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찌민 (문단 편집) ==== 베트남 전쟁의 성격에 대한 쟁점 ==== [[베트남 전쟁]]이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먼저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처음 충돌은 베트남 내전[* 이때 북베트남이 대놓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기 때문에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미국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무리가 있긴 하다.]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과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군부들의 쿠데타로 인하여 남베트남이 불리해지는 와중에 통킹만 사건이 터지자 북베트남을 침략한건 엄연히 미국이었다. 사건 당시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는데 전쟁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돌프 럼멜의 통계를 들이대며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1954년 부터 1975년 까지 최소 13만, 최대 30만으로 추산되는 민간인학살을 벌였으며,[* Rudolph Joseph Rummel의 추정치이다. Rudolph Joseph Rummel는 하와이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 공산권의 집단학살을 주로 연구했다. 특히 집단학살(democide)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굉장히 유명하다.[[http://www.hawaii.edu/powerkills/SOD.TAB6.1B.GIF]]'''...라고 하며 일각에서는 굉장히 학문의 중립성이 보장되는 냥 얘기하고 하는데''' 루돌프 럼멜은 전형적인 미국의 극우반공주의자로서도 유명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미국 민중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반전운동에 나섰을 당시 교수 럼멜은 베트남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 주장하여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로 부터 배척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민주평화론에 입각하여 부시가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과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인 이라크 전쟁을 '중동의 민주화'라는 아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즉 진보성향을 띄는 인물들 하고는 생각하는 구조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현재 미국의 네오콘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럼멜이 만든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뉴스기사에서도 나오는 이상우 교수(이명박 정권 시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과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인물로서 루돌프 럼멜의 저서를 번역하기도 했고, 학창시절 루돌프 럼멜의 그의 지도교수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266922|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에 이상우씨]])처럼 럼멜이 가르쳤던 제자들 대부분은 네오콘에 가까운 정치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작성한 통계자료가 진위여부를 떠나서 학계에서 비판이나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는 작성한 사람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던 네오콘 성향이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어느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1969350|관련 기사]][[https://en.m.wikipedia.org/wiki/Rudolph_Rummel|루돌프 럼멜 위키피디아]] 계획적으로 민간인들과 약자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던 베트콩 및 북베트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나 베트남 전쟁 때 북베트남 같은 공업 저개발국들이 민간인 구역과 군사공업 구역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민간인 오폭에 대한 고려를 씹고 무차별 폭격을 해댄 것은 미군의 큰 잘못이다. 이전 태평양 전쟁에서도 제기된 문제. 태평양 전쟁에서는 없던 문제 하나가 고엽제였는데, 이걸 베트콩들이 드나드는 정글에만 뿌린 게 아니라 남/북 베트남 양쪽의 민간인 거주 농촌에도 뿌려대서 농업을 심각하게 파괴하기도 했다. 특히 남베트남 농촌에 대한 고엽제 살포는 베트콩이 기르는 작물인 줄 알고 뿌려댔는데 알고 보니 민간인 거[[https://en.wikipedia.org/wiki/Agent_Orange|였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남베트남 쪽의 국력을 깎아먹기도 했으므로 도덕적인 문제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심각한 실책이었다. 일각에서는 후에 학살과 같은 베트콩과 북베트남측의 학살을 얘기하며 베트남 전쟁애 대한 반제국주의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자신들의 반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선전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또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봐야한다.