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안도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에는 [[고조선]] 땅이었다가 [[낙랑군]], 다시 [[고구려]]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안동도호부]]가 됐다. 고구려 땅을 대부분 찾은 후에 [[발해]]가 차지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에는 두 나라 모두 중심지가 평안도 쪽과는 거리가 멀었고,[* [[북한]]의 국보 목록을 봐도 [[발해]] 관련 국보는 거의 없다. 발해 중심지는 [[고구려]]보다 훨씬 북동쪽에 있었다.] 황량한 변경, 국경지대에 가까웠다. [[후삼국시대]] 초 평안남도의 남부를 [[궁예]]가 편입하였고, [[왕건]]이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며 평안남도 대부분을 수복하는 등 점차 되찾아나가 북계(北界)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 간섭기]]에 북계가 [[최탄]]의 난으로 [[원나라]]에 넘어갔으나 결국 반환받았다. [[조선]] 성립 당시 [[중강진]]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여진족]] 땅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 영토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45권, [[세조(조선)|세조]] 14년 1월 5일 [[병인년|병인]] 2번째기사 [[1468년]] [[명나라|명]] [[성화제|성화(成化)]]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평안도를 3도로 나누고 각기 절도사를 임명하다''' >----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극배(李克培)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경(卿)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삼고, 김견수(金堅壽)를 평안서도 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로 삼고, 황사윤(黃斯允)을 평안동도 절도사(平安東都節度使)로 삼으니, 이 동봉(同封)한 사목(事目)을 살펴서 시행함이 옳겠다. > >'''본도(本道)를 이제 나누어 3도(三道)로 하고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는 것은, 본도의 도리(道理)가 막혀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절도사로는 먼 데를 제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함경도|함길도(咸吉道)]]도 또한 이 예(例)와 같이 이미 나누어 남도(南道)·북도(北道)로 하였는데, 지난번에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율원군(栗元君) 이종(李徖)이 도(道)를 나눈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고 계달(啓達)하기를, ‘북도(北道)에 원거(元居)하는 군인의 수효가 남도(南道)의 갑절이 되니, 청컨대 '''남도군(南道軍)의 방수(防戍)를 북도(北道)에서 나눈 자로써 내지(內地)를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내가 ‘남·북도의 군마(軍馬)를 가지고 자타(自他)를 계교하지 말고, 전에 방수(防戍)하던 예(例)를 따라 성식(聲息)이 있으면, 2도(二道)의 절도사가 마땅히 합의하여 변란에 대처하라.’고 이미 유서(諭書)를 내렸으니, 경 등도 또한 이 뜻을 알고, '''3도가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항상 상산 사세(常山蛇勢) 와 같이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하고, 그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하며, 그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응하는 것이 옳다.''' > >'''[[평양부|평양(平壤)]]·[[안주시|안주(安州)]]·[[정주시|정주(定州)]]·[[숙천군|숙천(肅川)]]·[[성천군|성천(成川)]]·가산(嘉山)·[[순천시(북한)|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군|중화(中和)]]·[[상원군|상원(祥原)]]·[[덕천시|덕천(德川)]]·[[개천시|개천(价川)]]·[[평원군|영유(永柔)]]·[[증산군|증산(甑山)]]·함종(咸從)·[[남포시|삼화(三和)]]·[[룡강군|용강(龍崗)]]·[[강서군|강서(江西)]]·삼등(三登)·[[은산군|은산(殷山)]]·[[양덕군|양덕(陽德)]]·[[맹산군|맹산(孟山)]]·[[순안구역|순안(順安)]]을 중도(中道)로 소속시키고,''' > >'''[[녕변군|영변(寧邊)]]·[[운산군|운산(雲山)]]·[[강계시|강계(江界)]]·[[위원군|위원(渭原)]]·[[벽동군|벽동(碧潼)]]·[[박천군|박천(博川)]]·[[희천시|희천(熙川)]]·[[녕원군|영원(寧遠)]]을 동도(東道)로 소속시키며, ''' > >'''[[의주부|의주(義州)]]·[[용천군|용천(龍川)]]·[[철산군|철산(鐵山)]]·[[선천군|선천(宣川)]]·[[곽산군|곽산(郭山)]]·[[구성시|구성(龜城)]]·[[삭주군|삭주(朔州)]]·[[창성군|창성(昌城)]]·[[태천군|태천(泰川)]]을 서도(西道)로 '''소속시키게 하라. >하였다. 위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에 평안도를 3개의 도로 나뉘어 통치한 시기가 있음을 알수있다.[* 다만 처음부터 평안도 3분할해서 통치한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3개 분할 통치는 일정기간 동안에만 유지되었다.]