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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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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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이전
2. 집안 내력과 초기
3. 국호의 기원
4. 호경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5. 출세가도
7. 궁예의 폭정
8. 고려 건국
9. 후백제와의 대결
9.2. 수세에 몰린 왕건
9.3. 대광현의 귀순
9.4. 고창 전투에서의 역전
9.5. 신라를 구원
9.6. 운주의 승리와 후백제의 내분
9.7. 견훤의 투항과 후삼국 통일
10. 후삼국 통일과 말년
11. 붕어와 장례식


1. 건국 이전[편집]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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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강충
구치의
이제건
보육(손호술)
덕주
덕주
보육
진의
당숙종
진의의 언니
작제건
저민의(서해용녀)
강씨부인
용건
몽부인(성모천왕)
왕평달
도선
왕건
왕식렴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국적
신라 → 고려 → 마진 → 태봉
태봉 관등
아찬(阿飡)
대아찬(大阿飡)
파진찬(波珍飡)
태봉 직위
철원태수(鐵圓郡 太守)
정기대감(精騎大監)
장군(將軍)
시중(侍中)
백선장군(百船將軍)
거점지
신라 송악군
조상
성골장군 호경
부모
사찬 왕륭, 몽부인 한씨
재임기간
철원군 태수
894년 ~ 898년 2월
정기대감
898년 2월 ~ 900년
태봉 아찬
900년 ~ 911년
태봉 대아찬 장군
911년 ~ 913년
태봉 파진찬 겸 시중[1]
913년 ~ 914년
태봉 백선장군
914년 ~ 918년 7월 25일


2. 집안 내력과 초기[편집]


성씨는 개성 왕씨로,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제18대 의종 대에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에 전설들이 적혀 있다.

왕건의 먼 조상은 패서 지역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일단 왕건 집안에서 내세우는 패서 지방에 처음 정착한 시조가 외7대조인 호경이며, 고구려 영토였던 백두산에서 송악으로 내려와 '성골장군'이라 자칭하며 세를 잡았다고 하는 게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 호경은 왕씨가 아닌 신천 강씨 집안과도 유력한 관계가 있는 걸로 추측된다.[2]

서긍이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왕건의 조상이 고려[3]의 대족(大族)[4]이었다고 기록했다.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은 고(구)려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 사건 이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가 거의 200여 년 동안 영토로 경영했던, 동비홀(冬比忽) 및 부소갑(扶蘇岬)을 합친 군이었다. 일단 왕건은 외7대조 호경의 예상 생존 연대가 발해 건국기인 점, 그 조상이 일부러 백두산에서 내려왔다는 전승, 송악군을 둘러싼 황해도 일대에 유독 '백산'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았던 점, 대조영 집단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 일시 끌려갔던 당나라의 영주 역시 이후 '백산'이란 지명이 몇군데 남게 되는 점을 미뤄봤을 때, 그 선대가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대조영의 속말말갈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탈주했던, 백산말갈 고구려인과 관계가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신형식 교수 《통일신라사 연구》 중 제1장 4절 <고구려 유민의 동향> 부분 참조)

고구려 유민이 집단 탈주했을 당시 고구려인의 정체성이 있는 속말말갈인 및 백산말갈인들 또한 고구려의 고토로 복귀했었으나, 백산말갈인들은 대조영 집단과는 달리 당나라와 목숨 건 전쟁을 또 한 차례 벌이기보다는 당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대에 잔류한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의 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고구려의 옛 수도권으로 복귀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백산말갈을 '말갈족'으로 오해하는 이상한 억측이 있는데, 여기서 말갈은 종족 개념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백산말갈의 주축이 고고학적으로 동부여 및 옥저임이 유력한 예맥계 고구려 변경민이었기에, 오히려 대조영이 속한 속말말갈보다도 예맥계일 가능성과 그 비중이 높은 계통이었다.[5]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구당서》 199권 및 149권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백산부는 원래 고구려에 소속되었으나, 그 나라가 멸망한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또한 《신당서》 219권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백산은 본래 고구려의 신하였으나, 중국이 평양을 정복한 후에는 많은 사람이 당으로 들어갔다.'

즉 속말말갈 뿐만 아니라 백산말갈도 분명히 끌려간 것이다.

한편 왕건의 부계쪽 선조가 왕씨이고, 왕건이 후당 측에 표명한 장회무족이었음도 중요한 대목이다. 정황상 고구려 유민이 많이 참여한 평로치청번진, 즉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와도 일정 부분 무역을 통한 관계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훗날 왕건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는 후당 황제의 조서에서는 왕건을 '장회무족'(長淮茂族)이라 일컫고 있다. '무족'은 대단히 명성이 높은 명문귀족이란 뜻이며, '장회'란 말은 다름아닌 이정기의 평로치청번진이 자리한 일대를 일컫는 용어다. 후당측의 조서는 당연히 고려 왕건 측에서 전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 분명한 만큼, 왕건 집안의 직계가 평로치청번진에 살았던 고구려 유민 계통의 왕씨 집안이었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즉 왕건의 집안은 외7대조인 호경의 기준으로 보면 백산말갈과 관련이 깊은 고구려 유민이었고, 부계쪽으로 보면 낙랑 시대부터 내려오며 고구려 시대에도 귀족 가문이었다가 평로치청번진에서 세력을 떨쳤던 바로 그 왕씨 집안의 후예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6]

왕씨(王氏)는 본래 고구려의 귀족 성씨였다. 왕건 가문 이전의 왕씨였던 고구려인 및 고구려계 인물로는 왕고덕, 왕산악, 왕사례, 왕모중 등이 있었으며, 이 왕씨는 다름아닌 낙랑인 왕씨로부터 내려오는 가문이었다.

