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엄사 (문단 편집) === 창건부터 중창 ===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이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 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광주대구고속도로]] 경로를 따라 [[남원시]]에 있는 아막성까지 신라의 영역이었고 화엄사는 남원에 인접한 [[지리산]] 자락의 길지에 지어졌다.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한 [[진흥왕]]은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 교육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이 분은 신라에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였다. 절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었다. 이후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건의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자장(신라)|자장]](慈藏)법사가 절을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7년]](신라 [[문무왕]] 17년) [[당나라|당]]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신라)|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한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조선)|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구례현의 읍지인 『봉성지(鳳城志)』에 적혀있다. 그리고 의상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 때에 8원(院) 81암자(庵子)로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는 [[도선]]대사가 다시 증축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꾸준한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943년]](고려 [[태조(고려)|태조]] 26년)가 도선대사의 유지에 따라 중수를 한 이후, [[광종(고려)|광종]], [[문종(고려)|문종]], [[인종(고려)|인종]], [[충숙왕]] 때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인 만큼 고려시대 전시대에 걸쳐 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 '''화엄사 연기 조사의 진영에 참배하고(華嚴寺禮緣起朝師影)'''}}} >'''偉論雄經罔不通 웅위한[* 웅장하고 위엄있는] 경과 논에 모두 통달하여''' >(조사는 평소에 『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연하였다. 師平昔講演起▣花嚴) >'''一生弘護有深功 일생 동안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三千義學分燈後 3천 의학이 법등을 나눠 받은 뒤로''' >'''圓敎宗風滿海東 원교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본전에서 가르침을 전한 의학의 수가 3천이었다고 하였다. ▣▣▣▣▣▣▣▣▣▣) >---- >『대각국사문집』 또한 [[의천|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방문하여 화엄사를 처음 세운 연기 조사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시가 전해진다. >화엄사는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화엄사의 모습이다. 이 기록은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