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성립 배경 ==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루블린 협정을 통해 연방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385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호전적인 [[튜튼 기사단]]의 위협을 받았고 [[요가일라]] 대공은 폴란드 왕국과 크레보 동맹을 맺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해 폴란드 공동 국왕이 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한 통치자 밑으로 연합시키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요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그 후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으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 관계이었을 뿐이다. 1447년에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자 차남인 19세의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가 [[카지미에시 4세]]로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 통념과 달리 [[야기에우워 왕조]]는 대가 끊길 때까지 [[폴란드 왕국]]에서는 선출된 국왕이었다. 혈통으로 세습이 보장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는 사정이 달랐다.]된 후 두 나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기 위해, 1447년 자신을 대공으로 추대한 리투아니아의 [[보야르]](대귀족)들에게 특허장을 내려 귀족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준하고 소작농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권을 부여함으로써 귀족의 정치적 세력을 높여주었다. 그 뒤 대공의 권위는 떨어졌고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귀족 연합체 국가가 되어 남부 [[타타르]]족의 침입과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 16세기에 들어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전신 [[루스 차르국]]에 맞서 리보니아 전쟁을 치루다가 거의 멸망 직전에 내몰렸다. 폴란드 또한 리투아니아에 막대한 원조를 했으나[* 1560년대 폴란드에서 징수된 세금의 '''70%'''가 리투아니아-러시아 전쟁의 전비로 나갈 정도였다. 게다가 폴란드는 리투아니아-러시아 국경 쪽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여 리투아니아를 원조했다.]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원조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러시아를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즉 리투아니아가 방어하고 폴란드가 원조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아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었고[* 예를 들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리투아니아 대공 1544~72 재위, 폴란드 왕 1548~72 재위)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은 결국 폴란드의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합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과정에서 양국 엘리트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감은 이런 여론을 부채질했다. 양국의 엘리트들은 1569년 1월 루블린 근교에서 처음으로 양국의 통합을 안건으로 놓고 회담했다. 그러나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고, 3월 1일 리투아니아 대표단이 루블린을 떠나자 6월 6일 폴란드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부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병합했다.[* 당시 폴란드로 병합된 루테니아 지역의 귀족들은 의외로 폴란드의 병합을 매우 환영했는데, 이는 폴란드가 보유한 인프라를 통해 서유럽 교역망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폴란드 귀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루테니아 귀족 상당수는 폴란드 귀족에 동화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루테니아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루테니아 농민들에게는 보다 엄격한 농노제가 적용된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귀족들은 코사크들에게도 농노제를 적용하려고 하였고, 이는 결국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러시아를 더 큰 위협으로 여기던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협상을 계속했다. 폴란드측은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리투아니아측은 이에 반대하고 연방화를 주장했다. 결국 리투아니아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569년 7월 4일 지그문트 2세가 [[루블린 조약]]안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파일:Poland_and_Lithuania_in_1526.png|width=1000]] ||루블린 조약전의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폴란드보다 훨씬 크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봉신국, 검은색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주축이 된 리보니아 연맹으로 1558년부터 1583년까지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덴마크]]가 [[리보니아]]를 놓고 리보니아 전쟁을 벌였다.|| [[파일:Irp1569.jpg|width=1000]] ||루블린 합병의정서 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리투아니아의 관할 지역[* 현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이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과 [[쿠를란트-젬갈렌|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연방의 봉신국이다.|| 루블린 조약에 따라서 폴란드 왕이 연방을 통치하고, 폴란드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왕이 선출되도록 정해졌으며, [[빌뉴스]]의 의회 및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되었다. 행정과 재정 그리고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지만 폴란드보다 영토가 더 넓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덕분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재작성되었다. 이로써 '''루블린 협정전까지 단순한 [[동군연합]] 관계였던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