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브레스트 연합과 동방 교회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포함한 지배층은 가톨릭 신도였고 동유럽권에서 세를 넓히려는 로마 교황청 및 예수회와 연대했다. 또한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가진 오스만,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가진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이 와중에 친카톨릭적 성향을 가진 예레미야스 2세[* 로마 교황에게 세계총대주교좌의 성유물을 전해주거나, 러시아를 방문해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러시아로 이전할 것을 요청하다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창설에 동의하거나, 개신교와 정교도 간의 최초의 신학 교류를 수행하는 등 여러모로 파격적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가 세계총대주교좌에 착좌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방문해 지그문트 3세와 만나 르비우와 빌뉴스 교회의 독립(Stauropegion)을 승인함으로서 가속화되었다. 1596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가톨릭 교회 내부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전환한 브레스트 연맹을 체결했다. 문제는 이게 국가 내의 정교회의 지지 없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공식적으로 정교회는 불법이 되었고 연합을 거부한 주교들은 파문당했다. 정교도들은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교회 건물과 토지는 몰수당해 동방 가톨릭 계열 신자들에게 넘겨졌다. 리비우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의 정교회 및 기타 동방 교회의 고위 사제들의 직함과 재산은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는 17세기에 들어서서 정교도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1603년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키예프 루스의 야로슬라프 1세 시대에 창설된 최초의 정교회 수도원이다.]의 연합 면제, 1607년 정교도들의 예배 자유 허용, 1607년 정교회의 재산 보장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정교회 보호를 구실로 러시아가 개입할 여지가 보이자 폴란드 중앙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정교도들의 권리 증진에 힘쓰기 시작함으로서 완화되어갔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중앙정부가 정교회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과 별개로 전통적인 동방 교회(분리주의자)와 전향한 동방 가톨릭 교회(통합파) 간의 상호적대감과 불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게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2%AC%ED%8C%9F_%EC%BF%A4%EC%B2%B4%EB%B9%85|요사팍 쿤체빅]]으로 통합파의 거두였던 루테니아 연합 교회의 대주교로서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인물이다.[* 현재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이라서 당대 행실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1623년 세임에서 쿤체빅이 정교도들을 탄압한다는 발언이 나온 것으로 봐서 당대 폴란드인들 관점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교도들을 탄압했던 인물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폴란드사 권위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Norman_Davies|노먼 데이비즈]]도 쿤체빅이 정교도에 대한 온갖 억압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그는 1618년 모길료프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무장한 주민들 그를 배교자라고 비난하고 당장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 머무를 수 없었다. 결국 바르샤바로 가서 지기문트 3세에게 이를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여 주동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주민들에게 벌금형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의 최후 역시 정교회와 연관이 깊었는데, 1623년에 비텝스크에서는 비밀리에 정교회 예배를 거행하던 성직자를 체포하려했으나, 분노한 정교회 현지 신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해 시신은 발가벗겨진 채로 다우다바 강에 던져졌다. 결국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요청을 받은 지기문트 3세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어 폴란드, 우크라이나, 미국, 캐나다 몇몇 교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는데, 해당 인물이 정교도들을 탄압하던 인물이라 시설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결국 디주니치(Dyzunici)라는 연합에 반대하는 반체제적 정교도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심지어 이들 중에서는 마그나트도 있었다. 또한 카자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에 대항한 투쟁에서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같은 내용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와 러시아가 폴란드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1654-1667) 이후 평화조약에서 폴란드는 정교도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억압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반대로 러시아는 카톨릭교도들에게 같은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다.] 결과적으로 연합은 의도와는 정 반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종교 충돌을 심화시키고, 이에 대한 러시아 및 외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역효과를 낸 셈이다. 한편 동방 가톨릭 계열 교회 중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아르메이나 가톨릭 교회였다. 미코와이 토로소비치(Mikołaj Torosowicz)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르비우 주교로 서품을 받은 동방 교회의 일원이었지만 지그문트 3세의 후원 아래서 당시 르비우 가톨릭 대주교인 얀 안제이 프루흐니츠키(Jan Andrzej Próchnicki)와 교류하면서 르비우의 카톨릭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동방과 서방 교회의 연합을 주장하였고 1630년 최초의 아르메니아 가톨릭 르비우 대주교로 착좌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아르메니아 카톨릭 공동체의 첫 시작이었고 비잔티움 멸망 이후 오스만의 손에 들어간 지역들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다른 동방 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 종파들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 간의 종교 분쟁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미코와이 토로소비치는 이전부터 다른 아르메니아인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때문에 이 이후로는 반대파들에게서 자기 명성과 권력을 지킬려고 라틴 교황과 손잡은 배신자로 취급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