고(구)려 유민이 주류였던 패서 지역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로도 732년까진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직접 지배하는 군현으로 편제하지 못했고, 이후엔 군현을 편성하지만 호족연합시기의 초기 고려보다 밀도 높은 지방 지배를 자랑하던 통일신라가 유독 황해도 일대만 그렇게 못했기에 해당 지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자율성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있어서 더욱 수월한 환경에 있게 된다. 때문에 송악군이 속해 있는 패서 지역의 호족은 거의 모두 고구려계였으며, 평산(평주)[7] 호족인 박직윤[8]은 스스로 '대모달'(大毛達)이라고 칭했다.[9]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에게 '조선', '숙신', 변한의 땅을 차지하려면 왕건을 중용하라는 말을 전했다.[10]


3. 국호의 기원[편집]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시간이 흘렀어도 고구려계로서의 의식은 여전했고, 이들을 통합한 '일목대왕'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했다.[11] 이렇게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별도의 국가 체제를 갖출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혹은 하지 못한) 패서의 고구려 유민들과는 정반대로, 대놓고 국가 꼴을 갖췄던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철저한 탄압과 그 유민의 집단화를 경계한 조치 때문에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및 원신라 지역으로 흩어져 강제사민당해서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를 보면, 패서 지역 고구려 호족들의 특수한 정치적, 지리적 환경이 훗날의 고려 왕조 성립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때문에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도 더욱 원만할 수 있었는데, 신라 같은 경우 옛 백제 지역은 밀도 높게 직접 지배하던 지역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후백제 같은 경우, 그 시초 구성원 전원이 통일신라 체제에서 벼슬하던 자들이었기에 신라 입장에선 반군 중의 반군이라고 여길 정황이 충분했다. 하지만 패서 일대는 통일신라가 가장 강성할 때도 그다지 무리하게 직접 지배를 시도한 바 없었고 자치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던지라 신라말 혼란기 특유의 막장 지방민 착취도 정작 이들과는 영 상관 없는 얘기였고, 고려 건국 세력은 때문에 의외로 신라와 그렇게 원수질 일이 그다지 없었다.[12]

왕건의 먼 조상이 옛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사서상의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13], 후당 때 왕건이 공식으로 표방한 '장회무족'부터 시작해서 모든 정황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가리키고 있다. 문화적 계승으로 봐도 사례가 많이 보이는데 왕건의 청동상은 나체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의 전통방식이 사용되었고, 왕릉인 현릉엔 고구려 무덤처럼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분벽화에서의 사신도 양식 또한 계승하였다. 그리고 수도 개경에는 유화부인을 숭배하던 사당인 동신사가 유지되고 있었다.


4. 호경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편집]


왕건의 조상 중 《고려사》에 이름이 남은 자는 호경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호경이 아들 강충을 낳고, 강충이 아들 보육을 낳고, 보육이 딸 진의를 낳고, 그 진의가 고려로 온 당 숙종과 결혼해 아들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혼인해 왕건의 아버지 용건을 낳았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후삼국을 평정한 뒤에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왕건의 탄생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세계>에 도선대사의 유명한 예언이 있어 원문 그대로를 소개하면 이렇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14]

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66(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100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15]

3년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송악의 호족인 왕건의 가문은 대대로 돈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강충은 집에 1,000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왕건의 선대에 대해 고구려 유민[16]으로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 세력가였다고 추정한다.[17]

이들이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분명히 고구려 정체성을 가진 고구려 유민으로서 연속성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신라 치하에서 다른 신라 지역들과는 달리 패서 지역은 꽤 자치적인 분위기였고, 신라도 이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 행위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이들이 신라의 간접 지배 아래 있었기에 당나라나 발해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서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확보했던 것 또한 명약관화하다. 신라가 패강진을 개척하면서 신라인들을 사민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 시기는 고구려가 망한지 50년도 더 지나는 732년 이후의 일이었고, 패강진보다 훨씬 더 크게 원신라인들의 사민이 이뤄졌던 옛 백제 지역도 결국 그 정체성을 잃지 않은 걸 보면 패강진 개척으로 고구려성이 없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전 시기에 발해가 건국될 시점에서 오히려 백산말갈을 포함하여 당나라에 끌려간 옛 고구려인들의 탈주가 보다 규모가 컸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왕륭-왕건의 시기의 패서 호족들은 신라의 관직들을 받아오거나 자칭했고, 신라식 성씨를 사용하기도 했다.[18]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그 여파가 남아 신라식 성씨를 계속 차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9] 이는 독자적이고 강력한 중앙조직이 없어져 통치를 위해선 신라 중앙정부의 권위가 필요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신라의 영향력이 당과 발해의 영향력에서 이들의 고구려적 정체성과 독자성을 일정부분 지켜내준 방패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5. 출세가도[편집]


이런 환경에 있었던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대호족이었던 왕륭이었고, 나중에 후고구려의 궁예 왕이 초창기의 라이벌이었던 양길에 대항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 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한찬[20]을 넘어 계속 승진했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 개인의 능력도 상당했다.

다만 고려측 사료에서는 왕건을 얻자마자 궁예가 이상할 정도로 일선의 군사 지휘에서 바로 물러나며 젊은 왕건에게 총사령관을 위임한듯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정황상 개연성이 떨어지다보니 왕건을 부풀리기 위해 고려측의 역사 조작[21]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견훤은 노환으로 제대로 전투 지휘를 할 수 없는 60대 후반 말년까지도 직접 전장에 나섰고, 궁예 또한 왕건을 얻기 직전까진 자신이 계속 전장에 나서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민심을 얻었다. 어느 나라나 건국 직후에는 군주의 통치 명분과 정통성이 부족하기에, 대부분 군주가 일선에서 전투를 총지휘하며 다른 장군이 군부 내에 카리스마와 사적 인프라를 갖는걸 방지한다. 그런데 왕건을 얻자마자 무한한 신뢰를 주면서 모든 군권을 위임해 흡사 왕건이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킬 기반을 궁예 자신이 처음부터 알아서 만들어주는듯한 사료 상의 모습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유능하고 믿음도 가는 왕건에게 점점 군권을 위임하다가 결국 나중에 모두 위임했을 수는 있지만, 최소한 사료에 나오는 것보다는 이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평주, 정주, 황주 등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는 왕건 사후 혜종이 호족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정종, 광종이 대숙청을 벌이는 것으로 증명된다. 호족들은 통일이 된 후에도 엄청난 세력을 보유할 정도로 강했고, 태조는 결혼 외교에도 크게 의존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개인적인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호족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6. 나주 공방전[편집]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중요 지역인 무진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 금성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신하 시절 최고의 공적이었다. 이 때 빼앗은 땅이 10여 군현이었고, 그 중심지인 금성이 바로 지금의 나주다. 이 나주 지역은 견훤이 무진주에 자리잡았던 초기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23] 왕건은 그 빈틈을 잘 파고들어 나주 지역 호족 오씨의 딸과 정략결혼(훗날의 장화왕후)을 맺는 등 민심을 장악했다.