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은 비단 베트콩만의 문제는 아닐 뿐더러 연합군측의 학살 또한 적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만 보더라도 수백만톤의 폭탄과 엄청난 고엽제를 투하해서 수백만의 민간인에게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정작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만 문제삼는 사람들은 미국과 연합국이 저지른 베트남 전쟁에서의 만행은 당연하다는 듯이 두루뭉실 넘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양민학살과 테러의 문제를 단순히 베트콩과 공산측의 문제로만 넘기는 것은 단순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관점이다. 당연히 공식 문서 상으로는 미군도 흔히 세간에서 생각하는것처럼 무차별 융단폭격이 아니라 타겟을 구별하는 전술적 정밀 폭격이 교리였다지만 일단 당시 남북베트남 양쪽 모두 도농인구 비율을 고려해보면 하노이만 석기시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가 저어어얼대 양민 피해가 없다와 같지 않았다. 베트남전 당시에도 그랬고 현대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악순환되는 구도지만 저런 미국의 적들이 자행한 만행은 책임 소재가 분명한 '학살'로 명시 되는 반면 미국측이 하이테크 병기로 멀리서 초래한 대량 인명 피해는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 따위 시니컬하게 기계적인 용어로 퉁치고 넘어가려고 한다.] 북베트남의 최고지도자 호찌민도 그 책임을 피할수 없다. '''...라고 하며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호찌민이 일으킨 것으로 보는 일각의 시선이 있는 모양인데,''' 분단 한국의 상황을 분단 베트남에게 일대일로 대입시키는거 자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 자체보다 일차원적인 정치적 이용에 더 관심이 쏠린 노골적인 시각이다.[* 몇몇 사람들이 자유 월남 (베트남) 패망의 교훈이라는 영상물을 틀어주면서 빨갱이가 득실거려서 국민들이 선동당해 망했다. 허구헌날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데모]]나 해서 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당시 남한 내 좌익의 사회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어쨋든 소련군정이든, 김일성 정권 아래든 공산 정권 아래 살아 본 경험 자체가 없고, 따라서 북한의 남침은 일방적인 침략 행위로 국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인식 되었다. 반면 베트남의 경우 질적으로 뿌리 자체가 다르다. 월맹 정부가 프랑스와의 협약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낸 1954년 제네바 협정 당시, 훗날 남베트남의 영토가 되는 [[베트남국]] 영토의 까오다이를 비롯한 무장 종교 교단 세력이 먹은 곳 빼고 60에서 90%가 프랑스 식민 당국 자체의추산으로 월맹의 통치 아래 있었고, 무엇보다 1950년 6월 25일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시간에맞추어 공개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과달리,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의 직접 개입은 일러도 1972년 '[[부활절 공세]]'라 불리오는 춘계 공세다.[* 당연히 북베트남측은 59년부터 직접적으로 베트콩에 대한 전폭적 물적, 인적 지원을 했고 이름만 베트콩이지 실체는 북베트남 정규군인 부대들이 미군, 남베트남군과 교전한 경우도 수없이 많으며, [[이아드랑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어쨋든 공식적인 하노이 정부의 전면적 '참전'은 1972년이고, 애초에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비롯한 밀도 있는 해당 2차 사료들은 60년대 이후 호찌민의 일과는 사실상 병가로 인한 중국에서의 요양과 가끔씩 당내에서 연설 한번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게 베트남 공산당이란 집단도 아니고 호찌민 개인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거 자체가 확대 해석에 가깝다.] 이 이전까지 베트콩과의 전쟁은 실제로 베트콩 내부에 북부에서 파견하여 내려온 조직원의 비중이 작았다 하면 그것도 뻔한 거짓말이지만, 원칙적으로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화 정책 이전 베트남전은 남베트남 내부의 자생적인 게릴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그리고 베트콩 문서에도 들어가보면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사이공 정부에 대한 무력 투쟁은 월맹 정부가 아니라 월남 내 잔존해 있던 베트민 세력으로 인해 시작됐다.[* 출처는 바로 미 국방부 그 자체의 1차 사료인 Pentagon Papers의 그레이블 상원 의원판 1권 5장,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이다.] 물론, 이들은 곧바로 북베트남 정부의 의지 아래에서 활동했으며 그들의 의도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들에게 여러 만행을 저질렀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남베트남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그것이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나 최소한 묵인 같은 걸 받았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고 말이다. 