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부|평양]]과 [[안주시|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s-1|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하성군|선조]] 21년, 평양에서 최정보란 자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금부에서 "친족살해가 일어난 [[평양부|평양]]을 전례에 따라 격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평안도에서 평양을 대체할 도시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조에서 "2번이나 평양을 격하하면 일개 현감이 도저히 [[평양부|평양]]같은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게될 것이다"라고 [[평양부|평양]] 격하를 반대하면서 평양의 지위가 유지되었다.[* 실제 [[평양부]]의 영향과 지위는 조선시대 왕권과 정치판을 제외하고는 둘째로 평가할 정도로 막강하였다.] 만약 [[평양시|평양]]을 격하했다면, [[조선시대]] 다른 도처럼 평안도도 한 번 이름이 바뀔 뻔했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이북 지역에 속해 있지만, 이북 인구가 평안도의 평야 지대에 집중된 영향으로, 평야 지역에 한해서는 삼남 지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북 지역에 한해 인구밀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또한 면적이 42,000㎢에 달해, 18세기에는 [[경상도]]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순이었다. 단 전라도가 평안도 면적의 절반도 안 된다는 점, 그럼에도 18세기까지는 전라도 인구가 평안도 인구보다 내내 더 많았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조선 역사 내내 전라도가 2위였던 기간이 훨씬 더 길며 심지어 조선 중기에는 200년 가량이나 평안도 면적의 1/3을 조금 넘는 충청도에도 밀려 인구가 4등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는 큰 강이 많아 식수와 농수를 얻기에 편리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와 해안가를 갖추어 식량 생산 능력이 이북 지방에서 높기 때문이다. 다만 단점도 없는게 아닌지라 남부 지방과 달리 [[이앙법]]을 하기에 기후 조건이 열악했고 [[대동강]] 하류는 연강수량이 800mm까지 내려갈 정도로 적어 밭농사를 하기도 하는 흠이 있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토질이 나쁘지 않고 강으로부터 농업용수를 구해 적절하게 농사를 지을 수는 있었던지라 조선의 제일가는 곡창지대라 부르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자급자족은 가능한 동네였다. [[택리지]]에서는 "대동강 하류의 [[하중도]]인 벽지도도 논농사를 한다"고 묘사했다. 사실 [[평양]] 정도가 [[강원도]] [[철원군]]과 비슷한 기후라, [[평안북도]] 산간 지대를 제외하면 심하게 추운 것도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의 [[용천군]]이나 [[청천강]] 하류 [[안주시]]의 삼천리벌은 아예 곡창지대로 일컬어질 정도다. [[http://m.kyeongin.com/view.php?key=20170409010002933|#]] 심지어 추운 곳에서 농사를 짓기 힘든 조선시대에 조차 택리지가 나온 산중 고을은 땅이 메마르나, '''바닷가 주변은 기름진 것이 충청도 수준'''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846&code=kc_age_30|#]] 농업은 [[평안남도]], [[평안북도]] 따질 것 없이 호남 지방에 비해서는 명백히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평안도가 [[경기도]], 삼남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이유가 이곳이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요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교통과 상업 역시 크게 발전했고 이 지역에 거점을 둔 의주의 만상과 평양의 유상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 집단이었다. 변방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성을 지닌 동네인데, 요동 지역의 [[고조선]]이 [[연나라]]에 패퇴하며 [[평양]] 일대에 정도했기 때문이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였고 [[한사군]]이 들어서 400여 년간 중원 왕조의 직할 통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미천왕]] 대에 예맥계에 의해 재수복되어 [[장수왕]] 대부터 [[고구려]]의 후기 중심지로 기능하였고, 이후 [[신라]]([[통일신라]])가 [[패강진]] 중심으로 개척하여 평안도 방향으로 북진정책을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서경이 설치되어 사실상 [[고려]]의 제2 수도권 위치에 있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평양이라는 도시 자체는 [[단군]]과 기자의 땅이자 옛 고구려, 고려의 중심지로서 상당히 중시했으나 도 차원에서는 남부에 비해 경시되었는데, 이는 명문가의 부재, [[유교]]적 질서의 약세, 그리고 이민족과의 접경 문제 등의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직 중 평안 감사, 즉 평안도 [[관찰사]] 자리는 상당한 요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이는 씨족 기반의 명문세가가 많은 하삼도나 경기 지방에 비해 평안도가 눈치가 덜 보여 해먹기 좋기 때문이였다. 항간에 '[[홍경래의 난]]' 같은 단어를 보고 정치 선전이 동원되고 [[유럽]]처럼 민족감정이 뒤섞인 현대적인 지역감정과 결부시키거나 현대 북한과 결부시키는 생각이 많다. 그러나 이 지역감정은 '''신분 의식이 있는 사람이 '상놈'인 평안도 주민'''을 차별하는 형태였다. 