이 나주는 훗날 견훤이 탈환하기는 했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 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후)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바다에 밝았던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24]

왕건이 견훤의 907년 추풍령 일대 장악을 막지 못한 중대한 실패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법흥왕-진흥왕신라 상대의 역대 명군들이 적지 않은 자원과 인력을 투입해서 거의 완벽한 대백제 전선의 우주 방어막으로 만들어 놓았던 충청북도 남부와 경상북도 서남부 일대는 김헌창의 난 시기부터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유대 관계가 이상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며 견훤의 후백제군이 진격하자 왕건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어려움없이 견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다.[25]

907년 추풍령 일대의 옛 신라 요새들과 신라 정규군 등을 흡수한 견훤이 908년에 작심하고 나주를 급습하여 장악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909)에 왕건이 이끌고 온 수군과의 해전에서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다시 나주를 빼앗기고 만다. 어찌나 타격이 컸던지 910년에는 견훤이 처음 거병했던 무진주를 이번에는 고려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하는데, 이때는 견훤의 사위기도 한 지훤이 분전하여 고려군을 육전에서 격퇴하여 무진주를 보전한다. 이 당시 고려와 후백제의 국경선은 광주 복룡산과 나주 남평읍 일대에서 형성되었는데, 대체로 다른 국경선은 옛 침미다례와 거의 일치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광주 일대는 서쪽 상당 부분을 고려가 파먹어들어간 반면 후백제는 오늘날 나주 동쪽 절반을 석권하면서 깊이 밀고 들어간 기이한 형세였다. 고려는 무진주를, 후백제는 나주 금성을, 즉 서로 각자의 지역 중심지를 밀어버리려고 군사력을 운용하다보니 전통적인 경계와는 약간 다른 국면이 형성되었던 것.

913년에는 잠깐 왕건을 수도 철원으로 불러들이고 나주에는 왕건의 장수 시절 부장이었던 김언(金言)을 대신 지휘관으로 앉혀둔 적도 있지만, 왕건이 빠졌다는 걸 안 견훤은 곧바로 나주를 공격해 잠시 서남해의 제해권을 되찾기도 했다. 결국 궁예는 왕건밖에 해결사가 없다고 생각해 914년 다시 전함 70척에 2,000명의 병력으로 왕건에게 나주를 되찾게 했다.

왕건은 수군을 이용한 나주 전역뿐 아니라 내륙 전선에서도 활약해서 견훤의 출신지인 상주 전투에서 견훤과 여러차례 싸운 끝에 승리한 것을 필두로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궁예로부터 에 다음 가는 지위인 파진찬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파격 승진을 받은 셈이다.


7. 궁예의 폭정[편집]


시중이 되고 나서 왕건의 인기는 정점을 찍었는데 궁예는 이 때부터 왕건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궁예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고구려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옛 백제에 가까운 청주 출신으로 철원을 채우고 중용했는데 태조 왕건에서 나왔던 유명한 아지태 일화가 이 때 등장한다. 아지태가 궁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입전, 신방, 관서 등을 반역죄로 모함하여 그들이 하옥되자 왕건이 이를 재조사하여 진상을 밝혀 궁예에게 알리니 세 사람은 무죄 석방되고 아지태는 도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의 막장 행보[26]가 더더욱 거세지고 궁예가 서서히 자신에게까지 의심을 가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자 위험을 직감했다. 결국 시중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일단 멀리 떨어지는게 상책이라 판단해 '근래에 나주 쪽의 정국이 불안하니 과거 나주를 빼앗았던 자기가 가서 지키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시중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후 한찬(수군 대장군)으로 제수받아 나주로 가 궁예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후에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큰 세력을 가진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27] 이 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옆의 탁자를 슬쩍 걷어차고는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괜히 부인하지 말고 순순히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 모의를 인정하고 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 중 황금 안장과 황금 굴레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엇갈리는데 대체적으로 궁예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타겟으로 하여 무언으로 경고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의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다.[28]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 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8. 고려 건국[편집]


그러던 상황에 후일 고려의 4인 1등 개국공신이 되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

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29]

이때 아내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했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다.

결국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태봉국 철원성 포정전에서 '고려' 건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919)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하고 자신의 잠저 자리를 본궐로 증축했다. 정전을 '천덕전'(天德殿)이라 하고[30] 자신이 지은 발어참성을 도성으로 둘렀다.[31]

전주(前主)[32]

4군(四郡)[33]의 땅(土)이 붕괴(崩)하던 시기(時)에 구적(寇賊)을 없애 봉강(封疆)을 늘렸다. 그러나 아직 해내(海內)[34]를 합치치 못했는데 민중(衆)을 차갑고 난폭하게 다루니 간사함를 도리로 삼고 모욕함을 기술로 삼았다.

번뇌를 주고 부담을 늘리니 사람은 지쳐가고 땅은 허해졌다. 그런데도 궁실(宮室)을 늘리고 싶어하고 제도(制度)를 거치지 않으니, 노역이 멈추질 않고 원성이 뒤따라 커졌다. 계속하여 연호를 훔치고(竊號) 존호를 칭했으며(稱尊), 를 죽이고 아들을 죽였도다. 천지(天地)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분노하니 궐서(厥緖)[35]

가 무너졌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朕)은 군공(群公)의 정성스런 마음(心) 덕분에 구오통림(九五統臨)의 극(極)[36]

에 올랐다. 풍속을 옮기고 부드럽게 할것이며 다같이 새로움을 추구할 것이다. 개철지규(改轍之規)를 지킬 것이며 벌가지칙(伐柯之則)을 깊히 지킬 것이다. 군신(君臣)이 어수지환(魚水之歡)처럼 지낼 것이며 하해(河海)[37]와 안청지경(晏淸之慶)을 지낼 것이니라.

이로써 내외군서(內外群庶)들은 짐(朕)의 마음을 알지어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발췌. 태봉국 철원성에서 즉위 후 내린 첫 조령(詔令)이다.


