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찌민 (문단 편집) === 혼란기와 프랑스의 축출 === >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대중 앞에 섰다. 수도에 처음 온 것이었음에도,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호찌민은 "국민 여러분, 제 말이 들립니까? 제 말이 여러분에게 와닿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연설이 있기 몇 주 전, 떤 짜오(Tan Trao)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새로운 베트남을 위한 의제가 제시되었다. 호찌민은 "민족해방위원회와 모든 대표단의 목적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해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먹고 입으며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노이에 모였던, 그리고 베트남 전역의 민중은 호찌민의 말을 듣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호찌민의 슬로건은 식량, 의복, 그리고 교육이었다. > > > 한 국가의 인구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려면, 그만큼의 자원이 필요하다. 베트남 혁명은 더 이상 베트남의 사회적 부가 프랑스와 서구 사회로 유출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정부는 이러한 부를 활용해 수 세기 동안 베트남 농민이 겪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바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노동력은 베트남의 전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 자본가, 특히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데 쓰여야 했다. 베트남 국민의 우선 과제가 베트남의 발전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프랑스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 과제여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베트남 왕조와 그들의 수하들과 공모해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후에도 미국은 1975년 패전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조장했다. >---- >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옮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 p.23~24 > 호치민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을 했을까, 아니면 그의 행동들은 하노이가 전쟁을 위한 적절한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 두 가지 결론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4세기 중국의 병법가 손자의 가름치에 따라, 호는 최고의 승리는 무력을 이용하지 않고 얻어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폭력 없이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경우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은 역시 손자의 말에 따르면 외교와 선전을 이용하여 적을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12월 19일, 호와 그의 동료들은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문제는 전장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588 > 1946년 12월 19일 오후 8시 하노이가 공격당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행동이 우리 조국에 대한 침략을 목쵸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며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이제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습니다. 손을 묶이고 머리를 숙인 채 다시 노예로 머무느냐, 혹은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느냐 입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또 다시 프랑스인들에 의해 강요되는 외국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다시 노예가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독립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 > 1946년 12월 호찌민의 호소 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는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군과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고, 영국군이 들어오는 동시에 프랑스 또한 같이 들어왔다. 이후 호찌민은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고, 호찌민은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어야한다"는 프랑스의 요구에 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퐁텐블로 협상이다. 1946년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 지도 세력들은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회담을 가졌었다. 퐁텐블로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결과 호찌민은 별다른 성과없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호찌민은 내심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프랑스편이었던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참고로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만약 미국이 베트남을 돕는다면 우리 프랑스는 소련의 동맹국이 되겠다."고 협박했다.~~근데 정작 소련은 베트남을 편 들었지.~~]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 그런데 정작 호찌민은 자신이 폐위시킨 이 황제를 존중해 주었다. 그가 폐위된 후에도 언제나 폐하라 부르며 존대를 했으며 많은 돈을 생활비로 계속 지급해주기도 했다. 폭군은 아니지만 불쌍하다느니 하며 가엾게 볼 수만은 없다... 막부시대 일본 천황이나 다름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좌절감에 빠진 비운의 군주이긴 하다.]를 지도자로 내세운 괴뢰 정부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으로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배하겠다는 속내음을 드러냈고 협상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참고로 하이퐁 포격으로 인한 베트남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이다.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을 참고] 하이퐁 포격 이후 프랑스군은 북베트남에 상륙했으며, 12월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였던 하노이에 진입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기인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12,000명의 공수부대를 포함한 병력을 동원하여 비엣 박을 공격하고, 신속하게 베트민의 본부를 찾아냈다. 당시 호치민은 프랑스군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으나, 호찌민과 그의 수하들은 무사히 탈출하였다.