네오콘 성향의 정치학자이자 어용학자 루돌프 럼멜의 근거 출처가 불확실한 통계를 들고와서 침략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3만~30만의 학살을 벌였다고 주장하는데, 각잡고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책임여부를 상세하게 따지자면 저게 전부 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직접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딨는가?[* 물론 학살의 증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구정 공세]] 당시 베트콩이 후에(Hue)에 들어와 1달동안 3~4천명이나 되는 포로와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10만~22만이나 되는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설사 그런 증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대 베트남 당국이 절대 공개할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확실한건 구정 공세 이후 미군-남베트남군이 후에를 탈환 했을 때 수천명의 암매장 된 시체가 나왔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에도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미군 개입 이전이다.)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죽였다.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월남전 당시 일부 주월한국군의 잔학 행위를 사과하며 진상조사가 필요할 경우 이에 협조하겠다고 했을 때, 베트남측이 영 떨떠름해하며 어차피 우리가 승전국이므로 별로 개의치 않으며, 경제협력 얘기나 하자고 한 것은 외국군 못지않게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잔학 행위도 상당했기 때문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만일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뤄질 경우 필연적으로 미군 남베트남군 한국군의 학살과 같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이 수면 위에 오르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월맹과 베트콩을 계승한 현 정부 입장에서는 영 좋지 못한 흑역사이므로 그 문제를 아예 다 묻고 가자고 한 것이다. 물론 주정규군이었으면서 무차별 폭격을 행하고 고엽제를 뿌려 죄없는 민간인들은 물론이며 베트남의 후대인들한테까지 피해를 끼쳤던 미군에 비하면 덜 캥기긴 하더라도 말이다. 1966년 3월 3일 로버트 맥나마라의 증언과 The True nature of Vietnam's(미국정책배경), 4~5면에 따르면 1960년 베트콩이 지방관리와 민간인을 2천명 이상 살해하거나 납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1965년 한해동안 관리, 정부요원과는 별도로 민간인 1665명이 살해되었다 한다. 1970년대 미 육군 법무관 사무실 자료에 따르면 1957~1972년까지 베트콩은 총 36,725명 이상을 학살하고, 58,499명을 납치했다고 한다. 미국이 인정한 공식문서다. 물론 잘한일은 절대로 아니고 학살 자체는 수치와 상관없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치를 생각해봤을때 럼멜의 통계는 다소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할 수는 없다.(참고자료는 전환시대의 논리 p.413과 한겨레 출판에서 출판된 베트남 전쟁 p.105와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272~273이다.) 물론 미국측 문서가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나, 극우주의자 루돌프 렘멜이라는 학자가 제시한 자료의 신빙성이나 중립성은 알아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베트콩 사령관이었던 호앙 반 타이의 경우 포로 학대와 민간인 학살, 강간을 포함한 전쟁 범죄를 원칙적으로 철저히 금했다고 하지만, 의회 보고서에 나오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볼 때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 사실이라고 쳐도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었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울뿐더러, 애당초 교육 종사자들이나 학생들,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 같은 남베트남 정부와 직접 연관이 없는데도 결과적으로는 남베트남 체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까지 억울하게 죽임당한 것을 보면 그런 지시의 신빙성 자체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반면 윤충로 교수눈 자기 박사 논문에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 따르면 베트콩과 같은 세력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기는 했다.(출처: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 p.550) 실제로 위에 상술된 후에 전투만 보더라도,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중엔 북베트남군 장교가 자기측 군대가 학살하는 것을 막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한다.