왕건과 그의 자손들은 끝내 궁예의 왕릉을 건설해주지 않고 궁예한테 시호도 지어주지 않았다. 훗날 왕건에게 투항하여 나라를 바친 견훤, 견신검 부자도 궁예와 비슷한 꼴을 당하는데 사후에 왕릉도 건설되지 않았고 시호도 받지 못했다. 같은 망국의 군주임에도 경순왕 김부는 궁예, 견훤, 견신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우를 받았는데 고려는 그의 왕릉을 건설해주고 시호도 지어주며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9. 후백제와의 대결[편집]


고려를 건국하는 동시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집권 초기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다. 자신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꽤 컸던 것. 대표적으로 청주의 친궁예 세력 등이 그러했다. 일단 이들을 잘 회유시켜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적국인 후백제의 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견훤은 한참 친궁예 호족의 반란이 빗발치던 초창기 고려를 공격하지 않고 왕건의 화친 제의에 화답해 때를 놓쳐 버린다.

그러나, 920년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삼국의 균형이 깨지고 후백제에 뒤쳐질까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무력 충돌을 감행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38]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견훤이 후백제에 가 있는 고려의 인질 왕신을 보복으로 죽임으로써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다.


9.1. 공산 전투[편집]


920년 신라 경명왕 박승영과 처음 교류를 튼 이후, 왕건은 과거의 궁예나 라이벌 견훤이 신라를 적대한 것과 달리 서라벌의 신라 박씨 조정과 되도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천하의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심지어 925년에는 고울부 호족 능문이 알아서 고려에 내투하려 했지만 왕건은 고울부가 서라벌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온다는 것도 거절했을 정도였다. 능문을 받아주면 당장 국력에 도움은 되겠지만 신라 조정 및 전국의 친신라 호족들에게 왕건이 영토 야욕을 가지고 신라를 범하려 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나•려 양국이 연합 작전으로 후백제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927년 견훤은 포위망을 우회해 서라벌을 기습 공격해 허를 찔렀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천천히 진격하며 잔악한 백제군을 무찌르러 가는 정의로운 고려군 구도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그 자신이 신라 정규군 출신이니만큼 일대 지리에 밝았을 견훤이 재정비를 하여 공산 일대에 매복을 하고 고려군을 끌어들일 시간을 주게 됐다. 그리고 견훤의 의도에 제대로 걸려든 고려군은 크게 당하여 수적인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무너진다. 하지만 반대로 왕건이 견훤을 팔공산으로 유인하기 위해 싸우다가 거짓으로 도주하는 작전을 쓰자, 이걸 사전에 예상한 견훤과 후백제 측은 팔공산 안에 있던 왕건의 매복군 바깥에 역매복군을 둔 다음 거짓으로 왕건의 작전에 말려들어가 추격하는 모양새를 취하다가 왕건군이 팔공산 안에 모두 들어가자 역매복군과 추격군이 기습적으로 역습을 가해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39]

어쨌든 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자신의 직속 기병 5,000명을 거의 다 잃었고, 김락이 이끌던 군대, 고려를 지원한 호족들의 군대, 강공훤이 이끌던 10,000명까지 더해 추정상 20,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과 김락, 전의갑 전이갑 형제, 손행, 호의, 전락, 김철 8명의 장수들을 모두 잃는다. 특히 신숭겸과 김락은 초한전쟁 때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의 장수 기신처럼 자신들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백제군을 유인하는 희생을 하며 왕건을 겨우 탈출시켰다.[40]

필사적으로 도주한 왕건의 행보로 인해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9.2. 수세에 몰린 왕건[편집]


여기에 고려 건국 후 국내 상황 역시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며 내전이 발생한 것.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인 웅주, 운주 등 10여 주현이나 매곡성공직 등은 후백제로 귀부해버렸고, 그 외에도 이흔암, 환선길 등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왕순식처럼 자립해버린다.

왕건의 신정권이 사분오열될 상황에 처했으나 다행히 고려 건국 직후, 친궁예적인 호족들과 장군들의 반란들은 신속히 진압되어 명주의 김순식과 옛 백제 지역의 공직이나 운주 근처의 여러 고을들이 후백제에 넘어간 것을 제외하면 신속하고 원만히 해결이 되었으나 공산 전투 대패 후에는 고려의 불리함을 보고 투항하는 사태들이 생겨났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928년 11월 오어곡성의 일로, 이때 양지, 명식 등 장군 6인이 후백제에게 투항한 사건이다. 이때 왕건은 후백제의 공격으로 투항한 오어곡성의 장군 양지, 명식 등 6인의 가족들을 체포해 궁궐에서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조리돌린 후, 이들을 저자거리에 끌어내 모두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서거정의 《동국통감》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적혀 있다.[41] 다만 왕건의 인덕과 뛰어난 호족 관리술 덕분에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후의 후백제의 경우처럼 호족들과 관리들의 대규모 투항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 전투 대패 이후,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전투를 수 차례 벌였으나 공산 전투에서 입은 왕건의 피해가 워낙에 컸기에 이 피해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아 929년 12월에 벌어진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의 대승리 이전까지 3년여간을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42] 이외에도 자신이 친정에 나서지 않은 전투들인 강주, 오어곡성과 나주 함락, 홍술이 지키던 의성부 함락, 하지성의 원봉은 후백제에 항복해버리는 등의 패전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9.3. 대광현의 귀순[편집]


926년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 의한 전격전으로 발해가 멸망한 후 태자 대광현이 100,000명이 넘는 발해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대광현에게 '왕계'(王繼)[43]란 이름을 주어 백주[44]에 거주하게 해주니, 발해유민들의 유입은 고려의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45]


9.4. 고창 전투에서의 역전[편집]


고려와의 싸움에서 연승하며 기세를 휘어잡았다고 생각한 견훤은, 마침내 고창(오늘날의 안동시)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려군을 패퇴시켜 왔으며, 고창 지역은 경상도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군 최후의 보루였다. 929년 12월, 견훤은 3,000명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고창을 포위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있던 왕건은 차라리 고창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게 된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명장 유금필이 나서서 왕건에게 고창을 구원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견훤이 서라벌에서 경애왕 박위응에게 저질렀던 만행에 분개해있던 고창의 호족들인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왕건에게 협력해왔다. 이들 '삼태사'들은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었는데,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들이다. 이들은 대대로 고창에 살아왔었기 때문에 고창의 지리에 매우 익숙했으며, 고려군에 군량을 지원했기에 막강한 지원 전력이 되었다.

