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군대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의 명목상의 수장은 당연히 국왕이었다. 1505년 창설된 4명의 헤트만(Hetman, 원수)의 지휘 아래 전쟁을 수행했다. 각각 폴란드 원수와 리투아니아 원수가 있었으며 밑에 육군원수를, 그 위로 대원수가 있었다. 폴란드 왕국에는 국왕 대원수와 국왕 육군원수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는 리투아니아 대원수와 리투아니아 육군원수가 있었다. 이들은 본래 중요한 전역이 없을때 비상직이었지만 연방 공화국으로 이행되면서 상시 존재하게 되었으며 1585년 이후, 원수직은 반역행위을 하지 않는 한 삭탈하는 일 없이 평생 직위를 잇는 종신제였다. 그리고 국왕 다음의 군통수권을 장악한 자들이었으며, 왕 자신은 사실상 얼굴마담이었기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이들이었다. 이 때문에 1621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병상에 누워있던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계속 지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외 국왕이 폐위권을 갖고 있지 않는 상황은 원수들이 국왕에게서 분립되는 경향이 생기게 만들었고, 실제 원수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정책 등을 추진하고 심지어는 세금도 징수했다. 게다가 이 외에도 두 국가의 [[동군연합]]으로 형성된 국가여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시스템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전체 국방을 책임지는 일원화된 지휘체계와 군대가 존재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15세기 말에 타타르인, 튀르크인, 왈라키아인, 몰도바인 등의 약탈로부터 남쪽 국경을 방위하는 상비부대(Obrona potoczna)가 창설되었으나 이를 다른 전선에 투입시키려는 시도는 귀족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물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폴란드의 귀족들 입장에서도 괜히 자기 영지가 타타르인들에게 털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건 당연했지만 [[지그문트 3세]] 당시 [[동란시대]]로 체제가 붕괴되고 친폴란드 귀족 파벌이 득세한 러시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이 시스템은 국왕이 무능하고 원수들이 매우 유능한 상황에서는 유효한 체제를 쌓을 수 있었으나 1648년 대홍수 당시 무능한 사람이 대원수로 있는 상태에서 개털린 원인이 된다. 또한 이 원수들이 외국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원수들은 연방의 개혁적이고 부국강병적인 법안들을 모두 파기하고 전횡을 저질러 연방이 저수준에 머무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1776년 개혁에 의해 그 권한이 줄어들었고 3차 분할때 연방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대홍수 이전까지 연방의 중요한 군사세력이던 코자키 또한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등록 코자키로 편성되면서 자신들만의 원수를 가지게 되었고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연방에 소속된 등록 코자키의 원수로 활동했다. 이후 대봉기 이후 연방에서 떨어지면서 등록 코자키의 원수는 코자키 국가의 국가원수 명칭이 되었다. 국가수반으로서의 이들의 임기는 약 4년이었다. 실질적 용병의 영역에서도 지정학적 여건도 그렇지만 상술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구조도 이렇게 철저히 귀족 기병 중심 군사 사회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전쟁의 패러다임이 나머지 유럽에선 슬슬 기병에서 보병으로 전환함에도 연방은 철저히 기병 중심 군대를 유지했고, 놀랍게도 대홍수와 스웨덴 침공 당시 고전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야전에선 충분히 경쟁력 있고 주변 열강들에게도 위협적인 군사력을 달성했다. 기병 운용이란 분야 하나만 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히려 쇠락해가던 중갑 창기병을 본질은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만큼 경량화 시키는데 성공한 윙드 후사르란 병종으로 중세식 중기병의 한계를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식 경무장 비정규전 특화 기마궁사, 필요에 따라 서방식 총기병 리터까지 굴리며 당대 최강의 전력을 유지했다. 특히 그 폴란드에게 허구한날 털리는 신세였던 [[루스 차르국]]에서 폴란드 기병대를 고평가했는데, 이는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델로 하는 서구화 개혁 시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사실 [[카타프락토이]]를 모델로 한 드루지나 기병대, [[예니체리]]를 모델로 한 [[스트렐치]], 스웨덴군을 모델로 한 포병 부대 및 제조시설, 외국 연대(Полки иноземного строя) 등 중세 러시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국을 모방한 실험적 부대와 기술들을 많이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모델로 한 서구화 개혁은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아예 차르가 귀족에게 패배해 전제정이 붕괴된 시기가 아니라면) 전제군주정을 지향하는 러시아에선 폴란드 귀족 기병대처럼 귀족들에게 많은 권한을 내어주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즉 전제주의적인 러시아는 보병이 발달했고, 귀족주의적인 폴란드는 기병이 발달함으로서 양 국가간의 군사 발전의 대비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보병은 뒤에서 대포나 만지거나 고기 방패 역할이나 하는 철저한 쩌리 신세(...) 