반드시 평안도라는 그 지역이기에 차별한 것이 아니라 문벌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다 보니 평안도 출신도 걸려든 것이다. 문벌을 안 따지면 이곳 사람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그 배경을 따져본다면 현대에 이를 결부시키는 것은 [[나향욱 개돼지 망언 사건|나향욱처럼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한다는]] 것,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니 차별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작 노비는 신분이 꽤 높은 사람을 따라가니, 평안도도 노비가 많지는 않았다. 신분이 높지도 않고 아주 낮지도 않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한국 사회의 [[숭실대학교]] 같은 이 지역의 영향을 받은 기관이나 인사는 통일을 한국에서 가장 강하게 원하는 축에 속한다. 조선 시대에 서북 지방 사람들은 다른 도의 [[양반]]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이것은 명문가가 [[원 간섭기]], [[여말선초]]의 혼란으로 자취를 삼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즉, 양반들은 양반이 아닌 사람 자체를 정치적으로 차별했고, 이건 굳이 지역을 가린 것이 아닌데 여긴 제대로 된 양반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이자 첫 [[영의정]]인 [[조준(조선)|조준]]이 소수의 살아남은 명문가였기에 평양 출신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서북 지방의 경우는 이전 [[묘청의 난]]의 경험도 있었고 허나 또 아이러니 한 것도 신진사대부들 중에서 묘청의 난을 말 그대로 반란으로 규정한 것도 핵심 공신이었던 조준이었다. 근데 조준은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사대부들이 알았고 평양부원군으로 불렸다. 지금은 그의 고향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방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사민 정책으로 삼남 지방 사람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기는 했지만, 그곳에 갈 필요가 없는 명문가는 굳이 이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한말에 평안도는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었다. [[평안남도]]와 [[평안북도]]가 밑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이는 유학을 국시로 삼는 조선 입장에서는 더더욱 질시를 삼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임진왜란|임란]] 시기에 큰 [[의병]]이 없었다고 하여 더더욱 강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북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과거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학문도 발전해서, [[서울특별시|서울]] 다음으로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사실상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은 과거 응시에 가장 많은 인원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서울이 과거합격자가 가장 많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특혜.--] 그러나 문벌이 낮다는 차별로 인해 이 지역 출신의 과거 급제자들은 당상관[* 정3품 이상. 현대로 치면 1급 공무원, 차관보에 해당함.] 이상의 높은 관직이나 [[홍문관]] 등 요직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실제 조선시대 이름난 정승이나 관료들 가운데 이북 지역 출신을 찾기 힘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직 등용에서의 차별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벼슬길보다는 경제 활동에 전념해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특히 [[의주군|의주]]의 [[임상옥]]이 [[거상]]으로 유명했다. 또 이들은 경제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으려고 관리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이들을 수탈하는 수령도 많았으며, 특히 평안감사가 정승 부럽지 않은 관직으로 유명했다.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한번 제대로 긁어 모으면, 평생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재물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북 지방의 차별과 더불어 지방 향리들의 수탈도 가혹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홍경래의 난]] 항목에 올라온 격문[*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평안도)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을 참고하면 [[조선]] 후기 조정과 권세를 누리던 사람 사이에는 평안도에 대한 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지역감정]] 항목을 참조. [[홍경래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에서의 정치적 배제, 경제적 수탈로 