결국 929년 12월~930년 1월에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서도 나오지만 대패로 인해 후백제는 전사자만 8,000여명을 내어 후백제가 멸망한 전투인 일리천 전투의 사망자 5,700여명을 훨씬 능가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상승세가 꺾인 후백제는 고창 전투 대패 직후 견훤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후백제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순주를 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한 뒤 순주를 약탈하고 돌아간 사건과 932년 9월과 10월에 상귀와 상애 등의 장군들을 시켜 대규모의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수도 개성 근방과 황해도, 평안남도 일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약탈하고 이후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해 고려에 큰 피해들을 준 사건을 제외하면 모든 전투들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고창 전투의 경우,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중 하나였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호족 정책이 그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46], 장정필이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이때 하사한 안동김씨는 시조가 다른 기존의 안동김씨와 구별하여 '신(新) 안동김씨'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들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이렇게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이야기가 되나 《고려사》에는 이들의 독립된 <열전>이 전혀 없고[47] 다만 《고려사》 <지>의 -경상도 안동부-의 설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패시켰을 때 이들이 전공을 세워서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왕건의 경우 유금필,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박수경, 최응 등의 중앙 조정에서 일하는 자신의 관리들보다 지방 호족들에게 더 쉽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상부로 부르는 면이 많았다. 일례로 왕건은 몽웅역 전투에서 그 지방의 아전인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했다는 그 한 가지의 이유로 그 사람에게 대광의 벼슬을 내린 반면 박수경의 경우, 고려 건국 초창기에 왕건의 명으로 견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데 파견되어 견훤의 군대로부터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조물성 전투에서는 다른 장군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어 이후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도착할 때까지 왕건군이 버틸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후 발성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기에 처하자 사력을 다해 싸워 왕건을 구하고, 이후 일리천 대전에 투입되어 후백제 멸망에 공을 세워 한씨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왕건 생전에 대광으로 승진한 적이 없다.

이는 최응도 마찬가지로 그는 왕건 정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문신이어서 왕건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뛰어난 신하들도 최응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극찬을 했고, 고려 현종 때 왕건의 신하들 중 문신으로서는 유일하게 태조 왕건의 공신으로 공신각에 배향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살아 생전에 왕건에게 대광 벼슬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죽은 직후에 '원보'(元甫)로 추증하고 이후로 계속 추증해 결국 대광의 직까지 올라갔을 뿐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고창 전투의 승리는 그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고 무조건 단정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의 상승세와 매곡성의 성주인 공직의 투항으로 인해 충청남도 남부 지역의 정보를 잘 알 수 있게 되자 공직의 안내로 932년 7월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섰고 견훤은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왕건이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선 틈을 타 932년 9월과 10월 부하 장수 상귀와 상애 등으로 하여금 개경 근방과 황해도, 평안남도 일대를 공격해 파괴하고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하여 왕건은 고려 건국 후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1년 전에 참소로 인해 곡도(지금의 백령도)로 귀양갔던 유금필이 자신의 귀양지인 곡도와 인근의 포을도 등 2개 섬에 배치되어 있던 해군들을 급히 수습해 이들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하자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된다.[48] 유금필이 이때 이 2개 섬의 해군만으로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이후 후백제 해군이 다시 고려의 영토와 바다를 침략해 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935년 4월(《동국통감》의 기록.) 왕건의 명령으로 유금필이 929년에 고려가 빼앗겼던 나주, 목포, 진도와 인근 섬들을 다시 재탈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역습까지 가능한 상황으로 수군을 재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모산성 공격에 나선 왕건은 5개월만인 같은 해 11월인 932년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9.5. 신라를 구원[편집]


견훤은 이미 927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킨 후 신라 내에 친백제 정권 수립을 위해 경순왕 김부를 옹립했지만, 경순왕은 견훤의 뜻과 다르게 여전히 친고려적인 성향을 계속해 보였고, 이에 분노해 아들 견신검을 시켜 933년 5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기습적으로 침략해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강제 병탄하려고 시도했다.

고려는 927년과는 달리 뒤늦게나마 이 사실을 알고, 당시 신라의 의성부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시켜 신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이때 유금필은 사정이 급박했던 관계로 장사 80명을 선발, 결사대를 조직해 신라 수도 경주를 지키러 출발했다. 양측은 사탄에서 부닥치게 되었지만 유금필과 부대원들의 위용에 눌린 신검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으며, 이후 유금필이 돌아가는 길에 자도에서 신검의 군대와 맞붙었지만 유금필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후백제군은 금달, 환궁 등 장군 7명이 포로로 잡힌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극찬했다. 이후 개선한 유금필을 맞이한 왕건은 옥좌에서 내려와 유금필의 손을 잡으며

'그대가 세운 전공은 옛적에도 드물었으니 내가 이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유금필은

'나라의 어려움에 자신을 잊고, 나라의 위급함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도리인데, 성상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라고 왕건의 극찬을 물렸으며, 이에 왕건은 유금필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49]


9.6. 운주의 승리와 후백제의 내분[편집]


이와 같은 상승세를 힘입어 고려는 934년 9월 후백제에게 빼앗겼던 운주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왕건이 친정했다. 이에 견훤은 이를 막기 위해 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친정에 나섰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사기충천해진 고려군과 이미 후백제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된 백전백승의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 유금필[50]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견훤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눈치채 왕건에게 여기서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서로 화친할 것을 제의했지만 견훤의 약세를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의 허락을 얻어 강한 기병들을 동원해 후백제군이 진을 치기도 전에 돌격해 3,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후백제는 후백제 최고의 용장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상달, 최필과 책사 종훈, 견훤의 어의(御醫)로 추정되는 의사 훈겸이 사로잡히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퇴각했으며 이 전투 이후 웅진 이북의 30여 군이 일제히 고려에 투항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견훤은 68세에 이른 고령의 나이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고 자신이 정한 후계자에게 후백제의 제위를 물려줄 결심을 하게 된다. 호족 간 정략결혼 하면 무려 29명의 부인을 둔 왕건이 유명하지만, 견훤 역시 여러 호족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해 10명의 아들[51]이 있었고, 그 중에서 견훤은 4남인 금강을 유독 총애해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견훤은 후계자 선정 작업에 치밀하지 못한 처신으로 맏아들이었던 견신검에게 황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된 견훤은 곧 금산사를 탈출해 한때 적이었던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폐하께서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9.7. 견훤의 투항과 후삼국 통일[편집]


왕건은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로, 이때는 손위의 큰형님이나 작은 숙부 정도로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헌데 귀순 후에는 표면적인 호칭을 상보라 했을 뿐, 진짜 적국의 전왕 + 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 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노인인 견훤에게 재산을 풍족히 베풀어 주고 궁을 집으로 삼아 살게 하는 등 숫제 태상황급 취급을 해 주었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 부'가 아닌 '어르신 보'로 새겨 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보다 못하지 않음" 정도의 뉘앙스. 이렇게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도 그에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1,000년 왕조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다.

