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몽관계 (문단 편집) === [[조선시대]] 이후 === 몽골은 [[내몽골]]에 [[북원]]이 들어서고 1388년 붕괴했다. 이후 내몽골은 [[명나라]] 및 [[오이라트]] 쌍방과 고비 사막과 [[만리장성]]을 경계로 각각 대립하다가 [[후금]]이 들어선 이후 [[북원]]의 후계인 차하르부가 [[숭덕제|청태종]]에게 귀부하여 원의 옥새를 바치면서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고, 혼인 동맹으로 사실상 복속되었다. 그리고 외몽골의 경우 할하 부족이 정착하였으나 곧 등장한 오이라트의 후신 [[준가르]]의 위협을 받다가 청에 복속했다. 조선 초기에는 몽골과의 교류가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몽골어가 가능한 역관들을 육성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첩해몽어]], [[몽어유해]], [[몽어노걸대]] 같은 몽골어 교재가 출간되기도 했다. 원나라가 몰락할 때 [[탐라총관부]]가 위치해 있던 제주도가 고위층의 피난처로 고려되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에서 북원을 정벌하고 조선의 군력을 견제하고자 대량의 군마를 요구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원나라 시기 목장으로 사용됐던 제주도의 군마로 조달하고자 했다. 여기에 몽골계 목호와 동조한 현지인들이 거세게 반발하였고 그들의 군력이 너무나 막강하여, 이전 고려시대의 [[목호의 난]] 때처럼 진압에 애먹어 세종 대에야 겨우 진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외몽골 둘 다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사실상 한몽교류는 끊겼다가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때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팔기군]]의 일원으로 등장한 내몽골 [[기병]]들이 한성을 약탈하면서 최악의 형태로 돌아왔다. 참고로 청나라의 초기는 몽골 제국을 계승한 만주족을 표방한 만몽연합정권의 성격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홍타이지)은 만몽혼혈이었다. 즉, 그의 아버지는 누르하치(청태조-만주족)이고 어머니는 몽골족의 공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으로서는 [[대몽항쟁]]의 악몽을 떠올릴 만했다. '''한성 약탈을 자행한 팔기부대(기마병)의 주력은 분명히 몽고병''', 즉 내몽골군으로 청병이라 표시된 만주군이나 한병이라 표시된 중국군과는 구별된다. 또 [[삼전도의 굴욕]] 당시에 항복 문서는 [[몽골어]]와 [[한문]]으로 적히기도 했다. 이후 조선에 [[우역]]이 돌자 몽고에 사절단을 보내 [[소]]를 대거 수입해오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