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명숙 (문단 편집) === 정계 활동 ===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시작으로, 이듬해 신설된 초대 [[여성가족부장관|여성부장관]]을 역임했다. [[국민의 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호주제]] 폐지 및 여성쿼터제 역시 한명숙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며, 모성보호법 차원으로 생긴 [[출산]]휴가, 최대 5년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등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환경부장관]]이 됐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땐 지역구 도전에 나서 [[고양시]] [[고양시 일산동구(선거구)|일산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재입성했다.[* 상대는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현직 전국구 의원 [[홍사덕]]이었다. 홍사덕은 이후 한나라당을 떠나 4년간 원외 생활을 하다가 [[친박연대]]에 입당한 후 [[대구광역시]] [[서구(대구 선거구)|서구]]로 내려가서 6선에 성공한다.] 경륜은 물론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 덕분에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내렸고, [[이해찬]]에 이어 총리가 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여성 국무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2년 [[장상(1939)|장상]]이 서리직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끝내 임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다. 장상은 한명숙보다 5살 위인 1939년생으로,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국무총리 재직 시절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조정 능력으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KTX 승무원 집단 해고 문제와 캠프 험프리스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대추리 강제 진압 등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1년 간의 총리 직을 마치고 퇴임 후, 암울했던 당에 복귀해 2007년 말 [[제17대 대통령 선거|대선주자]]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이후 혼돈에 빠진 경선 레이스에서 [[이해찬]]과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고 양보했지만, 정작 이해찬은 경선 3위로 떨어졌고 이해찬과 손학규를 꺾고 본선 후보로 나선 [[정동영]]도 [[이명박]]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과정의 당내 잡음 및 패배 후유증으로 [[친노]]와 비노로 갈라졌고, [[이해찬]]과 [[유시민]]이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에 남은 한명숙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를 공천받았으나 낙선했다. 초반 여론 조사로는 무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백성운]] 후보[* 이명박 대통령당선자 인수위 행정실장 출신. [[일산신도시]] 건설 무렵에 관선 고양군수를 지낸 이력이 있다.]에 10% 가량 앞서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불과 투표 사흘 전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이 지역 대표들에게 밥을 산 것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됐고 결과는 3.3%차의 패배. 설상가상으로 2차례의 정치자금수수 혐의로 2009년 기소되면서 수년간 곤혹을 치뤘다.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대한통운 건은 무죄를 받았으나, 한신건영 건은 유죄 판결이 확정돼 실형이 선고됐다. 자세한 과정은 후술된 내용 참고 2010년 대한통운 정치자금수수 혐의에서 벗어난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경선(100% 여론조사 방식)에서 [[동작구 을]] 17대 국회의원 출신인 [[이계안]]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됐고 더구나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져 언론 보도와 여론은 야당인 민주당에게 불리했다. 선거 2주 전 여론 조사로도 적게는 11.9%포인트(조선일보), 많게는 22.8%포인트(중앙일보) 오세훈의 리드였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서울]]만은 [[광우병 논란]], [[용산 참사]]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및 향수가 있어 한명숙이 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투표 당일이 되자 자체 조사상 한명숙의 근소한 역전이 점쳐졌다.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자들과 최초의 여성 [[광역자치단체장|광역단체장]]이 되고 수부도시인 서울을 탈환하는 승리 예감을 만끽할 정도였다. 그러나 강북에서 근소하게 앞서서 부진한데다, 결정적으로 막판 [[강남 3구]]의 오세훈 지지표에 덜미를 잡혀 다시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강북에서 불과 10만여표 격차로 벌렸고, 강남3구에서만 12만여표 격차로 패했다.]. 불과 0.6%p 차의 석패였다. 그리고 [[2022년|12년 후]] [[제20대 대통령 선거|더 큰 무대에서]] [[이재명|역사는 되풀이되었다.]][* 다만 실제로 엄청난 차이가 있던 여론조사와는 달리, 대선에서의 여론조사는 차이가 근소했으며 경우에 따라 이재명 후보가 이기는 여론조사 또한 존재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그리고 그 대선에서 정확히 3개월 뒤 옆 동네인 경기도에서 이보다 더 한 초접전으로 경기도지사가 갈렸다.]][* 이 선거에서도 서울시장에는 5회 지선 당시 한명숙 본인을 꺾었던 오세훈이 다시 나왔는데, 피말리는 접전 끝에 겨우겨우 당선된 5회 지선과 달리 [[송영길]]을 상대로 전 행정동 올킬로 완전히 대승을 거두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당시에는 최고위원 경선과 당대표 경선을 따로 하지 않고 1위 당선자가 당대표가 되는 집단지도체제였어서 대표최고위원이라 불렸다. [[박영선]], [[김부겸]] 등이 최고위원이었다.]으로서 선거를 지휘했고 본인 역시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에게 질질끌려다닌 야권 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에서 당내 갈등, 임종석 사무총장 내정 문제, 비례대표 공천 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여론 결과가 이어졌음에도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에게 단독 과반을 내주고 완패하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정치자금법 위반죄로 실형을 산 것에는 판결이 과하다 정당하다를 놓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 당시 총선의 대 참패는 모두가 무능하다고 까고 있다.[*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측에서는 한명숙이 박근혜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이라 말할 정도다.] 오죽하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인해 실형 판결을 받은 것보다 정권 교체가 가까워진 19대 총선 때 보인 무능함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할 정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