'본국(本國)은 오래 화란(禍亂)을 겪어, 역수(曆數)가 이미 다했습니다. 다행히 천자의 빛(天子之光)을 보게되었으니 부디 정신의 예(庭臣之禮)를 차리고자 합니다.'

- 신라 경순왕의 상서(上書). 《보한집》 <권상> 기록.



10. 후삼국 통일과 말년[편집]


이 때 견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936년 왕건이 발해계 세력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9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멸망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후백제의 병력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후백제 또한 성에 의지하는 등 방어적으로 임하지 않고 고려군을 요격하러 국경지대에서 야전에 나선 걸로 봐서, 병력을 고려군과 비슷한 규모로 동원해 자신들에게도 승산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다만 견훤이 선봉에 서서 장졸들을 호령하자 백제군이 저절로 항복해오며 붕괴했기 때문에 병력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신검(神劎)이 스스로 멸망한 것은, 그의 죄가 천지에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왕(羅王)이 스스로 손님이 되어 복종한 것은, 성덕이 멀리까지 퍼졌기 때문입니다. (생략)[52]

지방(智邦)의 벼슬아치들이 상국(上國)에 모이고, 역자(逆子)의 병사들은 남방(南方)에서 와해되었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이웃의 다급함을 듣고 구하러 가셨으니 인용(仁勇)입니다. 인왕(隣王)[53]

이 와 붙으니 친족처럼 대하셨으니 지신(智信)입니다. 훤(萱)의 소심함과 혐오스러움을 잊으시고 은혜와 믿음을 주셨으니 관인(寬仁)입니다. 모든 역자를 주살하시고 남은 백성을 품으셨으니 의명(義明)이요 인합(仁洽)입니다.

이를 대대로 전해지는 제왕(帝王)의 규범으로 삼으면, 어떠한 자손이 만세를 전하지 않겠습니까?' (생략)

- 《보한집》 <권상> 중 발췌. 최원(崔遠)의 표(表). 후삼국 통일 후 당대에 올려진 표 중 유일하게 내용이 남아있는 표문.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다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나주 출신의 오씨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여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 왕무를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54]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크게 중용했던 재상 왕규박술희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했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943년 붕어했다.[55]


11. 붕어와 장례식[편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염상(廉相)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 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遺詔)[56]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와 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왕께서는 잠시 웃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나셨다.[57]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라고 하고 말을 마친 후 잠시 뒤에 훙서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26년이며 나이는 67세였다.

《고려사》 <태조 세가> 태조 26년 5월 29일


《고려사》 <지> -국상-조와 《고려사절요》엔 태조 붕어 이후 정윤 왕무가 치른 장례가 기록되어 있다. 5월 29일, 태조가 신덕전(神德殿)에서 붕어하자 태자(太子), 제왕(諸王), 종실(宗室), 근신(近臣)들은 땅을 치며 울었다. 이후 개경의 모든 관료들은 내의성(內議省) 대문 앞에 모였고 그들 앞에서 대상(大相) 왕규(王規)가 "내외서료(內外庶僚)들은 모두 동궁(東宮)의 처분을 따르라."는 유명(遺命)을 발표했다.

5월 30일, 유명에 따라 혜종이 즉위한 뒤 백관과 함께 슬퍼하였다.

6월 무신일, 상정전(詳政殿)에서 태조의 천붕을 선포하고 학사(學士) 김악(金岳)[58]이 유조(遺詔)를 선포했다.

6월 기유일, 상정전에 재궁(梓宮)을 안치하고 서쪽 계단에 빈전(殯殿)을 세웠다.

6월 경오일, 상정전에서 마지막 제사를 거행했다. 태상경(太常卿)[59]이 <시책>(諡冊)을 올려 시호'신성대왕'(神聖大王), 묘호'태조'(太祖)라 했다. 제물을 바칠 때 행예빈령(行禮賓令) 왕인택(王仁澤)이 소, 양, 돼지를 바쳤다.

6월 임신일, 왕릉에 안장되었으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왕릉의 제도는 유조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졌으며 먼저 죽었던 신혜왕후 유씨가 같이 합장되었다.[60]