[*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은 오두막의 책상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들과 호치민의 서명만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침략자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수많은 베트남인이 베트민에 가담했다. <세계게릴라전사>를 쓴 로버트 에스프레이는 베트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독랍(Độc lập)'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 > > 호치민 아저씨(Bác Hồ)의 말대로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 > 베트민 공작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이는 노동자, 농민 등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 >베트민은 인민의 정당이었다. > >베트민은 인민전쟁을 위해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 >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54 항불전쟁 당시 베트민의 젊은 장교였다가 이후 초대 유엔 대사로 근무한 하반라우(Ha Van Lau)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 궁핍은 베트민을 자극했고, 농민들은 베트민을 지원했다.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60 이어서 하반라우의 증언이다. > 베트민은 물 속의 물고기와도 같았다. '''인민들과 함께 한다'''는 정신은 [[베트민|우리]]들의 슬로건이었다. 우리 전사들은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인민들 속에서 활동했다. >---- >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63 따라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침략한 프랑스군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비정규전에 훨씬 많이 직면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도와준 촌락에 보복 공격을 가해 인민들을 완전히 소개시켜 버렸다. 결국 이와같은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민중탄압 정책과 학살은 주민들에게 저항감을 자극하여 이들이 베트민을 지지하도록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베트민은 여러 전투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 세력의 성격이 훨씬 강한 집단이었다. 당시 베트민으로 참여했던 소설가 쑤언부(Xuan Vu)의 회상을 보면, 항불전쟁 시기 베트남 민중들이 어떠한 정치집단을 선택했는가를 알 수 있다. > 도시에는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그 밖에는 베트민 게릴라가 있었다. 나의 마을과 다른 모든 마을들은 베트민의 통제 하에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과 영혼은 베트민에 속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운동의 한 부분이었으며, 그 운동을 지지했다. >---- >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38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대륙 통일을 이룩하자 중국 공산당은 베트민을 지원했고,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해줬다. 반면에 미국은 매카시즘이 격화되면서,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와 그 하수인인 바오다이 정부를 지원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미국은 바오다이 정권의 수도 사이공에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을 보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권을 위해 1,000만 달러를 지원하기에 이른다. 1950년 9월 보 응우옌 잡이 지휘하는 베트민 부대들은 중월국경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게시했고, 특히나 중월국경지대에서 발생한 동케 전투에서는 베트민군이 최소 300명 이상의 프랑스군을 사살했다.[* 이 시점부터 베트민은 게릴라전을 넘어 프랑스 정규군을 상대로한 전면전까지 구사하는 군대로 거듭났다. 1950년 중월 국경지대에서 치른 전투에서만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전면 공세로 7,000에서 8,000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 특히나 1951년 10월에서 1952년 2월까지 전개된 호아빈 전투에서는 1만 여 명의 사상자를 냈음에도 프랑스군 대규모 병력을 물리치는 쾌거를 이룩했다. 따라서 1950년부터는 베트민도 정규전에 능한 군대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련 논문인 정재현,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요새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지 제국의 해체」, 『프랑스사 연구』 48, 한국프랑스사학회, 2023, p.143을 참고함.] 10월 말에는 베트민이 홍강 삼각주 인근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화력에서 우세한 프랑스였고 뒤에서 미국이 빵빵하게 지원했지만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시점과 비슷한데, 당시부터 호치민은 미국의 개입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대화는 어떤 기자와 호치민의 대화다. > 기자: 호치민 각하, 미제국주의자의 인도차이나 개입 정책의 현상황은 어떻습니까? > > > 호치민: 미제국주의자들은 최근 인도차이나 사건에 공공연하게 개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자금과 무기로, 그리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를 밀어내고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그들의 책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군사, 정치, 경제 전분야에 걸쳐 직접적인 개입을 극도로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미제국주의자와 프랑스 식민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져 가고 있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인 것입니다. > > > 기자: 이러한 개입이 인도차이나 인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 보십니까? > > > 호치민: 미제국주의자들은 인도차이나 인민을 몰살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충복인 괴뢰정권에게 군장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지역의 수공업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자기들의 상품을 인도차이나에 퍼붓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색문화는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중을 매수하고, 속이고, 분열시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 사악한 국민을 그들의 도구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 조국을 공격하게 합니다. > > > 기자: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까? > > > 호치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 인도차이나 인민은 우리의 주적인 프랑스 식민주의자를 격퇴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그들의 개입이 심화될수록 우리의 단결심과 투쟁은 강고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민, 특히 