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운산 (문단 편집) ==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 == 1850년, 상황은 급격히 흐르고 있었다. 당시 열악한 치안상 향촌에서 자체 운영하던 자경단과 배상제회의 충돌이 빈번했고 지방 토호들의 압박으로 신자들이 감옥에 가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발하듯 태평천국 역시 청나라를 [[요괴]]라고 묘사하며 긴장감은 고조됐다. 이에, 홍수전은 4월에 [[용포]]를 착용하고 7월에 동원령, 10월경에는 경계태세의 확립, 10월 29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서 군사집단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여기에 풍운산도 동조하여 군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호 체계와 부대 단위 설치에 기여했는데 자세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단위를 편성하여, 표식과 깃발을 통해 각 부대를 구분했다. 오장(伍長)이 4명을 통솔하고, 양사마(兩司馬)가 오장 5명 및 그 휘하의 부하들을 합쳐 25명을 통솔하며, 양사마는 가로 세로 75cm의 깃발을 들게 했다. 양사마 4명 및 그 부하를 합친 104명은 조금 더 큰 깃발을 가진 졸장(卒長)의 명령을 받고, 이러한 등급은 여수(旅帥), 사수(師帥), 군수(軍帥)에까지 이르게 되어, 군수는 휘하에 총 1만 3,155명을 이끌었다. 군수까지는 훗날 태평천국이 세력을 떨친 후 지방을 통치하는 향관(鄕官)의 역할도 하게 된다. 이후에는 장군(將軍), 총제(總制), 감군(監軍) 등의 단위도 설치됐지만 당시 태평천국의 인원 규모는 약 20,000명을 넘기지 못했다. 각각의 단위는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을 사용하여 구분할 수 있게 하고, 각각 계급에 따른 표식과 심지어 암호명까지 서로 주어졌다. 풍운산은 야간의 비상사태에 사용할 소리 암호까지 고안했다. 이 방법은 유학을 공부한 적 있는 풍운산이 《[[주례]]》에서 따온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머리가 커진 [[양수청]]과 [[소조귀]]는 쓸데없는 행동이라 비판했다고 한다.[* 양수청과 소조귀는 개인의 지능과는 별개로 태평천국 내에서도 학력이 없는 축에 들어간 것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또한 각각 단위 부대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삼각 깃발을 사용하여 구분했고 삼각 깃발 안에는 굵은 글씨로 그들의 근거지가 적혀 있었다. 당연히 이걸 가만히 두고볼 수 없으니, 청나라도 토벌에 나섰다. 다만 1850년 12월 8일의 장계를 보면 태평천국의 성질에 대해서 아직 파악은 못하고 단순히 기독교의 한 무리라고만 인식한 걸로 보인다.[* 아편전쟁의 결과 많은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포교하여 신자가 광동, 광서에 상당히 존재했다.]1850년 12월, 심주(潯州)[* 계평(桂平)의 당시 명칭. 심주는 당시 계평현(桂平県)・평남현(平南県)・무선현(武宣県)・귀현(貴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계평현만이 남아서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으로 남아있다.] 협부장(協副將) 이전원(李殿元)이 평남현(平南縣) 사왕우(思旺圩)[* 현재 구이강(贵港)시 핑난현(平南県) 시지에향(思旺乡)]에 와서 화주(花州) 산인촌(山人村)[* 현재 구이강(贵港)시 핑난현(平南県) 후아왕(花旺). 핑난현에서 북쪽 방면인데 앞에는 오강(呉江)이 흘러서 계곡이 있었고 뒤쪽은 절벽이었다고 한다.]에 있는 홍수전 및 그의 가족이 사는 곳을 포위했다. 이곳은 태평천국의 네 군데 근거지 중에서도 가장 험지에 있었다. 풍운산과 홍수전은 거기에 머무르는 중이었는데 은밀히 뒷길을 통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양수청은 금전촌에서 지원군을 보내 청군을 물리쳤다. 이때 관헌과 관병 50여 명이 살해당했다. 위기를 넘긴 홍수전과 풍운산은 금전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에 청나라는 총병(總兵) 주봉기(周鳳歧)를 사령관으로 하고, 이극탄포(伊克坦布)를 선봉장으로 한 3,000여 명의 토벌군을 보냈다. 하지만 1월 1일, 금전촌 전투에서 선봉이 풍운산, 석달개, 홍수전의 중군을 치던 중, 채강촌에서 양수청과 소조귀의 군사들한테 양옆으로 공격받아 이극탄포를 포함한 군관 10명과 병사 300여 명이 전사했다.그리고 배상제회는 승전을 홍수전의 생일과 함께 축하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배상제회는 20,000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