(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77)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미군포로들 증언 중엔 가혹처사 관련한 것도 있고, 총알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는 알아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참고자료: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War in Vietnam] 베트콩이 큰 지휘 체계로 따지면 하노이에 있는 노동당의 지시를 따른건 맞지만, 베트콩 문서에 나와 있듯이 대규모 작전이 아닌일상적인 차원에서 게릴라전은 현지 지도부 재량으로 움직였고, 월맹에서 남파된 인원이 많았다 한들 애초에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외곽은 프랑스 식민시절 부터 독립 공산 세력의 안마당 같은지방이라서 그 남파된 인원도 막상 따지고 보면 남베트남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이 호찌민이 전쟁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례가 쿠바에 있는데, 바로 쿠바계 이민자들이 미군의 원조를 받아 벌인 [[피그만 침공]]이다. 피그만 침공이 쿠바계 이민자들이 했으니 미국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애초에, 적지에 대해 잘 아는 적국 출신 변절자를 첩보원으로 기용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남베트남과 미국 연합군도 월남한 전직 북베트남군 장교들을 첩보원으로 다시 북파시키고는 [[https://gall.dcinside.com/m/war/1308018|했는데]],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의 북파 공작원들이 남베트남과는 큰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결국 베트콩에 남쪽 출신 인물이 재남파된 인물이 많다는 걸 근거로 이들이 반쯤 독립적인 조직이며 베트남 공산당과 그 우두머리 호치민이 베트콩의 침략행위 및 만행에 책임이 없다는 건 끼워맞추기조차 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미 베트콩의 공식적인 결성일인 1960년보다 3년 이른 1957년, 각 시골 지역의 인물들에 대한 각종 테러가 자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RAND 연구소에서 1970년에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지금의 [[DARPA]])를 위해 연구해 제출한 보고서에 [[https://apps.dtic.mil/sti/pdfs/AD0870240.pdf|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당시의 테러리즘은 주로 마을 촌장,입법 위원회의 위원장, 일반 경비원이나 시골 지역의 전 명사 등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시골의 권력층에 집중된 것이며, 1960년부터 시작되는 베트남 일반 양민들에 대한 전면적인 폭력과 학살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이들 목표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불순하기 짝이 없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교 탄압 등의 실정에 대한 저항이 목적이라면 어디까지나 사이공의 중앙 정부 인사들이나 가톨릭 인사들에게 집중되었어야 할 테러가 오히려 아무 상관 없는 시골 인사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이 테러리즘 행위는 남베트남 체제 그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더러운 선제공격이 북베트남 쪽의 지령에 의해서건 아니면 남베트남의 자생적 공산주의 및 다른 반정부 인사들의 자체적인 공작이건, 북베트남 및 호치민 옹호파가 주장하는 '58년까지 조용히 있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분개해서 들고일어난 저항세력'이라는 전제는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의 한 RAND 쪽 첩보원이 1958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베트민의[* 베트콩은 아직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전이었으므로] 테러리즘은 더 이상 대 프랑스전쟁 당시의 지방 행정관에 대한 협박에 그치지 않고 시골 현지의 경찰 간부나 경비원들, 마을 재무담당자나 청년지도자들 등에 대한 테러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게 최종적으로 누구에 의한 결정이건간에, 남베트남 정권 핵심 인사도 아닌 각 시골마을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즉 남베트남 체제 자체에 대한 테러리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항전의식으로 뭉친 저항세력이고, 곧 미래에 나타날 베트콩의 정체라는 주장의 기본 전제부터가 붕괴된다. 물론 미국과 남베트남 쪽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 자체는 명분이 없는 짓이 맞지만,그 거부의 원인이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이 온갖 더러운 짓으로 남베트남 사회를 교란하리라는 불안은 아주 제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베트콩이 했던 만행 중 가장 유명한 만행인 후에 대학살의 경우, 매우 명백하게 베트콩이 자행했던 학살들의 성격이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현지 지휘관의 감정 통제 실패로 일어난 학살이 아닌, 철저하게 상부로부터 꾸며진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추축국 스타일의 학살임을 드러낸다. 남베트남이 후에를 재탈환한 뒤 공식적으로 발표한 학살 희생자 통계가 4,062명인데, 이때 베트콩한테 납치되거나 시신이 영구히 유기되면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남베트남이 보복 부대를 만들어서 베트콩들을 척살했다는 서술을 근거로[* 영문 위키피디아의 경우, 출처를 두 곳으로 적고 있다. 