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기문 (문단 편집) === 북한에서의 삶 === 월북 직후 1949년 김일성대 부교수, 1959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이 되었으며 1963년 사회과학원 부원장에 임명,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5월, [[박문규]] 장의위원, 1974년 1월, [[박열]] 장의위원장,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9월 21일,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허정숙]]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으로 재선되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리조실록 번역의 공을 인정받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시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5년 2월, [[량광일]]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연구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에서 역사학자로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조선대백과사전 24권 홍기문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일찍부터 민족어를 사랑하고 고수발전시키려는 지향이 컸으며 조선력사를 귀중히 여겼던 그는 8.15 전에 벌써 론문 <리두연구>를 발표하였고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력사를 소개하는 글 <조선력사>를 <서울신보>에 련재하였다. 광복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한문교과서들을 집필하는 한편 모국어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조선어문법연구>(1946년), <정음발달사>(1947년), <향가해석>(1956년), <조선고가요집>(1958년), <조선어사연구>(1959년), <조선사화연구>(1960년), <조선력사문법>(1962년) 등 가치있는 연구론문들과 력사일화 <락랑벌의 사냥>(1964년)을 발표하였으며 <대동야승>(1권, 1957년)을 비롯한 민족고전도서들을 여러권 번역하였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실력과 공적은 방대한 규모의 <리조실록>과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발휘되였다, <김일성훈장>(1973년)과 조국통일상(1990년),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많은 훈장과 메달들을 받았다. 원사(1962년), 교수(1961년), 박사(1961년)이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1992년 7월 3일에 사망했으며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