조선 조정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러한 적개심을 두려워하는 사료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특히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들이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는 그들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성직자)|신부]] <조선교회사> 사실 평안도는 예로부터 북방 민족과의 투쟁이 잦은 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함경도]]와 더불어 용맹한 지역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주 인식되었다. [[정도전]]은 평안도를 숲 속에서 나오는 사나운 [[호랑이]]라는 뜻으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평가했다.[* 참고로 [[정도전]]이 "[[함경도]]는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와 같다"고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평가해서 [[태조(조선)|이성계]]가 심히 언짢은 표정을 짓자 얼른 석전경우(石田耕牛)라고 재평가해서 [[태조(조선)|이성계]]의 마음을 그나마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안도의 '평안(平安)'이 '평안하다'의 평안과 한자가 같다. 물론 [[평양시|평양]]의 '평'과 [[안주시|안주]]의 '안'을 따서 지은 게 우연히 반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마 [[이중환]]의 [[택리지]]에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다"고 쓰여져 있어, 진실하다는 평을 들은 [[경상도]]와 더불어 호평이 적혀 있다. 오히려 자신의 고향 [[충청도]]를 낮춘 것으로 보면, 정치적 지지를 중심으로 평가를 내렸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시대는 근현대처럼 조직적 정치선전이 없어, 일반인끼리도 증오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구한말에도 여학교와 평등사상을 반대할 정도로 상당히 수구적이라는 평가도 있는 평안도 출신이 아닌 성리학자 [[유인석]] 같은 경우도 평안도나 인근 [[황해도]]에서 사람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 시기에 평양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풍경궁]]을 짓기도 했다. 다만 신분이 낮은 사람끼리는 지역에 상관없이 잘 어울렸다. 당장 [[홍경래의 난]]에 동조한 사람 중에는 [[충청도]] 출신 채수영도 있었고, [[제주도]]에서는 이 난에 동조한 민란이 있었다. 남쪽의 [[동학 농민 운동]]에도 호응하기도 했다. [[가루지기]] 같은 작품에서도 [[변강쇠]]와 [[옹녀]]가 각각 [[전라도]], [[평안도]]출신이다. [[3.1운동]] 당시에는 조정에 차별받았다는 인식에 '우리 임금'은 아니라는 인식은 있지만[* 조정에 대한 인식은 사실 평안도 뿐만 아니라 문벌로 차별받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갑신정변]]에서도 그 폐단이 지적될 정도다. 그 이외에도 현대에도 [[https://www.youtube.com/watch?v=-1LczCoOKI0|황실 후손을 '도둑놈'이라고 욕하는 참전용사]]가 존재한다. [[3.1운동]] 당시 공화주의를 외쳤던 세력 중에는 서울 [[정신여학교]]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고종의 승하가 슬프다고 하였다. 어떤 경우는 '성을 향해서 며칠을 두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지요.'라는 증언도 있다. 다음은 3.1운동에 대해 증언하는 한국의 평안도 출신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이 평양에서 겪은 일을 언급하는 증언이다. > 그게 있어도 기회가 있어야 되는데 그 기회가 고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에요. 고종이 죽어도 그냥 순조롭게 죽은 게 아니라 항간에 약사(藥死) 시켰다는 소문[* [[이완용]]이 [[고종황제|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이 나돌자 국민들이 격분을 했지요. 물론 백성들은 그까짓 임금 했지만 그래도 제 나라의 심볼이랄 수 있는 임금이 죽었으니 민심이 한 곳에 모일 수 있었지요. 그 시기가 잘 선택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겪은 건데 그때 17살 때 평양고보에 다녔지요. 나 자신이 태어난 곳은 외진 촌[* 용암포라는 작은 어촌이었다.]이었지만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또 집안도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여서 내 나름대로는 의식이 깨었다 할 수 있었는데 관립학교에 들어가 보니 딴 세상이란 말이예요. 내 생각과는 너무 달라. 쉬는 시간에 토론을 해보면 일제에 반대하는 의식은 있어도 이 형편에 별수 있겠느냐, 독립 가망은 없으니 처분에 따라 문화 활동이나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식이예요. 저는 모두 관립학교 교육을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3.1운동]]이 일어난 후 하루아침에 달라졌어요. 말은 그리해도 속에는 민족의식이 잠자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놀랬어요. 고종이 돌아간 날도 학교에 가보니 상급생이 “수업에 들어가지 말라. 고종임금이 죽었는데 추도하는 의미로 수업을 받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한 일인데. 자연히 수업이 안됐어요. 