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연방의 전성기 === 지그문트 2세의 사후 신분제 의회인 세임[* [[프랑스 왕국]]의 [[삼부회]]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현재에도 [[폴란드]](Sejm)와 [[리투아니아]](Seimas), [[라트비아]](Saeima)의 의회가 이 이름을 쓰고 있다.]은 서둘러 연방의 군주를 선출하였고 그 결과 두명의 인물이 물망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인도 아닌 외국인인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왕조]][* 정확히는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앙굴렘]의 국왕 [[샤를 9세]]의 동생 [[앙리 3세|앙주 공작 앙리]]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의 [[대공(작위)|대공]]인 [[막시밀리안 2세]]의 4남이었던 에른스트 대공이었다. 이들은 각각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부친 막시밀리안 2세의 후원을 등에 업어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했고, 그 결과 카트린이 슐라흐타들에게 강하게 유세하면서 앙리 드 발루아가 세임에 의해 헨리크 발레지로서 왕위에 선출되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헨리크 발레지가 지그문트 2세의 누이동생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되어 형 샤를 9세가 죽자 도망치듯이 크라쿠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 즉위했다. 그는 폴란드로 돌아오라는 귀족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연방의 왕위에서 사실상 물러났다. [[계획대로]] 안나와 결혼했으면 프랑스-폴란드 [[동군연합]]을 이루었겠지만 절대군주정인 프랑스에서 자란 헨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헨리크 조약은 폴란드 왕위 세습도 금지했으니 그가 죽으면 어차피 동군연합은 자동으로 해체됐을 것이다. 그의 폴란드식 이름을 따 헨리크 조약이라 명명된 이 조약은 다섯 조항으로 되어 있다. 첫째, 국왕은 세임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 둘째, 국왕은 입법부인 세임을 2년에 한번 6주간 열게 한다. 셋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 조세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넷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총동원을 할 수 없다. 다섯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선전포고와 정전을 선언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세임에 의해 권력이 매우 제한된 완전한 [[꼭두각시]] 국왕이었다.[* 그러나 헨리크 발레지 역시 술과 도박에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오늘날 폴란드에서는 먼 나라에서 와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불평불만이나 하다가 곧 돌아간,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 모를 [[잉간]]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고.] 이런 정치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헨리크 입장에서는 폴란드의 상대적으로 추운 기후, 음식, 그리고 나름 바르샤바, 르부프, 크라쿠프 같은 곳은 발달했지만 [[파리(프랑스)|파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던 낙후된 도시 문화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도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앙리 3세에게 보낸 귀국 요청이 거절당하자 이전에 아들을 내세웠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직접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후보자로 직접 나섰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일부 폴란드 귀족들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스테판 바토리]][* [[헝가리어]]로는 '바토리 이슈트반'. 그 유명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외삼촌으로, 스테판의 누나 언너가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에게 즉위를 제안하였다.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한 끝에 국왕 선거에서는 막시밀리안 2세가 승리했으나 폴란드 내 신교도 귀족들이 그가 가톨릭 교도라는 점을 들고 반대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에서 신교도에게 가장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지독한 가톨릭 원리주의자였던 것을 본다면 신교도 귀족들의 반대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결국 스테판 바토리가 신교도 귀족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재빨리 움직여 두 사람이 연방의 공동 군주로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공위 시대를 거치며 폴란드 귀족인 슐라흐타들의 세력의 권력이 강해지는 입헌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국왕이 아닌 슐라흐타들이 세력을 잡은 세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또한 그 슐라흐타들 위에 극소수의 대귀족들인 마그나트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리베룸 베토]]와 공통의 정치 목적을 위한 단체를 만드는 권리인 콘페데라치아를 이용해 국왕과 소귀족들인 슐라흐타들을 통제했다. 이때부터 연방은 거대한 입헌군주국으로서 동유럽에 명실상부한 깡패국가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안나 여왕이 수도 [[크라쿠프]]에서 내치에 집중하는 동안 스테판은 풍부한 왕실 재산을 미끼로 일부 귀족들을 끌어들여 군사개혁을 실시해 병사와 기술자로써 훈련을 받는 농민병인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라 불리는 준상비군형 보병부대를 창설했고, 또한 코자키들을 등록 코자키군이라 하여 대거 비정규군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후사르를 중무장해 후일 [[윙드 후사르]]라 불리게 된 정예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또한 연방에서 벗어나려던 [[단치히]]를 무력으로 복속시켜 연방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게 된다. 1582년 [[이반 4세]]의 사후 혼란기의 [[루스 차르국]]을 공격해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프스코프]]까지 당도하자 이에 루스 차르국에서 협상을 제의해 결국 얌 자폴스키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를 영토로 편입하였다. 