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문화 == 연방은 근대적인 정치, 사회사상의 발전에서 유럽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에라스뮈스]]와 같은 철학자가 칭찬한 당시로는 희귀했던 외견상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대응 종교 개혁의 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했던 종교적 관용을 실현시켜, 유대교[* 약간 과장이 가미된 중세 기록에 따르면 전 세계 유대인의 80%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살았다. [[아슈케나짐]] 항목 참조.], 동방정교[* 통념과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에 대하여 내린 지침은 귀족의 종교의 자유 뿐이고, 적어도 법적으로 16세기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리투아니아 쪽에선 절반에 가까웠던 정교회 신자들에게 대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다. 물론 가톨릭 반종교개혁과 예수회의 진출에 따라 비공식적 차원에서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지만 오스트록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도 안하고 영향력과 위세는 그대로 유지한 정교회 대귀족들도 충분히 있었다.], [[아르메니아 가톨릭]], [[개신교]][* 독일계 이주민들이 연방 도시 곳곳에 정착해서 상공업에 종사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루블린]] 처럼 폴란드 자체적으로 도시민들 중심으로 개혁교회를 받아 들인 지방들도 있었고, Polish Brethren이라 부르는 이웃나라 보헤미아의 [[후스파]] 현지 신도들도 있었다. [[그단스크]]가 있는 왕령 서프로이센, 발트 연안 봉신국 쿠를란트 같이 루터교 독일인들이 주류였던 지방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국교였던 [[가톨릭]]과 더불어 [[이슬람교]][* [[립카 타타르]]라고 해서 [[그룬발트 전투]] 당시 참전했던 [[타타르]]인 전사들이 귀화하여 대대손손 군인으로 활약했다. 한때는 빌뉴스와 트라카이, 나바흐루닥과 민스크를 중심으로 무슬림 타타르인 구역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다.]까지 공존한 것을 가만한다면 동시대의 여러 국가에서 그 풍경을 보고 까무라칠 정도였다. 대홍수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코자키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수천 단위로 학살당하는 일에서 보듯이, 종교가 다른 여러 민족들을 이간질시킬 때도 많았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연방으로 합치기 전부터 이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나 프란시스크 스카리나(Francysk Skaryna) 같은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된 이후에도 역사학, 지도학, 화학, 민족학, 군산업에 종사하는 개발자,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명망있는 학자들이 연방의 문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이중 미하우 보임은 과학자이면서 외교관이기도 해 [[남명]] 정권을 섬긴 전적이 있었다. 그외에 수많은 고전작가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슐라흐타들은 회상록이나 일기를 남겨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저서들을 남겼다. 그외 건축술은 마그나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건축가들을 후원하면서 성당, 궁전같은 것들이 연방의 최전성기때 세워지게 되어 현대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 문화유산으로 남겨지게 된다. 교육 시설들이 대부분 종교기관에 예속되어 있던 중세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에, 가톨릭에 바탕을 둔 폴란드 문화는 서유럽의 최신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용이했다. [[루테니아]]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리투아니아]]인들 중 적지않은 수가 성당을 통해서 전파되는 최신 폴란드 문화에 매료되어 '''폴란드인으로 완전히 동화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리투아니아어]] 사용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부터 꾸준히 축소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한동안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과 완전히 폴란드에 동화된 리투아니아인들 그리고 [[아슈케나짐]]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의 정교회 유력자들도, 같은 이유로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폴란드어를 쓰며 폴란드인으로 동화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르비우|르부프]]의 [[정교회]] 신도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압력과 당시의 시대 상황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물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일방적으로 서유럽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1573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프랑스 출신 [[헨리크 발레지]]와 그를 따라온 시종들은 '폴란드인들은 남자들도 향수를 쓴다'는 점이나 '바벨 왕궁에 다른 방들과 별도로 분리된 화장실 및 온수와 냉수가 따로 나오는 수도꼭지를 가진 욕실이 있다'는 점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헨리크 발레지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루브르 궁전이나 다른 왕궁에도 바벨 왕궁의 화장실 및 욕실과 유사한 시설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연방 귀족층들 사이에선 사르만티즘(Sarmantyzm)이란 이데올로기가 유행했다. 사르만티즘이란 폴란드 민족의 선조라고 생각된 [[사르마티아]]인들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숭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슐라흐타들의 문화에 깊숙히 스며들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의 생활영역의 전면에 침투했다. 사르만티즘은 슐라흐타 계급에게 있어 평등의식, 그들의 기마 취미, 전통 중시, 지방에서의 전원생활, 평화주의를 장려하고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은 복식의 유행을 낳았다. 