그러자 선생들이 놀라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학생 대표가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니 추도를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때 교장이 다나까(田中)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수단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첫말에 “그러자, 나도 같이 하겠다”면서 자기도 내내 근신했어요. >---- > - [[함석헌]], 한국민중 운동의 성격과 새 방향, 씨알의 소리 1977. 3 62호에서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305&wr_id=54|#]] 그 밖에 [[장준하]], [[김준엽]]의 친구였던 최기일 교수의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본인이 살던 [[평안북도]] [[삭주군]]을 비롯해서 평안도 지방에는 양반이 굉장히 드물었다고 한다. 다만 상인 출신으로 돈을 벌어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이 많아 평안도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이 주류계급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하였다. 본인이 본격적으로 양반 출신들을 접하기 시작한 건 해방 이후 월남해서 [[이승만]]의 비서를 역임할 때였는데,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이 이런 '''양반'''들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 월남해 국군에 입대한 인사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의 파벌 싸움에서 [[경상도]] 파벌 인사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여성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실속없고 일은 안 한 채로 금가락지 끼고 꾸민채로 '수심가'라는 지역 전통 민요를 부른다"는 편견이 언급된다. [[별건곤]]이라는 잡지는 "'대체로 이곳 여자는 활발하고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일을 안 한다'는 식의 그런 관념은 [[평양]], [[강계]] 같은 색향의 여자뿐이며, 농사를 잘 한다"고 주장했다. [[https://m.cafe.daum.net/dance3/Hqmx/446|#]] 조선 후기에는 경제력이 발달하여 풍류를 즐기는 시도가 많이 일어나 [[기생]]이나 예쁜 여자가 많다며 평양이나 강계는 '색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런 관념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평양에는 '권번'이라는 기생학교에서 배출된 연예인 역할을 하는 기생을 보러 일본 등지에서 관광을 오기도 했다. [[장준하]]의 아내였던 김희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본인의 외가가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제일 가던 지주집안이었고, 특이하게도 여성인 외할머니가 집안의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강세였던 지역인만큼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들이 많아 여성들이 이남 지역보다 이러한 미션스쿨에 진학해서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편이기도 했다. 이러한 미션스쿨 여학교들 중 본래 이북 지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남으로 내려온 학교들 중에는 [[숭의여학교]]와 [[틀:보성학원|보성여학교]]가 있다. [[서울]] [[이화학당]]에도 상대적으로 평안도 출신 재학생들이 많았다. 다만 조선에서 그나마 기독교가 강세였던 곳이지, [[선천군]] 같이 가장 기독교가 강세였던 지역도 주민 50% 정도가 신도였다고 한다. 남한의 어느 곳보다 신도의 비율이 높지만 종교가 없거나 [[천도교]]를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지역을 접수할 당시에도 가장 강력한 대항 세력이기는 하여 김일성은 친척 [[강량욱]] 목사 같은 사람을 서열 3위까지 올려놓고 종교 탄압을 하게 하는 등 이들을 크게 경계했다. 분단 초기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같은 시위도 일어났으나, 공산당은 자신들이 스카웃한 열성파나 노동자를 피해의식으로 선동하여 '예수장이(예수쟁이)'라며 교회 장로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 [[http://dongne.donga.com/2012/06/19/d-story%E2%85%A1-%EC%8B%A0%EC%9D%98%EC%A3%BC%ED%95%99%EC%83%9D%EC%82%AC%EA%B1%B4-%EB%B3%B4%EB%8F%84/|#]] 전근대까지 '''현대 북한과는 정반대'''의 경제 질서, 사회 질서를 가지던 곳이었다.[* 이러했던 분위기 때문에 해방 정국 당시에는 반농담 삼아 '''“차라리 [[미군정]]이 [[삼팔선|38선]] [[북#s-1|이북]]에 들어서고 소군정이 이남에 들어섰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말까지 떠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정국 당시 국내 최대 [[공산주의]] 세력은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로당]]이었는데 이들은 대개 오늘날 남한 지역 출신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경상도]]''' 출신자들이 많았다. (다만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함경도]]는 토착 공산주의자([[오기섭]]이나 [[갑산파]] 등)가 있었는데, 김일성이 이들을 숙청시켰다. 