[1] 914년에 궁예가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왕창근의 고경참문 사건 때 왕건이 '왕 시중'이라 불리고 있어 이후에 재임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 고구려계 호족이었던 박적오는 신라의 후작이었던 찰산후(察山侯)였으나 호경과는 달리 박씨였다.[3] 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4] 귀족 혹은 말 그대로의 큰 씨족.[5] 대조영은 당대에 유명했으니 당연히 당대 기록에 속말말갈이란 기록도 있으나, 왕건의 선대는 그 당대에는 그저 듣보잡에 불과했고, 이후 수백년이 지나 백산말갈 자체가 패서에 있었던 기존의 다른 고(구)려인 집단 및 소수의 신라인 집단과 융합하여 패서 호족 집단으로 거듭나 없어졌기에, 왕건에 대해 언급하는 중국측 기록은 왕건을 말갈 운운할 것 없이 고(구)려인으로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6] 다만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선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대단히 강화시켜주는 대목이기에 탄성을 지를 법도 하지만, 정작 고려 왕실은 왕건의 선대가 그냥 평로치청번진에 살았던 평범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왕씨였던 것이 영 맘에 걸렸던지 선조가 당숙종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저질러 빈축을 사게 된다.[7] 현 황해도 평산군.[8] 찰산후 박적오의 아들, 박지윤의 아버지.[9] '대모달'은 고(구)려의 최고위 무관직 중 하나다.[10] '변한'은 신라 지역을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변한의 땅을 차지했기에 당시 역사관에선 변한=신라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까지는 삼한에 대한 역사지식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제를 가리킬 때 변한이라 하기도 했다. 또한 신라는 일관적으로 진한이라 일컬어졌기 때문에 그냥 삼한을 포괄한단 뜻을 나타내기 위해 그 중 가장 변방이었던 변한을 대표로 내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은 고구려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패서 일대(관서+해서지방)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땅을 점령하며 그 일대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숙신'은 말갈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변방의 산악지대이자 말갈족(퉁구스계의 진짜 말갈이든 예맥계 위말갈이든)의 거주가 잦았던 관북+관동지방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이설이 있긴 하나 확실한 것은 관념적으로 한반도를 아우르기 위해 위 지명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1] 지금은 궁예가 처음 칭한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한다. 이는 편의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궁예의 흔적을 지우고자 한 의도이기도 하다.[12] 물론 정작 궁예는 이 대목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긴 했다. 견훤보다 더 막가는 불필요한 반신라 정책에 고려 국호를 폐기하는 행태라든지. 패서 호족에게는 그 어느 면이든 맘에 들게 없는 정책방향이었다. 이 지경이면 오히려 궁예가 그렇게라도 오래 정권을 유지한게 신기할 정도.[13] 중국 송나라의 사서인 《고려도경》엔 고려의 왕씨(王氏)가 원 고구려의 대족(大族), 즉 귀족이라는 기록이 있다[14] 壬方, 북쪽 지역.[15] 乾符, 874년 ~879년까지의 연호다.[16]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강목》은 작제건을 고려 사람으로 특정지었다.[17] 작제건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즈음, 남쪽에서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시아의 삼각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18] 대표적인 예로 박(朴)씨 성을 가진 고구려계 호족인 박직윤이 있다.[19] 김행파김치양이 속했던 동주 김씨 가문이나 정씨 성을 사성받았다고 전해지는 해주 정씨 등이 있다. 다만 정씨의 경우는 최씨와 더불어 이미 중국에서도 많이 사용되던 성씨였기에 중원문화를 도입한 영향일 가능성도 크다. 사실 성씨 사용 자체가 원래 한반도에는 없었던, 중원문화를 도입하며 삼국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기에 김씨, 박씨처럼 신라에서만 특징적으로 사용했던 성씨(김씨의 경우는 가야권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를 제외하고는 중원에서 자주 사용하던 성씨를 가져와 삼국 모두 겹치는 경우가 많아(일례로 고씨, 이씨, 왕씨는 고구려, 백제 모두에서 확인된다. 이씨, 손씨는 고구려, 신라 모두에서 확인된다. 이씨, 한씨는 백제, 신라 모두에서 확인된다) 오로지 신라의 영향만으로 놓고 보기엔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20] 현 해군 대장급[21] 즉, 왕건의 초기 전공들은 사실은 궁예가 총사령관으로 나선 것 아니었겠냐는[22] 하지만 삼국사기 궁예전을 보면 궁예는 왕건을 얻은 이후에도 한동안 왕건의 조력없이 자신이 직접 군지휘를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삼국사기 궁예전의 그 부분을 그대로 올리면 이렇다. 이에 저족(猪足), 생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쳐부수어 군세가 매우 불어났다.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3년 병진(서기 896)에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서기 897)에는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길은 그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충북 충주) 등 30여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를 알아차리고 먼저 양길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그리고 삼국사기 912년의 기록을 보면 왕건이 아닌 궁예가 덕진포에서 견훤과 싸웠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궁예가 이때 직접 해군을 거느리고 견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가 있음.)궁예가 왕건 등장 이후 바로 친정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23] 왕건이 쳐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견훤은 901년 나주를 '약탈'했다고 기록될 정도로, 복속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동반되었다. 단, 전라남도 지역이 과거 마한 소국들이 오래 남아있다가 백제에게 뒤늦게 무력으로 편입된 지역이기 때문에 백제 유민 의식이 약했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관념이다. 이 대목에서 자주 언급되는 침미다례는 전남 전체는 고사하고 전남 1/3만 겨우 장악한 군소 세력에 불과했고,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남 중동부, 그리고 그 일부가 소가야 및 대가야의 영향력에 잠깐 들어갔었던 전남 해안 지역은 침미다례와는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으로 완전 별도의 세력이었다. 그나마 침미다례 일대가 백제와 전면적인 무력 대결을 벌였던 때는 근초고왕 시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다른 전남 일대와는 달리 침미다례 일대는 약 30년 정도 편입 시기가 늦었지만 직접 지배 시기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120년은 넘는다. 이 일대가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은 백제 유민 의식이 있고 없고와는 전혀 다른 문제가 원인일 개연성이 크다. 자세한 상황은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24] 후백제가 제해권보다 더 중요시한건 동쪽 내륙, 즉 신라였다. 후백제는 기세등등한 후고구려보단 신라를 굴복시켜 육지 상에서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다. 실제로 후백제는 신라 최후의 보루 대야성을 집요하게 공격해 2번 실패하고 3번만에 뚫은 후 곧 경순왕을 강제로 옹립하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죽음 위기까지 몰아넣는 등 상당히 선방한다.[25] 아무래도 견훤이 해전보다 육전에서 더욱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던게 이유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떻게 말해도 견훤의 군사적 재능과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역시 크다. 이 지역마저 고려가 장악했거나 신라 왕실이 어떻게든 포섭해서 유지했다면 후삼국시대 자체가 아마 성립이 되지 않았겠지만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26] 정확히는 왕권 강화를 위한 신하 숙청 시도들이지만 똑같은 행보를 보였던 왕건의 두 아들들과는 달리 왕권 강화 목적을 씹어먹는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광기에 찌들었던 탓에 외려 백성들이 이런 중앙 집권 정책에 반발할 지경이 되었다.[27] 심지어 왕건이 호출을 받고 입궁했을 때 궁예는 처형했던 신하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반역죄의 증거가 없는가 점검하고 있었다고 한다.