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고려)/생애 (문단 편집) == 국호의 기원 ==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시간이 흘렀어도 고구려계로서의 의식은 여전했고, 이들을 통합한 '일목대왕'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했다.[* 지금은 궁예가 처음 칭한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한다. 이는 편의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궁예의 흔적을 지우고자 한 의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별도의 국가 체제를 갖출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혹은 하지 못한) 패서의 고구려 유민들과는 정반대로, 대놓고 국가 꼴을 갖췄던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철저한 탄압과 그 유민의 집단화를 경계한 조치 때문에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및 원신라 지역으로 흩어져 강제사민당해서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를 보면, 패서 지역 고구려 호족들의 특수한 정치적, 지리적 환경이 훗날의 고려 왕조 성립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때문에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도 더욱 원만할 수 있었는데, 신라 같은 경우 옛 백제 지역은 밀도 높게 직접 지배하던 지역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후백제]] 같은 경우, 그 시초 구성원 전원이 통일신라 체제에서 벼슬하던 자들이었기에 신라 입장에선 '''반군 중의 반군'''이라고 여길 정황이 충분했다. 하지만 패서 일대는 통일신라가 가장 강성할 때도 그다지 무리하게 직접 지배를 시도한 바 없었고 자치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던지라 신라말 혼란기 특유의 막장 지방민 착취도 정작 이들과는 영 상관 없는 얘기였고, 고려 건국 세력은 때문에 의외로 신라와 그렇게 원수질 일이 그다지 없었다.[* 물론 정작 궁예는 이 대목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긴 했다. 견훤보다 더 막가는 불필요한 반신라 정책에 고려 국호를 폐기하는 행태라든지. 패서 호족에게는 그 어느 면이든 맘에 들게 없는 정책방향이었다. 이 지경이면 오히려 궁예가 그렇게라도 오래 정권을 유지한게 신기할 정도.] 왕건의 먼 조상이 옛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사서상의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중국 송나라의 사서인 《[[고려도경]]》엔 고려의 왕씨(王氏)가 원 고구려의 대족(大族), 즉 귀족이라는 기록이 있다], 후당 때 왕건이 공식으로 표방한 '장회무족'부터 시작해서 모든 정황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가리키고 있다. 문화적 계승으로 봐도 사례가 많이 보이는데 왕건의 청동상은 나체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의 전통방식이 사용되었고, 왕릉인 [[현릉]]엔 고구려 무덤처럼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분벽화에서의 [[사신도]] 양식 또한 계승하였다. 그리고 수도 개경에는 [[유화부인]]을 숭배하던 사당인 동신사가 유지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