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종교 == || [[파일:Religions_in_Poland_1573.png|width=100%]] || || 루블린 조약 직후 1573년 폴란드의 종교지도 [br] 노란색은 [[가톨릭]], 녹색은 [[정교회]], 파란색은 [[루터교회]], 보라색은 [[칼뱅파|칼뱅교회]] ||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자체로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독실한 가톨릭 민족들로 유명하지만, 이 시절엔 다스리는 땅이 넓었던 만큼 종교적 다양성은 전유럽, 아니 전 세계에서 봐도 끝내주게 다양한 나라였다. 당장 폴란드인은 이미 10세기 경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다수가 그렇게 남았고, 유럽 최후의 비기독교 다신교 국가였던 리투아니아도 [[북방 십자군]]을 대대로 겪은 이후 오히려 늦게 배운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고 독실한 가톨릭으로 남았다. 그러나 중세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확장하면서 흡수하게 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은 저마다 종교가 다양했다. 당장 봉신국이며 역설적으로 훗날 옛 상전이었던 폴란드를 잡아먹게 될 [[프로이센 공국]]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루터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프로이센 공국, [[쿠를란트-젬갈렌]] 같이 봉신국이 아니라 연방이 직접 다스리는 [[단치히]] 일대 서부 프로이센의 독일계 주류 지방들도 16세기에 대부분 루터교로 갈아탔다. 연방 결성 당시 리투아니아 쪽에서 가지고 온 옛 [[키예프 루스]] 시절의 동슬라브계 주류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는 정교회가 현지에선 오히려 다수 종교였고, 리투아니아 자체도 개종이 늦어 딱히 다른 종파를 적극적으로 개종시킬만한 종교적 인프라가 없었던 만큼 비단 정치적 엘리트 대귀족들도 여전히 정교회 신앙을 사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연방이 성장하며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는 중동권과 대립하면서도 중개무역이 커지자 유대인들과 경쟁하며 주요 도시나 국경 지방에서 이민자 커뮤니티로 [[아르메니아인]]들까지 정착하면서 무려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뿐만 아니라 [[칼케돈 공의회|비칼케돈]] 소위 '단성론'[* 사실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와 신학자 본인들은 오래된 오해에서 비롯된 비칭이라며 '단성론' 운운하는걸 거부한다] [[오리엔트 정교회]] 까지 기독교 메이저 종파가 다 살던 나라였다. 여기에 나중에 [[루블린]] 시 중심으로 폴란드 자체적으로 발생한 [[파우스토 소치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니테리언]] 계열 폴란드 형제회, 독일 쪽에서 도망쳐온 [[재침례파]] [[메노나이트]] 등까지 포함하면 당시 기준으론 온갖 소규모 '이단'까지 다 공존하고 있었다. 기독교 종파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데 중세 폴란드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던 만큼 연방 형성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보적으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가 됐고, 이들이 주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면서 바르샤바, 크라쿠프, 빌뉴스, 리비우, 흐라드나, 카우나스 등 연방의 중요 도시들의 인구는 적어도 10-20%, [[비텝스크]]나 [[나바흐루다크]] 같은 경우 한때는 거의 반수까지 유대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아슈케나짐이었으나 일부 [[카라임]] 유대인들도 빌뉴스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크림 한국]] 접경 지대에는 당장 세임과 국왕의 허락을 받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며 정착을 허가 받은 [[립카 타타르]]를 비롯한 무슬림들도 많이 살았다. 정리하자면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기독교 5대 종파[*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오리엔트 교회, 비삼위일체파 군소 '이단'들.], [[아브라함교]] [[기독교|3대]] [[유대교|종]][[이슬람|교]]'''가 모두 공존하는 나라였던 셈이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종교가 다양하고, 나머지 유럽은 종교 분열과 갈등이 극에 달해 하루가 멀다고 종교전쟁이 터지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큰 종교적 분쟁 없이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며 각 종파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다른 유럽 열국에선 16-17세기 강력한 중앙 왕실 권력이 등장하고 신학 체계와 교회 조직을 정비한 루터교, 칼뱅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와 손을 잡으며 강력한 종교적 단일화와 중앙집권화를 동시에 밀어 붙였던 반면[* 역사학계에선 이런 16-17세기 유럽사 전반의 트렌드를 '교파화 과정 (confessionalization/Konfessionalisierung)'이라고 한다], 중세 말 늦게서야 중세 가톨릭 유럽의 보편적 봉건 체제에 편입됐던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애초에 수평적인 귀족 연합체로 시작했던 국체를 루블린 연합과 귀족민주정을 통해 성문화 하면서 이렇게 특정 종교를 전국적으로 강제할 만한 강력한 중앙 권력의 출현 자체를 법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머지 유럽은 종교재판소와 종교적 학살, 중앙 왕실과 지방, 도시 자유민 세력간 종교적 대립으로 인한 내전이 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던 시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히려 중앙 권력 기구인 세임에서 개신교, 정교회 귀족들의 발언권이 전면 보장될만큼 종교적 안정성을 자랑했다. 물론 상술한 귀족공화정 특유의 '''중앙 왕실이 특정 종교를 강제하는건 막아도 군소 귀족 여럿이 자기네 동네에서 다른 종교 믿는 가신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내부 구조적 문제와, 여기에 딸려 들어온 정교회권의 러시아, 개신교권의 스웨덴 등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라 자체가 박살났던 만큼 크게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보여준 다원주의적 관용 정책도 근세 유럽의 종교적 분열이란 난국에서 전적으로 나라를 지켜주었다곤 할수 없다. 아무리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폴란드 또한 나머지 유럽역사 전체에 영향을 끼친 종교적 분열이란 세기의 현상 자체에선 자유로울순 없는지라 17세기 들어가면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완전하게 사상무장을 다시한 가톨릭 교회와 이를 상징하는 바로크 종교 건축물, 예술들과 함께 [[예수회]] 교육을 받은 귀족들, 가톨릭 교회, 도시민들 중심으로 종교가 더 강력하게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법적으론 여전히 보장된 권리를 사수하려던 비가톨릭계 귀족, 도시들과 충돌이 더 잦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왕실 권력과 상관 없이 자체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종교적 배타성은 17세기 후반 비가톨릭 외세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치루며 한층 더 강력해져 결국 현대까지 이어지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사회의 강력한 종교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역사 전체를 보면 끼친 데미지가 워낙 파멸적이긴 해도 결국 종교 문제 자체가 발단이 되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자키 반란은 중요성은 크지만 여전히 예외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스웨덴 침공기 침략군이 종교적 동질성에 바탕해 방어하는 폴란드 도시민이나 귀족들에게 전향을 권유함에도 오히려 현지인들이 종교적 정체성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우고 거절하며 국가적 통합에 더 기여한 사례도 있었다. 여러가지 난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런 연방 귀족 민주정의 종교적 관용은 연방이 망하는 순간까지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위해 들고 일어났던 19세기 폴란드 민족주의 혁명운동에도 비가톨릭 신자들이나 비폴란드계 민족 출신 혁명가들이 동참하는 강력한 국가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대 유럽인들도 [[30년 전쟁]] 발발 초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뒤엎고 혁명정부를 세운 [[보헤미아 왕국]]의 개신교 귀족들이 모델로 삼은 게 폴란드-리투아니아식 귀족민주정이었을만큼 상술한 교파화 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던 지식인들에게 폴란드식 정치적 귀족과두정에 기반한 종교적 관용은 선망의 대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