[28]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29] 과연 왕건이 정변을 망설였다는 것이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수십년 뒤의 북송의 태조 조광윤"조광윤은 가만히 있었는데 부하들이 술 먹이고 황위에 앉혀놓았다"고 말도 안되는 구라를 친 것에 비하면 현실성은 어느정도 높은 편이다. 물론 쿠데타 수장을 미화하기 위해 거절했다든가, 사양했다든가 라는 윤색이 충분히 가능한 시절이었고 왕건이 속내와 다르게 주저하는 척을 했다해도 이상하진 않지만 공신책봉 교서 대로라면 쿠데타군의 주축은 왕건의 지역기반인 패서호족과 전혀 상관이 없는 궁예 직속 출신 중앙군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궁예를 섬긴 경력이 짦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패서호족으로서 궁예 밑으로 들어온 인사였는데다가, 당시 궁예는 패서호족이라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감시 통제를 해서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하는 중이었으므로 단지 군부에서 인격이나 능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추대되었을 가능성도 크다.[30] 전각의 뜻은 '천자의 덕.' 정전은 제8대 현종 대에 회경전으로 변경된다.[31] 발어참성은 현종 대에 황성으로 바뀐다.[32] 왕건은 궁예를 무조건 '전주'로만 불렀다.[33]한사군을 의미한다.[34] 천하(天下)의 다른 말.[35] 세상의 질서.[36] 유교 경전 《주역》을 인용한 것으로, 제위(帝位)를 의미한다.[37] 천하(天下)의 다른 말.[38] 당초 조물성 전투는 여러 사서들에서도 나오듯이 후백제군이 매우 강해 고려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때 왕건은 자신의 친정군을 제외한 전 군대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상군과 중군이 모두 패하고, 박수경과 은영이 지휘하는 하군만 승리해 겨우 버티고 있는 사이에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달려오면서 전세가 바뀌게 한다.[39] 이 반대 이야기의 근거 자료 출처는 이도학 교수 저의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211P~213P.[40] 다만 공산에서의 대패 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왔다. 그는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이었고 궁예가 독립적인 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때문에 궁예를 몰아낸 왕건과의 관계가 불편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왕건을 찾아 온 것이다. 사실상 김순식의 왕건 지지 선언이었던 셈. 이를 보아 통일신라 시절 북부 3주였던 지역의 호족들은 견훤의 지나친 만행에 오히려 왕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겠다고 판단한 걸로 보인다. 패서 호족들은 옛 백제 유민과는 달리 신라 왕실과 그렇게 척질 일이 없었던 것도 여기서 다시 특기할 일이다. 김순식은 오랫동안 궁예 충성파였는데,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자 이에 분노하여 대놓고 반기를 들어 전면전까지 하려 들자 왕건도 무시하거나 맞불을 놓으려고 하지 못하며 굉장히 경계했다. 그나마 아버지 허월의 설득으로 전면전은 안 일어났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노선으로 왕건과 대립하였다. 귀순 후에는 후삼국 최후의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서 자체적으로 1만 군사를 동원한 게 괜히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경순왕도 즉위 초기에 백제 눈치를 보다 결국은 고려로 갈아탔으며, 고창 전투에서도 그 일대 신라 호족들이 왕건의 편을 든 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 전투로 이어지는 전역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전역이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으며 그 결과 후백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신라 왕실 및 아직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는 경북 동부, 경남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것은 반대로 후백제 입장에서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기회였을지 모른다. 아무리 신라가 견훤의 태세에 실망했다고 해도 고려 국왕인 왕건이 죽었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건이 전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사일생으로 끝내 살아 돌아왔으니.....
[41]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이 이때 삼년산성의 성주와 오어곡성의 호족들의 가족들 모두를 체포해 궁궐의 뜰에서 백관들이 보는 가운데서 철퇴로 모두 쳐죽이고, 죽은 시신들도 산에 버려 산짐승들과 새들의 밥이 되도록 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나오지만 해당 드라마의 나레이션에서도 나오듯이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4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나온 삼년산성 전투와 그 이후 발성 전투에서 왕건은 친정을 단행했지만 연달아 패해서 공산 전투와 마찬가지로 죽을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유금필과 박수경의 구원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43] 국성인 왕씨를 성씨로 하고, '발해를 잇는다'는 뜻으로 '이을 계' 자로 이름을 주었다.[44] 白州. 현 황해도 연백주.[45]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왕건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의 일로,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의 일로,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46] 원래 이름은 김행인데 고창 전투에서 특히 큰 공을 세워 왕건이 권씨 성을 하사했다.[47]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기전체 역사서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중요한 인물들은 독립된 개인 <열전>을 남긴다. 《고려사》에서는 이들 '안동 삼태사'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윤선, 흥달 같은 인물들도 개인 <열전>이 있는데 이들 '안동 삼태사'의 독립된 개인 <열전>이 없다.[48]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서는 유금필이 이때 후백제의 해군을 대파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단지 유금필이 곡도에서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곡도와 포을도 2개 섬의 해군을 수습해 이를 막을 수 있게 해놓았다라는 이야기만 있다.[49] 자도 전투의 유금필의 전공에 대한 왕건의 연이은 극찬은 《고려사》 <유금필 열전>과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 나온다.[50]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과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2월 13일 신축 2번째 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고려의 공신·충신·명장 등을 왕씨의 제사와 함께 제사하도록 하다'라는 기록들을 보면 왕건이 견훤을 여러 번 이기고 삼한을 통일한 것은 모두 유금필의 공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현대의 많은 국사학자들도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것은 유금필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51] 《이제가기》에는 9명이라 한다.[52] 원문이 생략되어 있는데, 《보한집》은 전체 글을 싣지 않고, 일부분만 발췌했다.[53] 이웃나라의 왕. 경순왕을 의미.[54] 그러나 왕건이 그동안 중첩해 왔던 정략결혼 및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택은 결국 고려 초기 혼란의 한 원인이 되었고, 특히 혜종 본인은 본인과 아들 흥화군까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55] 다만 <훈요 10조>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해당 문서로.[56] 천자가 죽기 전 남기는 마지막 명령(詔). 제후는 '유교'(遺敎)라고 한다.[57] 사실 관련 기록이 여기서 완전 끝나는 건 아니고,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500년 후 이성계조선을 건국하면서 왕씨 몰살을 했을 때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화를 내었다고 기록되있다.[58] 원 신라 사람으로 후백제로 넘어갔으나 백제 패망 후 고려로 넘어가 왕건에게 중용되었다. 왕건의 유조를 직접 듣고 받아 적은 신하이다.[59] 국왕의 제사, 묘호와 시호를 담당한 태상부(太常府)의 장관이다. 정3품 급이었다.[60] 왕건과 신혜왕후의 재궁은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여몽전쟁을 치르며 유골이 적에게 능욕당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 등지로 여기저기 이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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