오버도퍼(Oberdorfer)의 책과 윌뱅크스(Willbanks)의 책들이 그것들이다. 이들 중 윌뱅크스의 책은 저자 스스로가 주장한 게 아니라, 보복 부대가 죽인 사람 수가 오버도퍼의 주장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한 가렛 포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가렛 포터는 그가 인용했다는 베네마 교수의 글이 그의 주장과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실상 사기꾼으로 드러난지라, 포터의 주장은 사실상 가치가 사라진 상태다.] 상당수가 오히려 남베트남 쪽의 짓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저지른 후에 학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목격자들과 발굴자들의 증언으로 상당수는 정립이 끝난 상태다. 가렛 포터가 조작 인용했던 알예 베네마 교수의 경우 지아 호이 지역에서만 2397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추산해서, 이미 남베트남 정부 공식 통계의 반을 넘어간다.[* [[https://gall.dcinside.com/m/war/1313728]] ] 이 희생자들은 이미 베네마 교수가 생존자들에게서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사람들이라는 증언을 받아 기록한 상태라 남베트남이 어쩌구 할 여지 자체가 없다. 다 마이 개천에서 발견된 500명 역시 마찬가지. 애당초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https://www.vvfh.org/index.php/component/easyfolderlistingpro/?view=download&format=raw&data=eNpVULtuwzAM_BVCP1AbBdJWGdOhQwp0yB4wFm0TkCVDD1wnQdB_L2U5QxdRPN6RPKJuW_2IeqdV762hoPZRv2mVZ-vRxJIJQeVIodYrpFXzLA2ZYvqnPZ9XrGTvVepwopI2WpWwqygbtWfdVFEgO2Ma165Ce5kwRuwCxa1Nz5aebdpG5h45JvA9HHhhy-hcInxvEgOXO6SR4OCnKTvhRfjMgd1cMFwnSkLLcBrRATuJGeVhcvAT_MKuI0ADX1nEnO5tmfaqFd3S9ptNv7mk28zretVCWRpTwm6cyAn7sqIfogi0MF3rdcT54P1gxcbvH0hTeo8,|발표]]한 4062명만 해도 이미 다 신원확인이 끝난 마당에 남베트남 보복 부대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 어디에 끼어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전직 베트민 인원들에 대한 대규모 정치적 탄압과 투옥 등의 행태 때문에 당시 월맹(뒷날의 베트콩)들이 과격화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이런 논리는 상술한 57년부터 베트민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중앙정권이 아닌 각 시골의 유지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시골의 일반 양민들까지 타겟으로 무차별적인 대규모 테러리즘을 벌였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논리로 전락했다. 응오딘지엠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그 때문에 저항세력이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응오딘지엠의 정권 주축에 해당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이 벌어져야지, 시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겟이 되었다는 건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다. 하나, 이들 베트민 인사들이 애초부터 응오딘지엠의 판단대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을 벌일 위험분자였던지, 아니면 55년 이후로 이들의 행동원리가 이미 북베트남 정권에게 종속된 뒤든지. 1968년 구정 공세 때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이 기대한 일제 봉기가 없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기대와는 달리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마치 수정주의적 시각이 학술적으로 옳은 내용인 마냥 과대해석 하는데, 구정 공세의 실패는 공산군이 68년 2월이라는 구체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민심이 일방적으로 하노이측으로 기울어진건 아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십만 단위의 게릴라 반정부 단체가 국가 내 국가를 만들어[* 심지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안에 또 다른 국가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중국, 소련, 쿠바,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는 물론 대사급 외교관계까지 형성했다.''' 그것도 구정공세 이후인 1969년에 말이다.] 10년 동안 그걸 유지하다 겁대가리도 없게 이걸기반으로 남베트남정부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54만9천명이나 되는 [[미군|세계 초강대국의 군대]][*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50만을 넘었다.]에게 전면전을 걸을 만큼 성장했다는 문맥 자체는 싹 빼두고 이게 마치 남베트남이 국민일반의 지지를 받는 정상 국가의 증거였다는 양 '''제시하는 건 얄팍하고도 단편적인 관점이다.''' 10만 단위의 베트콩이 유지되었다는 건 남베트남의 폭정 때문에 남베트남 안에 자체적인 저항세력이 온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베트콩이 꾸준히 북베트남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테트 공세에서 남베트남인들의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은가? 