일반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야전군은 윙드 후사르를 주축으로 이들이 적절한 기병 돌격 각을 잴때까지 고기방패 역할로 버틸 영주들의 사병 보병들이나 전투마차 끌고 온 등록 코자키 보병, 그리고 상황과 자금 여유에 따라 주로 네덜란드, 독일어권, 브리튼 섬 등지에서 모집한 용병 포병대로 구성되었다. 아래 목록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군단들과 장비다. * [[윙드 후사르]]: 해당 항목 참조 * 코자키 기병대: 비정규전에 능숙했으나 정규전에서는 맥주병 그 자체였다.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코자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총, 칼, 창, 활과 화살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 * 리소브치치(Lisowczycy): 스웨덴군이 [[리보니아]]를 침공할 당시 세임에서 전비 지원에 상당히 인색했기 때문에 부족한 군사비로 전력을 보완할 목적으로 봉급 대신 민간인들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약탈권”을 받는[* 오스만 제국의 아큰즈와 유사한 경우이다.] 조건으로 편재된 기병들이었다. 코자키 기병대와 마찬가지로 칼, 창, 총, 화살 등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했으며 비정규전에 능숙했다. 리소브치치라는 이름은 폴란드의 유명한 군사귀족이자 군지휘관 리소브스키(1580~1616)에서 나온 것이다. 리소브치치는 약탈, 강간, 방화, 살육을 일삼은 학살자들로 이들의 악명은 루스 차르국의 [[혼란 시대]] 당시 이들의 약탈 및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측으로 참전한 소수의 용병대로 인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타고난 잔인함 덕분에 '[[묵시록의 기사]]'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라이터 기병대(Rajtaria): 라이터 기병대는 그 수가 적었다. 이들의 무기는 주로 총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라이터 기병대가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크우쉰(Kluszyn) 전투때 윙드 후사르가 라이터 기병대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유명유실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육군의 보병은 기병의 빛에 가려 그 효과를 별로 내지 못했다. 일단 폴란드군은 주로 야전용 기병대를 양성했으며, 공성전에 필요한 강력한 보병이나 포병은 별로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점령에 지진부진한 적도 있거나 공성전에도 실패할 때도 있었다. * 보이스코 크바르치아네(Wojsko kwarciane), 보이스코 콤푸토베(Wojsko komputowe): 각각 국가 세금에 의한 상비군과, 전시에 창설되는 반상비군. 1652년 이후 개혁으로 두 군대를 혼성하게 되었다. *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개혁으로 창설된 반상비군으로, 왕실 직속 농지에서 먹고 사는 농민의 신병을 기반으로 한 군대였다. 근데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 체제가 상술된대로 애초에 선거제 왕실이었고, 왕권 자체가 워낙 유명무실해서 서류상으론 왕실 직속인 농지들도 현실적으론 마그나트 대귀족들이 다스리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세도 아니고 16-17세기에 왕실 직영지에 귀족들이 부동산 말뚝박기라니 다른 나라 같으면 뒤집어졌겠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주권은 귀족 의회에 있고, 왕은 선거로 꿔다 놓은 수준인 연방에서는 이게 통했다. 게다가 귀족 의회가 정신나갔다고 국왕 직속 상비군에 덜컥 동의할 리 없는 건 비단 귀족 공화제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유럽 나라들도 마찬가지인지라 이런 군사조직은 결국 왕의 사비로 운영해야 되는데 연방은 선거제 왕국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왕조가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연방에서 역대 왕들은 딱히 자체적인 왕실 비자금을 조성할 이유도 여건도 안됐고, 그렇다 보니 왕 개인이 군사적 능력과 관심이 지대해서 이런 조직 창설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했던 스테판 바토리, 얀 3세 소비에스키 시절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항상 징병도 똑바로 안되고, 유지비도 없어서 겨우 2천명 정도의 규모가 전부였다. * 등록 코자키군: 역시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생긴 군대. 등록 코자키군의 최고 수장은 코자키 대원수였다. 코자키군은 대부분 보병이었으며, 기병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은 대포, 화살, 총, 칼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했으며, 비정규전에서 특히 뛰어난 능력을 구사했다. 