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폴란드 농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 === 21세기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엘베 강을 '사회경제적 경계선'으로 설정하고 '자유롭고 자본주의적인 서유럽'과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동유럽'을 대비했다. 서유럽은 일찍이 자본주의가 발전했으나 반대로 동유럽은 재판 농노제가 형성되어 오히려 퇴보 혹은 정체했다는 것이다. 당장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재판 농노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독일의 구츠헤르샤프트(Gutsherrschaft), 러시아 농노제(Крепостничество)는 각각 프로이센 절대주의, 군국주의와 러시아 전제정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중세 러시아는 좀 애매한게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심지어 반공주의적 학자들에게도 아예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sche Produktionsweise)을 가진 동방적 전제주의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이 관점에 따르면 러시아는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라기보단 중국, 오스만, 서로마, 동로마 같은 아시아 국가에 더 가깝다 (여기서의 아시아는 지역 구분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귀족정인 폴란드에서 농노제는 국가를 지배하는 귀족이 토지소유권을 바탕으로 농노를 예속시키는 것이라면, 전제정인 러시아에서 농노제는 국가에 통제당하는 귀족이 봉직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농노에 대한 일정 권리를 허용받는 것이다. 현재로는 지양되고 있지만 반공주의적 학자들로부터 '''지나친 국가통제가 사적 이익 추구를 가로막아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주장을 받기도 했다. 즉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며 실제로 전제정을 공산주의의 모체라고 보았다. 결국 명목상으로는 농노제의 개념이 정반대였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러시아의 폴란드식 농노제는 전제정의 붕괴와 서구화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이 '농노제'의 주체를 차르(국가)로 보느냐 아니면 귀족(유산계급)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지며 바로 그 제정 러시아의 정치 엘리트들도 이 두 가지 농노제를 구분했다.] 독일 경제학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Georg_Friedrich_Knapp|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는 엘바강 이동(Ostelbien)에서는 중세가 끝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귀족들이 발악한 결과 귀족권이 강력해졌으며 일반 농촌 및 마을 주민들이 지방 영주들의 직접적인 권력 하에 놓이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서유럽과 동유럽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농업 이원론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폴란드는 바로 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존재하던 시대에 이미 프로이센인, 러시아인을 비롯한 당대 동유럽인들 사이에서 농노제의 선구자(?)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중요하게 여겨졌다. 실제로 농업 이원론과 폴란드 농노제의 후진성과 억압성에 대한 관점은 [[https://pl.wikipedia.org/wiki/Marian_Ma%C5%82owist|마리안 마워비스트(Marian Małowist)]], [[https://pl.wikipedia.org/wiki/Witold_Kula|비톨트 쿨라(Witold Kula)]] 등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자들과 자본주의, 이윤극대화, 진보를 중시하는 고전주의 및 신고전주의적 성향의 서방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권과 냉전이 종식되기 훨씬 전부터 그 마르크스주의적 학자들 사이에서도 회의론이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동유럽 농민들의 상황이 너무 암울해서 그냥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독일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학파의 본진이었던 소련에부터 이 문제가 지적되었다. [[https://ru.wikipedia.org/wiki/%D0%A8%D0%B0%D0%BF%D0%B8%D1%80%D0%BE,_%D0%90%D0%BB%D0%B5%D0%BA%D1%81%D0%B0%D0%BD%D0%B4%D1%80_%D0%9B%D1%8C%D0%B2%D0%BE%D0%B2%D0%B8%D1%87|알렉산드르 샤피로]]는 소련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한다면 러시아 농민의 생활수준이 수 세기 동안 내내 하락만 했다는 비현실적인 결론이 나온다고 비판하며 더 '진지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90년대에 많은 소련-러시아 학자들은 혁명 이전 농민에 대한 지식이 한정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러시아 농민들이 농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살았기에 집단주의적이었고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으며, 시장진출을 꺼렸다는 둥의 인식들은 오히려 19세기에 [[인민주의|인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들은 러시아가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 [[칼 마르크스]]조차도 말년에는 러시아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농민 신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흐름은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중부유럽 전반에 해당된다. 전근대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거대한 국가에서 군주에 의한 것이든, 귀족에 의한 것이든 '농노제'라고 규정할 수 있는 법적, 제도의 실질적인 강제력과 그것에 대한 당대인들의 이해력에는 지역적,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당대의 많은 폴란드인들, 심지어 외국인들도 폴란드의 '노예제'와 농민에 대한 영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학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만 이는 당시의 엘리트들의 제한적인 시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국가와 귀족은 농촌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며, 이들이 파악하고 착취할 수 있는 농민은 전체의 소수에 불과했다. 