1586년 스테판 사후 안나 여왕이 단독군주가 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못해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바로 선거를 치루도록 지시하였다. 1년간의 공백 끝에 선출된 스웨덴의 왕세자 [[지그문트 3세 바사|시기스문드]]는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스웨덴)|요한 3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1세]]의 외손자로, 안나 여왕의 조카이기도 했다. 지그문트 왕자는 이모 안나 여왕의 지지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2세]]의 동생 막시밀리안 대공과 왕위를 경쟁한 끝에 이모부인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의 치세는 연방의 짧은 전성기인 동시에 긴 쇠퇴기의 시작이었다. 1592년 지그문트 3세는 아버지가 승하하자 곧바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두 국가의 군주가 되었지만 지그문트 본인은 폴란드에 남았다.[* 스웨덴은 모국이자 부왕 요한 3세가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귀족 계층이 지지했던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선출 군주인데다가 외국인이어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안정된 스웨덴을 귀족들과 숙부에게 맡기고 본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집중하는 것이 일리는 있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 스웨덴은 신교 국가였으나 지그문트 3세 본인은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한 터라, 스웨덴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결국 재위 6년만에 섭정이었던 숙부 [[칼 9세|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이를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패한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로 도망친 사이에 칼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스웨덴 의회를 가득 채워 지그문트 3세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켰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1605년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얀 카롤 호드키에비치]](Jan Karol Chodkiewicz)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에스토니아 공국#s-2|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침공했으나 다 이긴 전쟁에 입법부인 세임이 [[리베룸 베토]]를 내세우면서 정전을 선언해 결국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루스 차르국의 [[혼란 시대]]를 틈타 등장한 [[가짜 드미트리]]를 이용하면서 루스 차르국을 신나게 털어버리며, 1610년부터 1612년에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며 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고, 당시 차르였던 [[바실리 4세]]를 바르샤바로 압송해 지그문트 3세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지그문트의 아들]]을 루스 차르국의 차르 자리에 앉혀놓는 등 루스 차르국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 2년만에 쫒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이후로도 [[스웨덴 제국|스웨덴]]의 [[칼 12세]], [[프랑스 제1제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까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한, 역사상 마지막으로 [[모스크바]]가 외세에게 점령당했던 경험이다.[* 훗날 국력 관계가 역전된 [[러시아 제국]]과 이를 계승한 소련이 폴란드를 그토록 가혹하게 공격하고, 탄압했던 것도 이런 전례가 있어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무슨 무해한 작은 이웃이 아니라 자국에게 실존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고,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다른 변경 지대가 폴란드 주도로 독립적인 하나의 세력으로 묶여버리면 이런 실존적 위협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같은 후대 폴란드의 지도자들도 똑같은 계산에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키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가 소련을 견제할 만한 국력을 아예 '''정신적인 차원'''에서부터 갈아버리자고 [[카틴 학살]]을 저지르며 저런 상호 불신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여하튼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러시아가 동유럽의 패자, 나아가 세계적 열강으로 클려면 반드시 꺾어야 하는 전통적인 강적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연방과 [[오스만 제국]]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던 코자키와 [[크림 칸국]]간의 전쟁과 현재의 [[루마니아]] 서부와 [[몰도바]]에 있던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1620년에서 21년까지의 전쟁으로 16세기 후반부터 주장해왔던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더군다나 노원수인 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전쟁 중 병사했고 그나마 첫 전투였던 체초라 전투에서 패배해 왕국대원수였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Stanislaw Zolkiewski)가 전사했다. 그래도 연방은 세임의 결정으로 [[30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사태를 주시해 국력을 크게 낭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쫓겨난 스웨덴 왕위에 계속 미련을 가져 몇 차례에 걸쳐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고 스웨덴은 연방의 [[리보니아]] 지역을 노리면서 몇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당시 스웨덴의 국왕은 지그문트 3세의 사촌,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로 그의 치세 동안 강력해진 [[스웨덴군]]의 공세에 밀려 무적의 기병대 [[윙드 후사르]]가 야전에서 여러 번 패하는 등 국제적 위신이 떨어졌다. 결국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로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스웨덴의 실질적인 리보니아 점유를 인정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