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력덕후 (문단 편집) === 조선 === 진정한 화력덕후의 민족의 역사는 조선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훈민정음]]처럼 문(文)의 이미지가 강한 [[세종대왕]]이나 허약한 이미지가 강한 [[문종(조선)|문종]] 역시 화력덕후였다. 아니, 이 두 군주가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화포의 사정거리 향상에 열을 올렸던 군주들이었다.[* 심지어 세종대왕은 한국사 최후의 정복군주다!] 그 유명한 [[신기전]]이 세종대왕의 작품이며 특히 문종은 화포 전문가였고 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잘 알려진 형태의 [[화차(무기)|화차]]는 '''문종이 직접 설계한 것'''이다. 그래서 별칭이 '''문종대왕 화차''' 라고 되어 있다. 한국의 화력덕후 성향은 조선시대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또 세종대왕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화약무기의 수는 다른 나라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물론 이는 [[왜|남쪽]]이건 [[여진족|북쪽]]이건 쉴세없이 들이치는 이민족들의 공세를 막기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화포사랑은 유별났던 셈이다. 성종 17년(1486년) 11월에는 아침 조회에서 예조판서 유지가 "도성 내 집 두 채에 귀신이 들렸다"면서 이를 퇴치하자고 건의하나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다른 관료가 귀신이 들린 집 주인 중 하나인 영의정 [[정창손]]은 자신의 집에 귀신이 있다는 이유로 이사가자는 아내의 말에 "내가 늙어서 곧 죽는다고 해도 귀신 때문에 이사는 안간다."라고 말하고 나서는 집에 두 번 다시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당 발언을 한 정창손은 이 다음해인 성종 18년(1487년) 1월 27일 사망한다. 그러자 예조판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화포를 동원해서 귀신을 쫒을 것을 건의했다.''' --귀신잡다가 초가삼간 다 날려먹게 생겼다-- 폭죽 소리에 놀라서 귀신이 도망간다나.[* 중국의 [[춘절]]에서 길거리에서 떠들썩하게 [[불꽃놀이]]하고 [[폭죽]] 터뜨리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이건 서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티에서 요란하게 잔을 부딪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물론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참고로 예조판서는 오늘날의 보건복지부, 외교부, 교육부, 여성가족부 등을 한데 합친 기관의 수장으로 장관급 인사에 해당된다. 그리고 훗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종묘에 포를 쏘아 귀신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6월 18일 신미 5번째 기사 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종묘에서 화포를 쏘아 재앙을 쫓게 하다. 종묘(宗廟)에서 화포(火炮)를 쏘아 양진(禳鎭)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순신]] 장군은--최선의 방어는 공격-- 각종 화약무기와 화포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포격전으로 일본군 수군에 악몽의 기록을 써내려 갔다. 대중적 이미지는 [[거북선]]이 조선 수군의 결전병기 취급받지만 실제로 조선 수군의 핵심은 [[판옥선]]이었는데, 일단 '''1척에 [[천자총통]]만 해도 24문 이상을 적재'''하였으며,[* 현대 군함도 한 척에 함포를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적재하지는 않는다. [[중세]]의 [[가네다 전함]]이 따로 없는 셈. 차후 [[임진왜란]]같은 실전을 겪고 얻은 노하우와, 경제도 악화되어서 점점 규모가 축소되었다. ] 그 정체가 [[AC-130|떠다니는 포탑]]로 근해에서 수상 포격전을 가장하고 만든 물건이라 수많은 왜선이 선상 백병전을 시도하러 접근하기도 전에 화포를 퍼부어 절반은 접근도 못하고 산산조각을 내서 고기밥으로 만들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명량해전때는 '''0:133'''이라는 말도 안되는 교전비를 세워냈다. 한편 함포만으로 부족했는지, 적선과의 근접전에서도 사용할 용도로 사용한 50-200개의 쇠구슬, 자갈을 넣어 쏴 적을 [[확찢|갈갈이 찢어버릴 수 있는]] 조란환[* 딱 봐도 알겠지만 이는 현대로 치면 산탄야포다.]부터 시작해서 폭발력만 없을 뿐인 관통형 대함미사일 [[대장군전]]까지 적재하고 다니며[* 문서로 들어가보면 그 구조가 무려 [[날개안정분리철갑탄]]이다.] 왜적을 물리치는데 썼다. 게다가 중세시대에 시한신관이라는 개념까지 탑재된 [[비격진천뢰]]같은 무시무시한 병기를 관군도 심심찮게 쓴것도 모자라 그걸 [[경주성|의병이 운용하고 다녔다.]] 또, 왜군이 운용하던 조총도 받아들여 총포부대도 만들었다. 오죽하면 임진왜란때 써보니 너무 고화력이라 후기에는 화력을 줄였을 정도다. 이런 교리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어져, [[효종(조선)|효종]]~[[숙종(조선)|숙종]] 당시 [[조선]]이 양란 이후 군비를 재강화하던 시절에 "'''나라 살림도 어려운데 수입산을 왜 이리 낭비합니까?'''"하는 반대 의견이 나온다.[* 참고로 이 시기에는 [[화약]]을 만들 [[유황]]과 [[대포]]를 주조할 [[구리(원소)|구리]]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했다. 그나마 어떻게든 만들 수는 있는 재료인 염초조차 국내 생산량이 부족해 [[명나라]]에서 엄청난 양을 수입해서 충당하였다. 현종 대에 유황 광산이 발견되고, 인조 대의 신전자취염초방을 거쳐 숙종대 신전자초방이 완성되어 기존 방식보다 쉽고 우수한 염초 제작법을 터득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구리는 국내에 유의미한 산출을 낼 수 있는 매장 지역이 없어서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였다. 조선 시절 내내 구리 산출량 해결 방안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일본을 공격한다]] 뿐이었으니 [[답이 없다|이건 뭐...]]] 그러자 국왕을 비롯한 찬성측이 논박하기를, '''"[[조선군|우리]]가 가진 [[화살]]보다 저 새끼들 [[인해전술|숫자가 더 많다는 거]] 알기나 하냐?"'''--레알 [[테저전]]-- 이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한반도 화력지상주의의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애당초 주변 국가들, 특히 국경에 바로 인접해있던 중국과는 인구격차가 예전부터 기본 10배 이상일 정도로 엄청나게 났다. 다만, 조선 말기로 가면서 [[삼정의 문란]]과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등의 여러 실책과 오판이 나오고 결과적으로 과학 기술력이 다른 나라들 보다 퇴보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되었으며, 이를 무마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으나 결국 [[제국주의]]의 맛을 깨달은 일본에게 [[경술국치|나라를 강탈당하면서]] 식민지 수탈 시대를 맞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