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유용 (문단 편집) === 호유용의 옥 === 그렇게 명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호유용은 한순간에 제거당했다. [[1379년]]{{{-2 (홍무 12년)}}} 점성국(占城國)[* 옛날 [[베트남]] 중남부에 있었던 [[참파]]] [[사신#s-1]]의 입조(入朝) 미보고 문제로 예부(禮部)와 충돌을 겪은 일이 화근이었다. 이 문제가 드러나자 홍무제는 그동안 보여준 총애는 온데간데 없이 호유용을 혹독하게 추궁했고 호유용은 [[조정#s-3]]에서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이때 호유용과 함께 추궁되고 사죄했던 우승상 왕광양(汪廣洋)이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첩 진씨(陣氏)가 곧 따라 죽자 그 사망 사건을 조사하던 중 지방관이었던 진씨의 아버지가 처벌되어 중서성에 재산과 처자를 몰수 당하는 과정에서 왕광양이 멋대로 진씨를 첩으로 삼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총책임자인 호유용을 비롯하여 중서성과 육부 관리가 모두 죄목에 엮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호유용의 아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 수레와 부딪혀 죽자 호유용이 그 수레 끄는 사람을 멋대로 죽인 것을 홍무제가 알게 되었는데 그 죗값을 치를 때 재물로 형벌을 대신하지 못하게 했다. 호유용의 추락이 계속되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호유용 파벌의 하나인 어사중승(御史中丞) 도절(涂節)이 [[1380년]]{{{-2 (홍무 13년)}}} 호유용의 모반과 성의백(誠意伯) [[유기(명나라)|유기]] 독살 혐의를 고변하면서 사건은 급진전되었다. 황제를 기만하고 국정을 [[농단]]한 혐의, 친인척이나 자기 파벌을 멋대로 벼슬에 앉히거나 공권력을 남용하는 등의 각종 인사 및 행정 비리, 문무관을 포섭하여 반란을 꾀한 혐의에 추가 증언들이 쏟아지면서 호유용과 그 일파는 선수를 쳐 고변한 도절을 포함하여[* 비록 모반에 참여했어도 처음 고변한 사람의 목숨은 살려주는 게 보통이지만, 주원장은 도절이 모반에 참여한 후, [[토사구팽|실패가 확실시 된 뒤에야 고변했다는 명분을 들어 그를 죽였다.]]] 대거 숙청되었다.[* 드라마《주원장》의 최후는 정말 끔찍한데, 호유용이 범죄 혐의로 인해 수감된 옥에서 이와 벼룩 때문에 간지럽다고 말하자 홍무제는 "그럼 간지러워서 죽는 형을 내리겠다."고 하여 상의 탈의 후 나무에 묶어 놓고선 모기들이 밤낮을 물게 하였다. 물론 모기 물린 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사겠지만... 나중에 죽은 모습을 보면 상체가 벌겋게 되어 있을 정도. 얼마나 가려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홍무제의 독한 법 집행을 본보기로 만든 듯 하다.] 호유용이 처형된지 4일 만에 홍무제는 [[승상]]직과 중서성을 혁파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육조|육부]] [[상서(관직)|상서]]들의 관품(官品)을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올리고 황제의 업무를 도와줄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겸임시켰다. [[영락제]] 시기에는 문연각에 여러명을 입직시키며 [[자문#s-2]]에 응하도록 하여 내각대학사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각대학사가 과거 [[상국]]이나 [[승상]]의 역할처럼 변질되고 내각의 역할이 이전의 성(省)들처럼 변질되는데 이 내각 제도는 [[청나라]]에도 이어졌고, 영어 단어 Cabinet의 번역어로 채택돼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1386년]]{{{-2 (홍무 19년)}}} 호유용이 [[왜국]]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1390년]]{{{-2 (홍무 23년)}}} [[북원]] 정벌 중 포로로 잡힌 북원 측 인사를 조사하던 중 호유용이 이선장을 포섭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왜국과 북원과 결탁했다고 큰 소리친 혐의[* 신성곤 & 윤혜영의《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에서는 이 호유용의 옥에서 "모반을 위해 북원과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반역 & 매국노라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론몰이]] 정도는 확실할 테니까.]와 관련자가 드러나, 10년 전에 겨우 목숨만은 건졌던 연루자들에게 다시 피바람이 불면서 이선장 등 주요 공신들도 마저 [[숙청]]당했다. [[중국]]에서 '''호유용안(胡惟庸案)'''이라고 하는 이 사건으로 호유용 파벌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파벌에 연루된 관료와 그 일족만 해도 이 사건으로만 12년 동안 무려 30,000여 명이 처형되었고 같이 처형된 고위 관료만 해도 20여 명이 넘을 지경이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나라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반골의 기질이 강했고 권력을 탐하고 황제에게 모반한]] 역사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간신]]으로 기록됐다. 정사와 야사를 종합하면 호유용의 [[국정농단]]은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 호유용은 자신의 재능과 권력을 과신했고 정치적으로 무모한 행위를 자주 저질렀다. 몇몇 사람들이야 호유용이 겉으로는 튼튼해 보여도 황제의 총애를 잃는 순간 무너질 돌탑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그 돌탑이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옹호론을 펼치는 입장에서는 신하들을 [[토사구팽]]하기 위해 이용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이이제이|독으로 독을 제압한 셈이다.]] [[1392년]]{{{-2 (홍무 25년)}}} 정녕후(靖寧侯) 섭승(葉昇)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끝나는가 싶더니 다음해인 [[1393년]]{{{-2 (홍무 26년)}}} 남옥(藍玉)의 옥이 새로 터지면서 숙청은 계속되었다. '''호유용의 옥'''과 '''남옥의 옥'''을 아울러서 '''호람의 옥(胡藍-獄) 혹은 안(案)'''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