미제국주의자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의 인민들 앞에 그들의 책략을 낱낱이 까발리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제국주의자에 빌붙어서 우리 인민을 억압하고 기만하고 분열시키는 모든 앞잡이들을 폭로할 것입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인민 간의 강고한 결속은 프랑스 식민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들을 격퇴시킬 수 있는 세력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중국에서 실패했고 인도차이나에서도 굴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심각한 곤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승리는 반드시 우리것이 될 것입니다. >---- >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대한 답변 1950년 7월 25일 그리고 호찌민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디엔비엔푸 전투]] 문서를 참고해도 좋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8년 동안 프랑스는 총 8만 명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전투에서 잃었다. 1954년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전사하고 10,000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71 그리고 p.95]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 지휘관 카스트리를 포함하여, 디엔비엔푸에 있던 사실상 프랑스군의 전 병력이 베트민에게 항복한 셈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100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는 의의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식민지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4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승전 10주년을 맞아서 쓴 글의 내용처럼,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보 응우옌 잡, 강범두 역, 『디엔비엔푸』, 길찾기, 2019, p.501] 아래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설명한 항불전쟁 승리 이유다. >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완전한 해방을 맞은 북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원수들은 쫓겨갔으며 지주들은 계급으로서 제거되고 국민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굳건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전진함으로써 북쪽을 나라의 재통일을 위한 활동의 견고한 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베트남인민이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까닭은 나라와 민족의 정당한 이익을 위하여 자주와 통일을 이루려 한 정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사실이 전체 인민으로 하여금 저항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승리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바치게 한 것이다.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이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은 인민의 혁명무장대 즉, 영웅적인 '''베트남인민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의 정치노선에 따라 창설된 이 군대는 불굴의 투지에 넘쳤으며 끈기있는 정치사업에 익숙해 있었다. 군대는 또한 인민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채택했다. 그것은 무에서부터, 대중적 애국단체들로부터 일어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인과 학생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부류들을 규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인민으로부터 탄생하였으므로 인민을 위해서 싸웠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당이 이끄는 군대였다.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이 승리한 것은 모든 혁명적 계급과, 베트남 땅에 사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애국지사들로 이루어져 광범위하고 견고한 '''민족연합전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선은 당의 영도하에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 > 러셀 스테들러, 류영래 역, 『인민전쟁 군사예술론』, 참한사상, 1990, p.101~102 결과적으로 8년에 걸친 항불전쟁은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와 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대중들에 의한 승리였다.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4년 10월에는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호치민은 제네바 회담에서 결정에 수긍하는 쪽을 선택했다. 듀이커가 쓴 책의 내용을 보자. > 호치민은 당의 정확한 지도와 세계 여러 민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완전한 독립과 민족 통일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호치민은 저우언라이의 충고를 따라, 당의 동료들에게 완전한 승리에 비하면 훨씬 불만족스러운 타협적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며칠 전 류저우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그런 방법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호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타협적인 평화안을 수용한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드러났던 그의 태도, 특히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혼자서 잘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변화의 맥락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676~677 또한 호치민은 1954년 7월 15일부터 베트남노동당 제2기 제6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 지금 프랑스는 우리와 교섭하고 있고, 미국 제국주의가 주요한 직접적인 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공격의 화살은 미국 제국주의에 집중되어야 한다. 현재의 새로운 정세를 앞에 두고 우리는 옛 노선을 지킬 수만은 없다. 이전 우리의 구호는 철저한 항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정세에 의해 평화, 통일, 독립, 민주의 새로운 구호를 내세워야 한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가 직접 간섭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을 장기화하고 확대하지 못하도록 평화의 깃발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정책도 변화해야 한다. >---- >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역),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p.17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