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아노 (문단 편집) == 역사 == [[건반악기]] 중에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악기]]이다. [[메디치 가문]]의 악기 관리인 겸 악기 제작자였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피아노의 원형을 발명했다. 다만, 본인은 정확한 발명 시점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고, 1700년에 주변인의 메모에서 '크리스토포리가 개발한 셈여림이 가능한 악기의 시연'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온다. 이를 통해 크리스포토리가 1698~1700년경 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토포리 본인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그보다 한참 나중인 1710년에 작성된 문서인데, 이를 두고 피아노가 1710년에 발명됐다고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1710년의 기록은 이 악기를 3대 제작했다는 것이어서 그보다 한참 전에 발명된 것이 명백하다.] 최초의 이름은 "Un cimbalo di cipresso di piano e forte"(셈여림이 있고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든 쳄발로) 내지 "gravecembalo col piano e forte"(셈여림이 있는 그라비쳄발로)라는 긴 것이었다가 '포르테피아노', '피아노포르테'로 줄여서 불렸고, 나중에는 '피아노'로 굳어지게 된다. 당시의 것은 54개의 건반을 갖추고 있었고, 외형적으로는 하프시코드에 상당히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이미 해머, 이탈장치, 댐퍼라는 기술적인 혁신으로 강약조절이 가능한 피아노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1732년에는 [[독일]]의 고드프리트 실베르만이 이를 복제하여 자신의 피아노를 내놓은 후 댐퍼를 조절하는 핸드스톱을 추가하는 등의 개량을 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피아노가 하프시코드를 완전히 대체하다시피 했지만, 처음부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엘리트 음악인들 사이에서 피아노가 하프시코드를 대체하는 데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초기 피아노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고 그 자신은 피아노를 위한 곡을 평생 쓰지 않았다. 그는 1736년 당시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고드프리트 실베르만이 만든 피아노를 처음 접했다. 이때 바흐는 그 악기가 건반액션이 너무 뻣뻣하다고, 쉽게 말해서 칠 때 [[건반]]이 너무 뻣뻣하게 들어간다고 지적하면서, [[음색]]이 평범하며 높은 [[음역]]대의 소리가 약하다고 혹평했다. 그 후, 1747년 [[상수시 궁전]]에서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요청으로 그의 피아노를 연주하고 [[립서비스|훌륭한 악기라는 평]]을 했지만, 피아노를 14대나 사들인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면전에서 그의 얼리어답터성 애장품을 깎아내리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 악기를 위해 수많은 곡을 쓴 바흐지만 그 후로도 피아노곡을 쓴 일은 없었다. 바흐의 건반 곡들은 거의 [[클라비코드]], [[하프시코드]], [[오르간]] 등으로 작곡됐고, 피아노곡으로 지시된 곡은 단 한 곡도 없다.[* 그가 작곡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은 현재는 주로 피아노로 연주되지만 이 곡 역시 '''하프시코드로 작곡된 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악기 제작자들의 연구를 통해 피아노는 점차 개량되어 간다. 1700년대 후반에는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독일식 피아노 개량형을 개발한다. 연주성을 개선한 슈타인 피아노는 [[모차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하프시코드 신동으로 여러 하프시코드 곡을 썼던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접하고는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작곡에 사용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이 당시만 해도 발 페달이 개발되지 않아 하프시코드처럼 손으로 스톱을 조작해 울림을 조절해야 했지만, 슈타인 피아노에서는 그 대신 연주자가 왼쪽 무릎과 오른쪽 무릎을 들어올려 건반 밑바닥에 댐으로써 오늘날의 페달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오른쪽 무릎은 서스테인 페달, 왼쪽 무릎은 대략 소프트 페달 정도.] 댐퍼 페달은 1780년대 들어서 [[영국]]의 존 브로드우드가 고안했다. 또한, 이 시기 즈음에서 피아노 건반 색깔이 하프시코드와 반대로 바뀌어 오늘날 피아노와 같은 흑건/백건 구성이 되는데, 피아노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미관이 중시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백건이 많은 것이 아름답고 흑건이 안쪽에 있는 것이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800년대 초반에는 세바스티앙 에라르(Sébastien Érard)가 이중이탈장치(Double escapement)를 발명했는데,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발명했던 이탈장치에 비해 더욱 빠른 연타가 가능해졌다. 또한, 이 시기에 피아노는 연주회의 대중화와 맞물려 음량을 키워달라는 요구에 따라 철제 뼈대를 도입하게 된다. 현을 길게 하고 장력을 강하게 걸면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고 따라서 연주회를 더 큰 규모로 열 수 있는데, 목재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현의 장력이 올라간 것이다.[* 현대적인 그랜드 피아노의 현에 걸리는 장력은 최대 20~30톤에 이른다.] 1800년대 중반에는 [[스타인웨이]]가 저음의 현들을 가로질러 배치하는 오버스트렁 스케일을 개발했다. 189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개수인 88개의 건반이 자리 잡았다. [[뵈젠도르퍼]] 모델 225의 92건반, 임페리얼(290)의 97건반처럼 더 많은 건반도 있지만, 많은 메이커에 채택되지 않았으며 해당 모델에서도 추가된 저음 건반은 잘 쓰이지 않는다. 기술적으로는 건반을 계속 늘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주파수를 감안하면 음악적으로는 의미가 적다고 한다. 한편, 가정용 피아노의 계보는 1766년 요하네스 줌페의 스퀘어 피아노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퀘어 피아노는 기존의 피아노를 중산층의 응접실에 들어가기 적합하게 줄임으로써 피아노가 가정용 악기로 자리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줌페의 피아노는 기술적으로 볼 때는 액션을 단순화함으로써 연주 성능을 희생했지만, 그 대신 가격을 낮추는 것은 물론 실내 한 켠에 놓을 수 있는 정도로 피아노를 소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스퀘어 피아노는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여 당대 중산층의 가정을 묘사하는 회화에 자주 등장한다. 당시에도 피아노는 집안의 교양을 상징하는 인테리어로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현을 건반에 수직 방향으로 세운 업라이트 피아노는 1800년에 필라델피아의 존 아이작 호킨스가 처음 발명했고, 1811년에 영국의 로버트 워넘이 현대적인 구조에 가까운 업라이트 피아노를 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