거기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의 귀족계급에게 단일 민족의식에 가까운 연대감을 주었고, 슐라흐타의 "'''황금의 자유'''"에 정통성을 각각 부여했다.[* 리투아니아의 립카 타타르는 사르만티즘의 수혜자들로 인종과 종교가 다름에도 같은 핏줄이라며 우대를 받았다. 주류계층이 아닌 우크라이나 코자키들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선조가 [[하자르 칸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요상한 신화를 창조해내기도 했다.] 초기 사르만티즘은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문화활동에서 분류되어 나온것으로 신앙심, 성실함, 애국심, 용감함, 평등과 자유를 고취시키는 작용을 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성격은 서서히 부정되었다. 후기에 나타난 과격한 사르만티즘은 신앙심을 광신시키고, 성실함을 정치적 무지로 변화시켰으며, 자랑을 오만으로 만들고, 용감을 완미(頑迷)[*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움을 뜻하는 단어]로, 자유를 무질서로 변모시키는 작용을 하고 말았다. 이 사르만티즘은 당대 연방의 개혁가들이나 독립운동가[* 1830년 [[11월 혁명]]과 1861년 1월 혁명이 실패한 원인 중 하나가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귀족 출신 혁명가들이 코시치우슈코를 제외하면 대부분 토지개혁과 농노 해방에 소극적이라서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원인은 러시아를 포함한 분할 삼국의 무력 진압이었다.]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당시 폴란드인의 이러한 자기반성은 볼레스와프 프루스가 쓴 [[인형]]이란 소설에서 잘 확인해볼 수 있다. 굳이 폴란드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주제는 일단 폴란드의 미래와 애국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폴란드의 붕괴가 내부 분열에 의한 것으로 포장하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역사왜곡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항으로 현대 폴란드에서는 [[아이러니]]를 뜻하는 단어가 'Sarmata' 일 정도로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연방의 주류계층들이 이렇게 좋은 문화와 생활을 향유했던 것에 반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노]]들은 슐라흐타들의 착취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받았다. 연방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농업 덕분에 농노제는 약화되긴커녕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강화되었다. 세임은 자신들의 사유재산인 농노들을 더 착취하기 위해 세월이 흐를수록 농노의 인신자유를 구속하는 법령을 강화했다. 농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결혼도 마음대로 못했다. 그들의 직업은 지주의 명령에 따라 결정되었다. 부역 기간은 점점 늘어나 18세기에 이르면 일주일에 8인일[* 즉 한 가정에서 1명이(대개 그 가정의 가장) 영주의 영지에서 부역하고 다른 가정 구성원이 일주일에 1일 부역하는 것이다.]이 부과될 정도로 심했다. 농노제가 강화되는 추세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18세기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끝났다.[* 예를 들어 연방은 1768년 영주가 농노를 사형에 처할 권리를 폐지시켰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신적 구속을 벗어나 소작제로 전환하거나 심지어 토지를 분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와 위에서 언급한 사르만티즘 같은 이념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카톨릭 교회에서는 슐라흐타들이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의 후손이며, 농노들은 둘째 아들이자 저주받았다고 알려진 [[함]]의 후손이라고 가르쳤다.[* 참고로 19세기 미국과 브라질에서도 노예들에게 이와 비슷한 사이비 교리를 주입시켰다.] 그밖에도 조금이라도 농노들을 벗겨먹을 목적으로 각 가정마다 의무적으로 일정량의 보드카를 구입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많은 농노들은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냈다.[[https://culture.pl/en/article/slavery-vs-serfdom-or-was-poland-a-colonial-empire|#]][* 영주가 농노들에게 술을 배타적으로 판매할 권리 및 농노의 술 구매를 강제한 조치를 [[폴란드어]]로 프로피나치아(Propinacja)라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반유대주의]] 강화라는 또다른 악영향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당시 양조장과 선술집을 유대인들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프로피나치아는 [[폴란드 분할]]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다가 프로이센령에서 1845년, 오스트리아령에서 1889년, 러시아령에서 1898년 폐지되었다.] 농노들은 흑인 노예들처럼 개별 단위로 판매되진 않았지만 대신 토지에 묶여서 도매금으로 거래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더 가혹했는데, 연방 본토의 농노들은 적어도 같은 민족으로 봤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들에게 그저 야만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슐라흐타들은 [[백인의 의무|자신들이 이 야만인들을 문명인으로 개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으며]] 정교회 신앙을 탄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였다. 전성기에는 7천명의 슐라흐타들이 3백만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농노로 부렸다.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훗날 흐멜니츠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봉기는 심지어 일부 폴란드인 농노들마저 호응했다. 이런 농노제의 철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점은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1780-90년대였고, 철폐된 것은 1791년이었다. 하지만 주변국의 간섭과 분할로 폴란드가 분할되면서 농노제가 부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한 러시아령 폴란드는 1864년이 되어서야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주도로 폐지했다. 그러나 그 잔재는 이후로도 몇십년 가량이나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