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력덕후 (문단 편집) === [[6.25 전쟁]]과 현대 === 이렇게 유려한 화력덕후 역사에서 유일하게 난 구멍이 바로 해방 후부터 [[6.25 전쟁]] 초반 시기. 이 시기는 갓 독립한 [[대한민국]]에게 보병 병력도 겨우 구성한 상황에서 전차 및 자주포 화력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 측은 한국 정부의 요청에도 산세가 험한 한반도의 지형에서 기갑전력은 운용하기 어렵고, [[북진통일|허튼 생각]]을 할 수 없게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만 지원해 [[독립기갑연대]]만 겨우 구성했을 뿐이다. 반면 [[북한]]의 경우 [[소련]], [[중국]]등 공산권의 지원으로 꽤나 든든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지형상의 영향으로 일반적인 기갑화력 교리대로 이상적인 규모로 운용하기는 어려워 종대대형으로 거의 운용하는 상황이기는 했다. 다만 6.25 전쟁 초창기 당시 남한에는 전차 한두대조차도 효과적으로 막을 대전차 전력이 없었다. 춘천 전투에서는 종대로 이동하다 보니 선두와 후미 전차가 불능이 되자 중간의 전차들은 그냥 고립되어서 대전차화기도 없는 보병에게 격파당했다. 이러니 북한의 침공시에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상황은 [[6.25 전쟁/전쟁의 전개]]의 초기 병력 부분 참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방부의 화력덕질은 이 당시 북한군 기갑병력에게 처참하게 깨져나간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풍문인데 6.25 전쟁 당시 남한측 보병들의 수첩에 "'''우리도 [[전차|탱크]] 한 대만 있었다면⋯.'''"이라고 한맺힌 문장이 여러 곳에 적혀 있었다고. 반면 해군은 남북한 모두 상당한 약골이었던지라 [[대한해협 해전]]에서 [[백두산함|구잠함]]과 [[수송선|마개조한 수송선]]이 맞붙기도 했다. 결과는 백두산함의 승리다. [[인천상륙작전]] 등을 통해 어찌저찌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크게 밀려 [[1.4 후퇴]] 상황이었던 1951년에 [[리지웨이]] 장군이 제안한 '''선더볼트 작전'''에서 다시 [[대한민국]]의 화력덕질이 시작된다. 당시 중공군 사령관이였던 [[펑더화이]]는 인해전술로 UN군을 제압하려 했다. 정확히는 인해전술이라기 보단 포위작전 형식이다. 마냥 깡보병으로 밀어 붙인 건 아니다. 자세히 서술하자면 아무리 한반도 전선이 좁다하더라도 부대 간에 긴밀히 연결하기란 어려운 것이기에 부대 사이 틈새를 노려서 침투, 포위하여 각 부대별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산악지대에서 [[전격전]]을 보병으로 이행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선더볼트 작전은 천천히 진격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화력을 쏟아붓는 작전이였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먹혔고 기세를 몰아 수원까지 수복했으며 이후 리퍼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화|K-패치]]된 [[제임스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결단도 절대적이었다. 그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겪어보고 나니 화력전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고 과감하게 밴 플리트 탄약량 원칙을 발표하여 법으로 정한 미군의 통제 보급률따윈 X까고 아낌없이 탄약을 지원해 퍼부었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무슨 탄약을 물 쓰듯 쓰냐고 당시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J.로튼 콜린스까지 의회에 불려가 혹독하게 깨졌지만, 현장에 있는 밴 플리트는 눈앞에 개떼같이 몰려오는 중공군 숫자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하면서 눈도 깜짝안하고 끝까지 버텼고 결국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휴전 이후엔 복잡한 현대사의 흐름에서도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점차 자주포, 전차, 미사일, 전투기 등 최신예 장비들을 확충해나가며 한국군의 화력사랑은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협동으로 만들어진 [[K-1 전차]]나 미스트랄, 재블린 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각종 미사일류의 수입 및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에서 들여온 기술 등을 토대로 자체적인 전차전력 강화나 미사일 전력 도입, K55 라이선스 생산과 각종 기술력을 토대로 개발한 주력 자주포인 [[K-9 자주곡사포]] 등 계속해서 기술축적이 이뤄지면서 결과적으로 세계 굴지의 화력강국이 되었다. 특히 포병 화력의 경우 [[견인포]], [[자주포]] 둘 다 한 손에 꼽는 보유량을 자랑한다. 한 술 더 떠서 [[2021년]] [[5월 22일]]에는 [[2021년 한미정상회담|한미정상회담]]의 결과로 한국군의 미사일 사거리를 제약해 오던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42년만에 전면 폐기'''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 15일]]에[* 다만 첫 실험 성공은 9월 7일에 있었다. 15일은 [[문재인]] 대통령과 [[서욱]] 국방부 장관 앞에서 발사 실험이 있었던 날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YTN에서 이걸 단독 보도할 때는 여덟 번째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른 언론들에서 일곱 번째라고 보도한 뒤로 일곱 번째로 정정되었는데, 이는 "2015년 SLBM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 들이느냐 마느냐에 기인하는 듯하다.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의 주장을 부정한다. [[https://www.ytn.co.kr/_ln/0101_202109190611286282|#]] ] [[SLBM]] [[현무 IV-4 SLBM|수중 발사에 성공]]했다. [[https://youtu.be/3OI4TWBI7lo|#]] 공교롭게도 15일 SLBM 발사 성공 1시간 전에 북한도 경쟁하듯 [[평안남도]]에서 최신형 열차 발사식 KN-23 탄도 미사일을 쏴 올렸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1011836.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