관 출신이기도 했던지라, 신라 왕실이 그 이유로 견훤을 반역자로 여겨 더욱 미워했을 개연성은 상당하다.[53] 단,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명문씨족 가운데 하나였던 우라나라 씨는 완안씨(完顔氏) 황실에 뿌리를 둔 금나라 귀족 가문으로서 백호씨족(白號氏族)으로 이름난 부족이었다. 이는 비단 우라나라(烏拉那拉) 씨뿐만이 아니라 예허나라(葉赫那拉), 하다나라(哈達那拉), 호이파나라(輝發那拉), 수완나라(蘇完那拉) 씨도 마찬가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로 평양성패서 일대를 기반으로 하던 귀족 가문인 왕씨(王氏) 일족이 고구려 왕가를 대체해 고려를 건국하고 구성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상기한 해서여진의 나라씨족의 경우 완안씨 황가에 대한 참칭 의혹이 있다. # 또한 해서여진은 원래부터도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강했고 혈연적으로도 원래 여진족의 근본 있는 혈통이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과는 별개로 당시 유목세계에서 위상이 장난 아니었던 몽골과의 혼혈이기도 했기 때문에 타 여진족을 얕보고 있었다.[54] 왕건의 부친인 왕륭도 신라의 관등인 사찬(沙澯) 직을 겸하였다.[55] 다만 고려-조선 왕조 교체의 경우에는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위압에 의한 것이었던 공양왕의 선양을 어떻게든 강조하며 명백한 고려 왕조의 계승을 선언했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당초 이성계가 신 왕조 개창에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한동안은 국호가 고려에 수도는 개성이었다. 즉 왕실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국가적 연속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었다는 것. 현대인에게 익숙한 고려와 조선의 이미지의 차이는 연대적 차이가 심하게 나는 고려 중기와 조선 중후기의 이미지가 각각 대표 이미지로써 자리잡은 탓도 크다. 사상의 경우도 고려 또한 유교가 원래부터 국가의 기반사상으로써 자리잡고 있었기에 후기에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신유교 사상인 성리학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따라서 주도계층에 있어서도 연속성이 나타난다. 조선의 경우도 성리학 교조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이었던 전기까지는 고려처럼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이에 비해 태봉-고려의 경우 태봉은 궁예의 친위세력이라 할 수 있는 청주 일대의 세력을 등용해 주도계층을 아예 갈아치우던 중이었고, 사상적으로도 불교 중에서도 미륵사상만 콕 찝어서 기반사상으로 삼은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며, 형식적으로도 어떤 국가도 계승하지 않았고 고려 또한 명백히 태봉에 대한 계승을 선언하지 않았다.[56] 이 인물의 매형이 공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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