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러시아에 미친 영향 === >모스크바 귀족들은 마그나트들에게 유리하게 왕권을 제한하는 제치포스폴리타의 정치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보야린들은 비슷한 체제를 루스에 퍼트리고 같은 식으로 차르의 전제권력을 제한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 >[[https://en.wikipedia.org/wiki/Ruslan_Skrynnikov|루슬란 스크리니코프]], 보리스 고두노프 中 >알렉산드르 백작 자신은 특정 자유주의 사상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그것들을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안에는 [[안나 이바노브나|안나]]를 제위에 올리고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길 원했던 오래된 자유주의 러시아 귀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젋은 시절 유럽을 여행하고 아우구스트 3세 통치기의 바르샤바를 지나면서 러시아가 그 당시의 폴란드처럼 되고 러시아의 신민들이 폴란드인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권리와 특권들을 얻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익한 조국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아담 차르토리스키]], 회고록 中 루스 차르국이 폴란드 문화를 고평가했으며, 심지어 폴란드 귀족 기병대를 모방한 서구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가 러시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있었다. 폴란드의 '황금의 자유' 체제는 주변국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제정 말기 이전까지 친폴란드 성향의 귀족 파벌이 항상 존재했으며 17세기에는 아예 3국인 스웨덴에서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에 충성해서 차르가 폴란드를 상대로 할 수 있는게 없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이러한 폴란드화는 러시아사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귀족정화 및 농민 예속화[* 노브고로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계 크냐지를 추대하는 대가로 흘롭(Хлоп)과 스메르드(Смерд)에 대한 사적 지배를 인정받기로 했다.]는 [[이반 3세]]에 의해 격파되었고 포메스티예(봉직영지)[* 러시아판 [[프로니아 제도]]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비잔티움이나 오스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로 대체됨으로써 러시아는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전제정으로의 재건을 시작한다. 이후 [[혼란시대]][*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실리 슈이스키]]가 차르가 되기 전까지는 친폴란드 귀족 파벌의 수장이었다. 당시 차르였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보야린들한테 폴란드와 내통하지 말라고 직접 비난할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 왕자를 차르로 추대하면서 정교회로 개종하라는 것 외에도 젬스키 소보르, 보야린 두마가 법률 제정 및 세금 설정권 등의 조건을 내세웠다.], [[알렉세이 1세]] 통치기의 반란[* 반란 자체는 어찌어찌 무마했지만 1649년 법전(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에 차르권력의 제한, 귀족의 농노에 대한 지배권를 명시해야 했으며 이는 리투아니아 법전(1588년판)을 참고했다.], 궁정 쿠데타 시대[* 표트르 1세 사후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거의 모든 러시아 차르들은 귀족 쿠데타에 의해 등극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인용한 차르토리스키가 이 당시 사람이다.] 등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었으며, 전제정 재건과 농노제 폐지를 추진하는 [[니콜라이 1세]]가 등극하여 자유주의를 탄압하고 폴란드인들을 축출하고 그 대신 [[발트 독일인]]들을 대거 등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트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에서 요직을 차지했으며 불순종적이고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러시아 귀족들을 견제하는 전제정의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예 사회주의자인 [[알렉산드르 게르첸]]부터가 이걸 비판할 정도였다. (다만 당시의 사회주의는 범슬라브주의, 슬라브주의적 성향이 있었기에 이상한건등아니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 [[러시아의 자유주의|자유주의]] 사상이 폴란드 '황금의 자유'의 직접적인 계승자라는 점이다. 차르토리스키가 지적했듯이 자유주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러시아에 구현하려는 러시아 귀족의 '오래된' 속성이었다. 게다가 이는 [[폴란드 분할]]로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러시아에 편입되어 차르토리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폴란드인들이 등장함으로써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러한 자유가 폴란드의 대홍수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동란시대, 스테판 라진의 난, 푸가초프의 난 등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때문에 '''무분별한 자유는 혁명을 불러일으키며, 때문에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전제정이 존재해야만 한다'''[* [[예카테리나 2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모든 러시아 황제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혁명에 대해 경고했다. 또한 전제정의 진정한 적이자 혁명의 주체는 귀족-지식인(인텔리겐치아)들이라고 여겼으며, 이들의 '혁명'으로 인해 전제정이 무너진다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는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중적 이미지는 [[러시아 혁명]]이 빈곤에 시달리는 산업혁명기의 노동자들의 봉기로 알려지고 있지만 애시당초 노동자 계급이라고 해도 고급기술직이나 중간관리직은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들이며 대게 1861년의 농노제 폐지로 몰락한 옛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단순 임금인상이나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체제 변혁이나 타파를 목표로 하는 혁명으로 바꾸는건 이 귀족들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자유주의자이자 류리코비치 왕조의 방계 대귀족 가문 출신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국가 수장이 되었지만 혁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쓸려나갔으니 러시아 차르들의 혁명에 대한 예측은 적중한 셈이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이념이 형성되기도 했다. 즉 차르들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한건 단순히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들을 탄압한게 아니고, 황제권과 귀족권의 파워게임이며 동시에 더 근본적인 국가 생존에 관한 이념 문제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실패국가로 규정하고 멸망의 필연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영미권 역사학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당대 배경을 살펴보면 폴란드의 귀족들, 동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를 해당 국가들에서 구현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반발하는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멸망을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국이 폴란드의 길을 걷는다면 최후 역시 똑같은 것이라고 경고 혹은 비관적 예측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이 두 상반되는 세력 사이에서 폴란드에 대한 극단적인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일어났고, 이는 정복국가가 피정복국가에 대한 정복이념을 형성하려는 프로파간다 이전에 그냥 자국 정치 문제였다. 우파는 친미성향을, 좌파는 반미성향을 띄면서 서로 미국을 찬양하고 비난하는 것과 똑같았다. 독일인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_von_Haxthausen|아우구스트 폰 학스타우젠(August von Haxthausen)]]은 서구화된(=타락한) 러시아 귀족의 이미지를 지적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부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서구화(폴란드화)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농노제를 정착시켰으며 귀족과 농민과의 민족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건 러시아 이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된 리투아니아나 우크라이나의 루스계 귀족들에 대한 견해에서부터 먼저 나타난다. 당장 해당 문서에도 존재한다.] 슬라브주의적 성향이 있는 [[레프 톨스토이]]가 괜히 러시아 농민만을 '진정한 러시아인'이라 칭하고, 러시아 고전문학에서 폴란드인들을 탐욕스럽고 부패한 악덕 지주로 묘사한게 아니다.[* 역으로 [[독일인]]들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순종적인 인물들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극단적인 경우 서구화가 러시아 내에서 폴란드인, 독일인들의 지배적 우위를 확보해주는 러시아인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인식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 민족주의의 발흥과 이후 제국 내 비러시아인들에 대한 러시아화(Русификация)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부터 소련과 현대 러시아 연방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인들의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에 타락한 서구문명'''이라는 반서방적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게 [[동로마 제국]]이다. 세계총대주교좌에서 벗어나려는 중세 러시아 정교도들도 동로마를 깠지만[* 동로마 제국이 교회를 이용해서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교도(오스만)에 정복당한 그리스인들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였다.] 중세 이후 서구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쇠락한 동로마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럽에서부터 고립되었고 억압적인 전제정을 창조했으며, 때문에 만약 러시아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였으면 '폴란드처럼'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과 인식들의 대다수는 이념적, 정치적 이유로 과장된 것이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기도 힘들다. 중요한 점은 진실이 어떻게 되든 당대 러시아인들이 이를 믿고 행동했으며, 러시아의 역사 흐름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폴란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