흔히 경기병으로 이미지가 강한 코자키군이지만 실제 주력은 [[전투 마차]] 타보르를 중심으로 야전 임시 요새를 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싸우는데 능했던 경보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코자키 보병들은 개개인의 무장은 가벼웠지만 동유럽 전장에서 최고의 미덕인 장시간 험지에서 종군하며 추위, 배고픔을 견디는데 워낙 뛰어났다 보니 오히려 아래 영주들의 사병이나 비싼 외국 용병대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포스폴리테 루셰니에(Pospolite ruszenie): 마그나트의 사병들을 모두 끌어모은 병력으로, 평상시에는 마그나트 한 명 당 수백 명 단위의 연대로 육성했다. 하지만 전시에는 마그나트가 병력을 모두 합하여 그 규모가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초중반 이후 이웃 라이벌 세력들은 서방은 테르시오 전술을 사용하는 대규모 전문 용병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러시아의 스트렐치, 일련의 군제 개혁을 겪은 스웨덴 보병 같이 대대적인 화약무기 중심 전문화된 보병을 운영하는데 이런 마그나트의 사병들은 징집 기준, 훈련 수준이 중세의 농민병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대부분 머릿수만 채우는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이는 대지주 군사 귀족 연합체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기반과도 직결되어 있어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한 사안도 아닌지라, 연방군은 대체로 이들보다 등록 코자키나 서방에서 고용해온 용병 보병대를 사용하는 걸 선호했다. 따라서 신뢰할만한 전문 보병대의 주축이었던 코자키들이 흐멜니츠키와 함께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땐 단순한 지역 반란을 넘어 아예 국가적 군사 체계의 중대한 일부가 반란일으킨거와 마찬가지라서 전술적 붕괴가 전략적, 나아가 국가적 위기로 직결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용병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돈을 주고 전투에 투입시킨 외국 군대.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왕국]] 포함],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등 유럽 각지에서 채용했다. 상술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사회적 구조와도 연결된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양질의 대규모 보병대를 자체적으로 양성하는게 힘들었기 때문에 중요한 대규모 야전에서 중보병대의 주축은 [[독일어권]],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에서 고용해와 서방식으로 훈련 받은 외국인 용병단들이었다. 사실 상술한 농민 경제 사회에서 귀족권과 왕실이 대표하는 중앙 권력의 문제들은 사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문화된 국가 기반부터 계층 집단적 귀족 공화정이라서 부각된 것이지, 그 자체는 근세 유럽의 보편적인 현상인만큼 근본적인 상비군의 문제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군사 기술적으론 근대의 문을 연 16-17세기가 인적구조상으론 모순적으로 용병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치긴 했지만. * 왕립 근위대: 국왕과 그 가족을 호위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한 소부대 해군의 경우 연방의 역사 속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이는 연방군이 거의 동유럽같은 대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7년 스웨덴의 해상봉쇄를 격파한 올리바(Oliwa) 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후 비스와 기습전에서 스웨덴 해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주력은 갈레온이어야 했지만 연방의 국고 사정과 신생 함대였다는 것이 겹쳐, 개조한 무장 상선들이 많이 있었다. 대홍수 이전까지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의 해군은 거의 코자키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수백명이 분승하는 갈매기라는 이름의 소형선인 차이카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쓰면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과 대적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교외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는 간이 배밖으로 나온 짓까지 벌인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는 기존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 군사력 증진과 군 지휘체계의 일원화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개혁들을 단행하면서 군대는 대격변을 지난다.. 1776년에 이르러 헤트만직은 사실상의 명예직으로 전락하고 군의 통제는 상임의회(Rada Nieustająca) 소속 군사부서와 왕권으로 관할이 옮겨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