즉 농노제란 실제로 당시 농민이 어땠느냐가 아니라 엘리트들이 어떻게 농민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제한된 시각을 가진 지식인들의 기록[* 이는 조선 말기의 실학자들이 오히려 현실과 뒤떨어진 지극히 몽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 노비제에 대한 과장한 많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 역사학자들의 노비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와 같다.], 지배국가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의 프로파간다[* 다만 이는 단순히 정복국가의 피정복국가에 대한 프로파간다 작업은 아니었다. 당시 3국의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치체제를 칭송하면서 이를 자국에 이식하려고 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군주를 비롯한 반귀족 세력의 폄화가 시작됨으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귀족의 천국, 농노의 지옥' 같은 이미지가 당대에 고착되어 버린 것이다.], 공산주의적 혹은 반공주의적 성향의 학자들의 활동 등으로 지나치게 농민 신화가 고착된 면이 있다. 마워비스트나 쿨라 등의 전통적인 견해의 학자들이 근거로 삼은 폴란드 농촌 경제에 대해 대부분의 자료들은 왕실, 교회, 마그나트 라디푼디아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 역시 지역적, 시기적 차이가 크긴 하지만 나머지와 비교해서 대체로 곡물 수출에 의존했으며 1563년 이후 정기적인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료가 많다. 그러나 이는 전근대 수치조사의 부정확성을 제외하더라도 지주 및 농민들이 의도적으로 생산성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과, 일반 귀족의 소규모 영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폴란드 전체에 일반화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1950년대 초에 폴란드 국가 기록보관소에서 일반 귀족 영지 기록들을 체계화, 전산화했고 학자들이 폴란드 전역의 중소규모 영지에 관련된 자료들을 검색할 수 있게 됨으로서 폴란드 농노제가 획일적인 실체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러한 결론들을 두고 [[https://pl.wikipedia.org/wiki/Andrzej_Wycza%C5%84ski|안제이 비찬스키(Andrzej Wyczański)]]는 1960년에 출판한 '1500-1580년 폴란드 귀족 농장에 대한 연구(Studia nad folwarkiem szlacheckim w Polsce w latach 1500–1580)'에서 폴란드 농노제에 대해 결국 학자들도 아는게 별로 없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당시 기준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농민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분석, 봉건제와 농노제의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폴바르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해당 작품에서는 필요한 요소만 강조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영지 — 왕실이나 교회 소유 — 의 비교 자료 없이는 폴바르크를 완전히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영지들 대한 연구 상태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 Andrzej Wyczański, ''Studia nad folwarkiem szlacheckim w Polsce w latach 1500-1580''. ([[바르샤바|Warszawa]]: Państwowe Wydawnictwo Naukowe, 1960, 5] 이를 시작으로 폴란드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나빴다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많은 농민들이 사유재산권 등의 권리와 능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농민 농업이 슐라흐타들의 억압의 희생자가 아니라 활발한 경제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후 70~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유럽 전반의 농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이 자리잡았고 현재는 동유럽 영주-농민의 상호 동의 및 호혜적인 관계, 농민의 단순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편이다. 물론 이러한 수정주의적 인식이 오히려 동유럽 농민들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과대평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서의 '재판 농노제'의 개념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물론 전근대 하층민인 폴란드 농민들이 풍요롭고 자유롭게 산 것은 아니었겠지만 기존 전통주의적 주장이 크게 과장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 폴란드-리투아니아 농민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안제이 비찬스키의 저작들을 참고할 것.[* 단 일부 논문을 제외하면 폴란드어 독해 능력이 필요하다. 비찬스키를 제외하더라도 수정주의적 관점이 영어나 제3국어로 아직 번역된게 별로 없다. 그나마 영미권 학자가 폴란드어 서적을 인용하거나, 수정주의적 관점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대다수이다.] 전통주의에서 수정주의까지 전체적인 인식 변화와 각 주장들의 요약된 내용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옥스포드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The Oxford History of Poland–Lithuania)'의 농민 파트를 참고할 것.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전반의 농민에 대해서는 마르쿠스 서만(Markus Cerman)의 '1300-1800년 동유럽의 촌민과 영주 (Villagers and Lords in Eastern Europe, 1300-1800)'를 추천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