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찌민 (문단 편집) == 여담 == 호찌민이 유럽이나 미국을 일하며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보스턴]]의 유서깊은 호텔인 Omni Parker House(옴니 파커 하우스)는 호찌민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제빵사로 일했던 사실로 유명하다.[* 지금도 꽤나 고급진 호텔이다. 이 호텔은 현재 보스턴 Parker Street(파커 스트리트)역 근처에 있다.--물론 호찌민이 일 했다는 흔적을 보여주진 않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1929%EB%85%84_%EB%B0%95%ED%97%8C%EC%98%81.jpg|#]]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최근에는 이 사진이 1921년에 촬영되었고 뒷줄 맨 오른쪽의 사람은 호찌민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출처-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015)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가 목민심서를 읽고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한 가지 알아둘 점은, '''호치민은 목민심서를 읽은 적이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찌민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 출처 : 박헌영 평전]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192474|#]] 하지만 그와 별개로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9/29/0200000000AKR20180929039500081.HTML?input=1195m|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주석릉은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호찌민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 7월에도 폐관할 때가 있다.] 호찌민 주석릉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 휴대폰 보조 배터리 정도는 들고가는 것을 허용해준다.]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는데, 일반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바딘 광장의 모습과는 달리 줄을 서야 하며, 줄을 서는 와중에 촬영하려 하면 지키고 있던 군인이 막기도 하며 모자를 쓰고 있으면 군인이 와서 모자를 벗으라고 지시한다. 호찌민 주석릉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주석릉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 시에 유의하자.[* 이때문에 능에 입장하기전 앞에 있는 군인들이 정숙하라고 지시한다.]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 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 동부, 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찌민 박물관과 일주사, 그리고 집무실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 들어갈 때 짐을 [[사물함]]에 넣거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 한다.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NKVD]]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수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103|네이버캐스트 호찌민]] 호찌민은 중국에 방문했을당시 공자 생가를 방문하며 "나는 공자를 존경해왔다."라고 얘기했다 한다.[*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806]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인 1969년에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따르면, " 아옌데는 당시 호치민이 스페인어로 자기 일행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이용했던 아르헨티나 증기선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치민의 그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건냈다"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16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imilsung1958.jpg|width=100%]]}}} || || [[김일성]]이 [[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 호찌민과 김일성 간의 일화로,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 같은 사회주의 동지로 호찌민이 파병 요청을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하고 다만 간접적이나마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이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사태]]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김일성, version=3460, paragraph=2, title2=1.21 사태, version2=787, paragraph=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