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순 (문단 편집) === 초년기 === 현순은 1880년 3월 28일 [[한성부]]에서 현제창(玄濟昶)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맡았으며, 부친 현제창은 [[독립협회]]에 가입해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했으며, 1898년 11월 4일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 17명 중 한 사람이었다. 현순은 이러한 부친의 밑에서 외국어를 공부했으며, 일찍부터 개화에 대한 관심을 품었다. 이후 장성한 그는 관립영어학교와 군사학교를 다녔지만, 1898년 한성영어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허치슨의 고압적인 교육방침에 크게 반발하여 그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나 좌절하고 학교를 떠났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서재필]]의 지지자가 되었고 [[이승만]] 등과 친분을 다졌다. 1899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뒤, 현순은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도쿄]]에서 ‘Jun Den KiuKo Sa'라는 학교에 입학해 세계사·지리·화학·물리·수학 등을 공부했다. 이 학교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순천(順天)’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기독교]]를 접한 그는 1901년 [[선교사]] 피쉬(Fish)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2년 학교를 졸업한 현순은 과학 공부를 계속하려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별다른 일자리가 없어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는 동아개발회사(東亞開發會社)의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 이민을 결심했다. 그는 인천 용동감리교회의 목사 G.H. 존스로부터 감리회 신앙공부를 이수한 뒤 1903년 2월 8일 가족과 함께 제2차 이민단을 인솔하고 하와이로 떠나 3월 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