김일성의 지역적 기반은 그냥 외국이다. 태어난 곳은 [[평양시|평양]]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 [[만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중국공산당]]ㆍ[[소련공산당]]과 어울렸다.] [[지역감정]]과 관련된 주장이 널리 퍼져 있고 북한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이것을 현대 북한과 연관시키려는 주장도 있다.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 질서가 약하던 곳이었는데, 북한 정권은 상업을 억제시키고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신분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 차별이란 것도 따져보면 평양에 [[풍경궁]]을 두어 아예 고종이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고 시도했을 만큼 무작정 차별받는 곳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평전]]은 평양이 2번째로 큰 도시였기에 딱히 지역간 적대감정 없이[* 당시 [[경성부|경성]]으로 불린 서울이 과거부터 북촌처럼 권세가만 있는 곳이 아니었을 뿐더러, 평양도 [[평양부]] 문서에서 보듯 문화나 역사성은 기자가 도읍했다고 '기성'이라 하는 등 아예 무시되지는 않았다.] 진행된 것이다. 현재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민족정기를 불어넣기 위해 축구를 하자면 대표 도시인 서울과 평양이 겨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대적 지역감정이 있는 [[엘 클라시코]] 같은 경우와 다르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3978&r_serial=03|평양 출신 선수 증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0/03/03/2000030370356.html|서울 출신 선수 증언]] 엘 클라시코 같았다면 지도층에 대한 반항을 막고자 80년대 3S 정책마냥 일제가 이를 부추겼겠지만 오히려 일제가 이 경기를 금지시켰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일부 축구팀은 지역 연고자만 받는 경우도 있지만 경평전에서 서울·평양 축구단은 서울 사람이 평양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804162208015|#]] [[조선일보]]에서는 '평안도의 상인 정신이 대한민국을 설계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6/2017111602047.html|#]] 족보가 없으니 근대인이며, [[함석헌]] 같은 민주화운동가도 상놈 출신임이 자랑스러웠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협력하는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조만식]]은 애향심이 강해 평양에 남아 북한 정권에 대항하다 숨졌을 정도지만 [[독립운동]] 당시 "고향을 묻지 말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인화 단결하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독립 운동 당시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평안도 출신 [[안창호]]와 경기도 출신 [[여운형]]이 같은 편에 서는 등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다. 이 파벌도 따지고 보면 신분 차별에 가까운데, 이들과 대립했던 이승만과 달리 여운형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안창호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이곳 출신의 실향민이 대거 월남하여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탈북민은 [[함경도]]계가 많지만 북한 땅의 토속 문화에 대한 것은 평안도 문화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겠'을 '갔'으로 말하고, 'ㅈ' 발음을 잘 못하며 '네다'로 알려진 [[평안도 사투리]], 간이 세지 않은 음식 등이 대표적이다. [[숭실대학교]]는 평양의 숭실학당을 모체로 하여 설립된 학교다.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이 평안도 실향민이라 같은 실향민 집안인 [[문재인]]을 도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기독교 관련 인사도 많이 내려와 실향민이 세운 교회도 현재까지 남아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계]] 같은 잡지의 편집을 주도하여 지역성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기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장기려]], [[유일한]], [[황순원]] 등이 유명하다. 지금도 [[현미(가수)|현미]] 같은 연예인, [[김응용]] 같은 스포츠계의 인사도 남아 있다. 북한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중심 지역이다. 1952년 평양 지진 기록이 있으며, 규모 6.3으로 보면 된다. 만약 평양에 [[2016년 경주 지진]]이나 [[2017년 포항 지진]]과 같은 지표면에서 진도 7의 지진 진앙지가 지하 9km에 일어날 경우, 포항보다 100배 더 심한 피해를 주며 가옥, 건물 등이 붕괴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고 [[황해도]]는 진도 5.5~6급의 지진을, [[백령도]]는 [[2003년]] 당시 상황과 거의 유사한 규모로 나갈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