애당초 이 십만 단위의 베트콩들이 내내 벌여된 인민재판, 신체절단 등의 가혹한 폭력행위, 학살 등으로 인해 남베트남 민중들의 민심은 베트콩에게서 아주 단단히 떠나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육성에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한 1965년부터 수만 단위에 불과했던 민병대가 몇 년 안되어 70만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65년 이전까지는 남베트남 정부가 지원을 매우 부족하게 해주고 이들의 훈련을 담당한 남베트남군의 능력 역시 형편없어서 사정이 열악했다.] 또한, 테트 공세 이후인 68년 중반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People%27s_Self-Defense_Force|인민 자기방어군]]이라는 더 낮은 단계의 민병대까지[* 지방군이나 시민군과 달리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주로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백만 단위로 생겨났는데, 한 마디로 인구가 2천만에다 주 산업이 농업인 남베트남에서, 전시동원상태도 아니었던 상황에서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형편없는 제반조건과 위험한 환경 아래에서도 자원해서 총을 들고 나선 것이다. 베트콩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민심이 매우 험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남베트남인들은 무능의 끝을 달리는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을지언정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싫어하고 저항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각종 공산주의 국가들과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베트콩의 독립성에 대해 아무런 시사점도 없는 일이다. 원래 적성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립능력이 없는 괴뢰국임이 뻔한 집단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는 건 현대사회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남오세티야]]가 베네수엘라 같은 반서방 국가들 몇개로부터 승인받았다거나, 남오세티야와 도네츠크가 서로를 승인했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남오세티야와 도네츠크 모두 러시아의 지원이 없다면 절대로 자립할 수 없는 괴뢰국가 이상이 아닌 것이 [[https://theconversation.com/south-ossetia-the-case-for-international-recognition-118299|현]][[https://gall.dcinside.com/m/war/1254383|실]]이다.] 다시 50년대로 돌아와서, 이런 식으로 57년부터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날뛰던 남쪽 베트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주기 시작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건 분명히 총선거 거부 가지고는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백한 도발행위가 분명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국 내부의 베트민 인사를 탄압했을지언정 북베트남처럼 이런 상대국 내부의 막나가는 테러리스트를 대규모로 지원하면서 아예 교육받는 아이들까지 공격하라는 개막장 지령을 내린 적은 없다. 남북 베트남 자국 각자의 내부 문제를 넘어서 상대국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던 것은 분명히 북베트남이 먼저이며, 그 방식까지 추축국에 비견될 만한 악질이었던 점에서 북베트남 정권 그 자체와 당시까지 분명히 명목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 최고 지도자였던 호치민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호치민, 쯔엉찐 등의 북베트남 수뇌부는 대규모 기습 전면전으로 길고 참혹한 전쟁을 만들어 낸 [[김일성]]이나 [[박헌영]] 같은 자들과 동급의 전범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더라도 북베트남 정권은 분명히 50년대 후반부터 이미 악질 테러범들을 지원하고 지령까지 내리는 [[테러지원국]] 위치에 있었으며, 북베트남이 어느 정도 명분을 가지고 있었어도 그따위 방식의 더러운 수법이 정당화될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애당초 아무리 집권 정당성이 있는 집단이라도 죄 없는 민간인들, 특히 여자들과 어린애들 같은 약자들을 계획적으로 괴롭히고 참살한다는 건 용납되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연산군]]은 집권 정당성이 없어서 쫒겨났는가? 반대로 [[세조(조선)|조선 세조]]가 부정적으로 재평가 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집권 정당성이 없어서 그런 거라기보다 군주로서 각종 문제가 재조명된 점이 크다. 베트민은 이미 57년부터 독립운동으로 얻었던 정당성은 모조리 내팽개쳐버린 뒤였던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인 데다가 집권 초기에 나름대로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종신독재로 그러한 정통성을 날아가버렸다.] 결국 호치민은 김일성이나 히틀러 같은 인간들과 동급 전범만 아닐 뿐이지 분명히 전범으로 취급되어야 할 인물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