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찌민 (문단 편집) === 1년의 투옥과 미국 OSS와의 협력관계 구축 ===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 앞의 리투이나 호찌민의 이름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이 당시까지도 호찌민은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건 1940년부터다.]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9월 감옥에서 석방된 호찌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가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의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1944년 11월에는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상공에서 떨어져 공군조종사 한 명을 살려줌으로써 미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1944년에 중월국경지대에 비상착륙하게 된 미군 조종사의 이름은 루돌프 쇼 중위였는데. 그는 한달간의 여정 끝에 호찌민과 접촉할 수 있었고, 영어로 말하는 호찌민의 목소리를 듣자 그를 끌어 안았다고 한다.]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OSS는 호찌민에게 리볼버 권총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던 1945년 4월 30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국 운남성에서 미국 OSS의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호치민이 만남을 가졌다. 패티 소령은 노인 한 사람이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찻집을 나가려 했는데, '''어서 오시오, 친구!'''라고 노인이 영어로 첫 인사를 건냈고, 대화를 통해 호치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호치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패티는 훗날 TV 인터뷰에서 이날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4월 30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난 날짜가 30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이었고요. 그 동안에 나를 따라서 28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는데, 그 중에서 약 5만 7,000명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이 조용한 나라에서 벌어진 의문투성이의 전쟁에서 2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2 1945년 4월 30일 중국 운남성에서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접촉했던 호치민은 6월 30일 패티에게 무전을 쳐, 미국인들로 구성된 팀을 받아들이겠으니 도착 날짜를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며, 7월 16일 OSS로부터 베트민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디어팀의 지휘관 앨리슨 토머스 소령은 소규모의 부대원들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탄짜오에 도착했다. 토머스 소령은 베트민의 반일작전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노획한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200명의 베트민 게릴라는 토머스 소령의 대원 두 명을 땅에 내려준 뒤 그들을 환영하는 경례를 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이 미군들을 영어로 환영하며 따뜻하게 맞이해주었고, 식사도 아주 풍요롭게 대접했으며, 숙소까지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토머스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어 나는 호위를 받으며 베트민의 고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 씨에게 갔다. 그는 뛰어난 영어를 구사했으나, 징시로부터 걸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신체적으로는 매우 허약했다. 그는 우리를 아주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어 우리는 숙소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대나무 숙소를 지어주었는데, 지면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대나무로 바닥을 깔았고, 위에는 야자 잎으로 지붕을 덮어놓았다. 이어 우리는 맥주, 밥, 죽순, 구은 스테이크로 저녁을 먹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소까지 잡아주었던 것이다. >----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449 이처럼 호치민은 미국인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토머스 소령은 베트민 무장 세력의 질을 높이 평가했다. 토머스 소령은 쿤밍의 승인을 얻어 지역 부대원들에게 M-1 개런드 소총, 카빈 소총, 바주카포 등의 사용법과 게릴라 전술을 가르쳤다. 호치민의 최고의 무장대원 가운데 100명이 선발되어 탄짜오 마을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미군이 지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디어 팀의 부대원이던 헨리 프루니어에 따르면 그들이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고.[*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450] 미국OSS로 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 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베트남 전쟁|그 결과는...]]'''2차세계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서 베트민과의 공동작전을 펼쳤던,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소령은 자신이 쓴 저서 <알바트로스의 서곡 왜 베트남인가?: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이클 메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호찌민을 처음 만난 것이 1945년 4월 30일이었고(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날이기도 하다.),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점령하여 통일을 이룩한 날 또한 1975년 4월 30일이로서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기간이 총 10000일이 된다고 한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 마이클 매클리어는 이에 대해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돌이켜보면, OSS는 불과 1개월 동안 약 200여 명을 선발하여 미래의 베트민 지도자로 양성한 셈이었다. 얼마 후 베트민군 사령관이 된 잡은 ‘사슴팀’이 자신들을 도와 점령한 마을을 탄짜오라고 명명했다. 그 뒤 호치민이 이 마을에 임시정부를 설립함에 따라 탄짜오는 베트남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OSS는 이후에도 계속 호치민의 군대를 훈련, 무장시킨 다음 함께 전투를 펼쳤다. 이와 같은 일은 훗날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살펴볼 때, 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2007913_1687312744673672_1546756278104095425_n.jpg|width=100%]]}}} || ||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호찌민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